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주선사의 12시가에 대한 소개 [00:39]
- 각 시간별 시의 내용과 그에 대한 해설
- 선과 깨달음에 대한 고찰 [04:26]
- 조주의 말에 대한 다양한 해석 [05:20]
- 마음가짐에 대한 조언 [05:41]
<닭 우는 축시>
깨어나서 초래한 모습을 근심스레 바라본다.
두를 옷, 소매 옷 하나 없고
가사는 겨우 모양만 남았네.
속옷은 허리가 없고
바지도 주둥아리가 없구나.
머리에는 푸른 재가 서너 말
도 닦아서 중생 구제하는 이가 되렸더니
누가 알았으랴
변변체는 이 꼴로 변할 줄을.
조주 선사의 십이시가인데,
내용을 처음 들으면 좀 놀랄 분도 없지 않을 것 같습니다.
뜰앞의 잣나무를 가리키고
차나 한잔 마시라 하던 기계 높은 스님이
푸념을 하는듯 들려서 말입니다.
<해 뜨는 묘시>
청정함이 뒤집어 번뇌가 되고
애써 지은 공덕이 세상 티끌에 덮이나니
끝없는 전답을 일찍이 쓸어본 바가 없도다.
눈썹 찌푸릴 일은 많고, 마음에 맞는 일은 없나니
참기 어려운 건 동쪽 마을의 거무튀튀한 늙은이
보시 한 번 가져온 일이란 아예 없고
내 방 앞에다 나귀를 놓아 풀을 뜯긴다.
우리는 흔히 깨달음을
꽃비가 내리는 열오의 환희이자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거룩한 영광으로 압니다.
그런데 이 노승의 푸념을 들으면 이게 뭔가 싶습니다.
<공양 때의 진시>
인근 사방의 밥 짓는 연기를 부질없이 바라본다.
만두와 진떡은 작년에 이별하였는데
오늘 생각해 보니 공연히 군침만 돈다.
생각도 잠깐이고 한탄만이 잦구나.
백집을 뒤져봐도 좋은 사람은 없고
오는 사람은 그저 마실 차나 찾는데
차를 마시지 못하면 발끈 화를 내며 간다.
점점 심해지는 것 같네요.
아니 차를 대접할 여력도 없는 이 늙은 중이
정말 모든 길이 장안으로 통한다던 그 조주가 맞나요?
혹시 동명이인 아닐까요?
<해 기우는 미시>
이때에는 양지 그늘 교체하는 땅을 밟지 않기로 한다.
한 번 배부르매 백 번의 굶주림을 잇는다더니
바로 오늘 이 노승의 몸이 그러하네.
선도 닿지 않고 경도 논하지 않나니
헤어진 자리 깔고 햇볕 쐬며 낮잠을 잔다
생각커니 저 하늘의 도솔천이라도
이처럼 등 구워주는 햇볕은 없으리로다.
누군가는 집착이 떨어져 나간
부동의 평상심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하고
누군가는 신세타령 같지만
절대 자유인의 심지를
숨김 없이 발휘한 명작이라고 합니다.
<한밤중의 자시>
마음경계 언제 잠시라도 그칠 때가 있던가
생각하니 천하의 출가인 중에
나 같은 주지가 몇이나 될까.
흙 자리 침상, 낡은 갈대 돗자리
늙은 느릅나무 목침에 덮게 하나 없구나.
부처님 존상에는 안식국의 향을 사르지 못하고
잿더미 속에서는 쇠똥 냄새만 나네.
선시의 지평을 확대하고
근본 개념을 재정립했다고 평한 논문도 봤습니다.
글쎄요.
조주 스님이 들었으면 한마디 했을 것 같습니다.
“절마다 찾아다니는 사미승은 언제나 있구나.”
선과 깨달음이라는 주제를 빼고
조주인지 선사인지 다 놓고
한번 들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 그대로 그냥 말입니다.
그러면 잘 들립니다.
<오전의 사시>
머리 깎고 이 지경이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으랴
어쩌다가 청을 받아 시골 중이 되고 보니
굴욕과 굶주림에 처량한 꼴
차라리 죽고 싶어라.
오랑캐 장가와 검은 얼굴 이가는
공경심은 하나 없고
불쑥 문 앞에 와서 한다는 말이
차 좀 꾸자, 종이 좀 빌리자고 할 뿐이네.
십이시가는 공부하는 사람이
자기 자리를 찾아보는 데 좋은 나침반입니다.
조주의 말들이 한탄과 원망으로 들리는지
아니면 세상 만사의 차별상으로 보이는지는
그냥 그대로 듣는 자기에게 달렸습니다.
차 한잔 마시는 이것도 마음을 내어야 하는 것이니
응무소주 이생기심, 머무는 바 없이 내어야 합니다.
만사가 마음 안에 있으면
모양새가 좀 다르다고 걸릴 일이 없습니다.
<황혼녘 술시>
컴컴한 빈방에 홀로 앉아서
너울거리는 등불을 본 지도 오래이고
눈앞은 온통 깜깜한 칠흑일세.
종소리도 들어보지 못하고 그럭저럭 날만 보내니
들리는 소리라곤 늙은 쥐 찍찍대는 소리뿐,
어디다가 다시 마음을 붙여볼까나
생각다 못해 바라밀을 한 차례 떠올려 본다.
말에 몸을 담그면 말에 젖습니다.
풍경에 눈이 가면 풍경에 눈이 물듭니다.
무엇이 나타나고 어떻게 흘러가든
만사가 지나가는 저 노승에게서
법이 없는 광경이 보입니다.
그 자리를 소개하는 많은 말들이 있지만
하늘의 영광, 땅의 평화라는 말보다는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는 노인네가
오히려 더 본질에 부합하고 성숙합니다.
그게 그렇습니다.
<이른 아침 인시>
황량한 마을, 부서진 절, 참으로 형언키 어렵네.
재공양은 그렇더라도 죽 끓일 쌀 한 톨 없구나.
무심한 창문, 가는 먼지만 괜실히 바라보나
참새 지저귀는 소리뿐, 친한 사람 없구나.
호젓이 앉아 이따금씩 떨어지는 낙엽 소리를 듣는다.
누가 말했던가
출가인은 애증을 끊는다고.
오늘 선시는 제가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니
답 또한 조주 스님이 저에게 하시겠습니다.
“한 마디 말도 격식을 벗어나지 못하니
세존을 잘 못 잇는 후손이로다.
한 가닥 굵다란 가시나무 주장자는
산에 오를 때 뿐만 아니라 개도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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