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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THATch] 그리스도 요가 (1/2)

Buddhastudy 2025. 3. 18. 19:40

 

 

그리스도 요가는 <티벳 성자를 찾아서>의 후속편으로

현재 국내에는 <영원한 진리를 찾아서>라는 이름의 통합본으로 출간돼 있습니다.

저자인 맥도날드 베인은

20세기 초반의 영성 탐구자이며

티벳 여행과 가르침을 이 책에 담았습니다.

 

그리스도 요가에는 조건화에 대한 주제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데

이 가르침이 티벳 성자를 통해 베인에게 전달됩니다.

 

이것을 정리해 보고 싶었는데요.

일단 이번 동영상에서는

그리스도 요가에 대한 베인의 설명을 요약하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베인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살짝 저의 의견도 가미하는데 아마 발견하시기는 어려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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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요가는 그리스도 의식으로 자유를 의미합니다.

자유가 없는 그리스도 의식은

단지 시스템, 지식 테크닉의 짐을 진 자아일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욕망과 모색은 자아의 연장에 불과한데

자아는 실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요가는 실재인 그리스도를

가리고 있는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요가는 다른 모든 종류의 요가와 전적으로 다릅니다.

다른 요가들은 모색을 요구하는 체계에 불과하며

그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환영입니다.

 

실재는 지금 존재합니다.

마치 선불교에서 말하듯

당장 눈앞에 있으나 보지 못할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존재를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우리는 마음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움, 즉 실재에 온갖 저항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구조와 작동 메커니즘을 모르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볍게 듣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듣고 싶어 하는 것들만을 들을 뿐이죠.

그들은 자신의 상태, 신조 견해들을 꿰뚫거나

그것들에 혼란을 주는 곳에는 마음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들은 자신의 상태를 만족시키는 듣기 좋은 소리만 들으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로해 주고 만족시켜주고

우리의 신조와 관념을 공고히 해 주는 것들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진정한 이해라는 건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무지, 신조, 지식, 개인적 특성, 사적인 관점 등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하지 않고

편견 없이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리고 문제의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귀를 기울이는 것은

하나의 기술입니다.

 

우리를 근본적으로 해방시키는 것은

어떤 추론이나 사변이 아니라 진리뿐입니다.

성경에서도 너희가 진리를 알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진리가 아닌지 인식하는 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이루고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깨달음의 전통에서

자각, 각성, 깨어있음, 현존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진리는 마음을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드러나려면 마음이 그 작용을 멈춰야만 합니다.

선불교의 표현으로 선정은 번뇌의 현행을 제압합니다.

마음이 일단 멈춰야

날뛰는 생각의 원숭이가 조용해져야 합니다.

 

우리를 구속하고 우리 눈을 멀게 하는

신조, 지식으로 조건화된 편협하고 광신적인 마음에게

진리는 현실 되지 않습니다.

사적인 결론, 믿음, 편견, 경험들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지고는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유롭고 역동적인 원리이며 관념이 아닙니다.

관념은 조건화된 자아의 투사에 불과하기 때문에

들을 때 말이 아닌 그것의 내적인 내용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자신의 구성 작용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때

비로소 진리가 현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다툼, 두려움, 사업 걱정, 가족 불화, 사회적 증오심과 좌절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감당하기 힘들어 합니다.

우리는 위안의 수단으로 이른바 진리를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도피입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둔하게 만들 뿐이고, 혼란은 여전히 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도망치려고 하는 한

그 작용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음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자유를 성취하는 데 필수적이고

어쩌면 그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자아 인식이 유일한 길이고

모든 종류의 도피는

그리스도 요가의 근간을 이루는 원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장 완벽하고 가장 기본적인 수행은

단순히 이 []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내가 곧 참나이고, 실재이며, 성품이자,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관념, 이론, 사변이 아니며

온갖 허구로 가득 찬 자아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이 자아 인식이 바로

진리에 이르는 문, 그리스도 요가의 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들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이 편협하고, 제한돼 있고, 통제받고 있으면서

스스로의 욕구와 마음이 속해 있는 환경의 영향과 마음

자신이 축적해 놓은 지식들에 따라서

틀이 형성되어 있다면

너무나도 명백하게 마음은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고립시키는 이러한 과정은

정확히 이와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그것이 바로 두려움을 일으킵니다.

 

두려움으로 가득한 마음은

어떤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는 실재에게

마음을 열 수 없습니다.

 

내 자신이라고 아는 것들이

내 생각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할 때

나는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시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생각들을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

내가 만들어낸 생각들이

더 이상 나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내 자신이라고 아는 것들이

내 생각이라는 것을 이해하면

자유로움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자유로움 안에 실재가 있게 되는 것이고

그때는 생각하는 자와 그의 생각 사이에

어떤 갈등도 없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은 더 이상 독려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이해되면 마음은 고요해집니다.

 

그것은 마음이 만들어낸 고요함이 아닌데

억지로 고요하게 만들어지거나 훈련에 의해 고요해진 마음은

결코 실체를 알 수 없습니다.

 

자아가 곧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이런 진실로부터 숨거나 도망치려고 애쓰지 않고

이러한 사실을 보게 되면

바로 그 순간에 변혁이 일어나게 되며

이러한 이해를 통한 변혁만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가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바로 그 욕구 안에

이미 갈등은 숨어 있습니다.

 

마치 성경에서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존재하지 않을 때

평화가 있습니다.

무엇인가로 되어 간다는 것은

실재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임을 이해할 때

우리에게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욕구가 멈춥니다.

 

그리고 무엇인가로 되고자 하는 마음을 멈추게 되었을 때

바로 그때 실재가 있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내가 아닌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것이

사실상 우리의 조건화된 생각들이라는 것을 알면

그 조건화의 내용을 볼 수 있고

더 이상 그것의 속박과 위협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멈추고 자유로움이 생깁니다.

 

가장 높은 차원의 생각, 느낌의 형태는

자기 이해와 신성한 이해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얻고자 한다면

마음과 가슴은 반드시 평화로우며 고요해야 합니다.

 

갈등들을 끝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자아를 이해해야 하며

자기 이해가 있을 때라야

자기 해방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