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AMTHATch

[IAMTHATch] 선과 깨달음, 시선의 안과 바깥

Buddhastudy 2025. 4. 23. 19:34

 

 

  • 시선의 방향: 바깥을 보려는 욕망을 보고, 안을 찾으려는 수고를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며,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01:27].
  • 본다는 것: 바깥을 보려는 노력을 멈추고, 흙탕물이 가라앉도록 하는 것입니다 [02:30].
  • 각성과 연기: 각성은 흙탕을 가라앉히고, 연기는 오니를 걷어내어 마음의 연못을 청소하는 것과 같습니다 [04:36].
  • 불법: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이며, 시선을 안으로 돌리겠다는 억지를 멈추고 연못을 청소하는 것입니다 [05:56].
  • 마음: 같음도 다름도 원인도 결과도 아니며, 안과 바깥이 따로 있지 않고 부처와 중생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06:38].

 

 

배 상공이 황벽선사에게 물었다.

산 속의 사오 백 대중 가운데

몇 사람이나 스님의 법을 얻었습니까?”

얻은 자의 수를 헤아리지 마라.

도가 마음의 깨달음에 있지 어찌 언설에 있겠느냐?”

 

황벽이 말하기를 언설은 다만

어린 아이를 교화하는 것일 뿐입니다.

몇이나 깨달았는지 헤아리는 것 자체가

시선이 바깥으로 나간 것이라 형상을 찾아다니는 모습입니다.

 

시선이 밖으로 나갔다는 표현은 은유적이지만

명백히 허상을 쫓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이릅니다.

형상과 분별을 구하면

결국 자신의 생각과 믿음을 찾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십니까?”

여래가 제도할 중생은 없다.

나 자신도 얻을 수 없는데 나 아닌 것을 어떻게 얻겠는가?

부처와 중생 모두 얻을 수 없다.”

 

부처와 중생의 분별이 없는 그곳

그곳을 찾아봅시다.

, 그래서 시선이 안으로 돌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때는 무엇을 찾을 수 있습니까?

 

안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바깥을 보려는 그 욕망을 볼 수 있을 뿐이고

안을 찾으려는 그 수고를 알아챌 수 있을 뿐입니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운문이 조산을 찾아 인사하자 조산이 말했다.

여러 선원에서 대부분 선사들이

앵무새 같이 옛 스승의 말을 흉내만 내고 있는데

자네는 무엇을 하며 돌아다녔는가?”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곳에서는 모두가 자기의 소리를 하고 있는데

스님께서는 어찌하여 모르십니까?”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곳에 있는데 내가 어찌 알겠는가?”

그래도 자기 소리를 하는 그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 사람은 비밀스러운 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다.”

비밀스러운 곳이 아니라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럼 만날 수 있지?”

 

안을 본다는 것은

바깥을 보려는 수고로운 노력을 멈추고

바깥에서 비롯된 흙탕물이 가라앉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맑아진 물이 투명하게 연못을 비춥니다.

 

그래서 연못이 투명해지면

바라보고 있는 앎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 앎은 비밀스러운 스스로를 알아차립니다.

그 알아차림이 스스로를 알아보고 미소 짓습니다.

염화미소입니다.

 

계침이 법안에게 물었다.

삼라만상이 다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저기 저 법당 앞에 있는 저 돌은

그대 마음 안에 있는가? 마음 밖에 있는 것인가?”

그거야 마음 안에 있습니다.”

이리저리 행각하는 사람이

마음속에 저렇게 큰 돌을 넣어서

무거워서 어떻게 다닌단 말인가?”

법안이 말문이 막혔다.

 

시선이 바깥에 고정된 사람에게

시선을 거두어 안으로 돌리라고 하면

그 안을 바깥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시선을 돌린다고 바깥이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보고 있는 바깥의 허상을 함께 일러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상과 상즉을 가르치는 연기법 교학입니다.

제가 연기법을 각성수행이라고 하는 이유입니다.

 

생각을 벗어나는 [각성]과 생각을 부수는 [연기]

하나는 명상, 하나는 관상처럼 보여서

겉모양이 달라 보이지만

실제로 내 마음에 가하는 작용은 같습니다.

 

각성은 흙탕을 가라앉히고

연기는 찌꺼기를 걷어냅니다.

어쩌면 내 마음의 연못을 청소하는데

그 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청소라고 할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법안 스님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불법이란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계침이 고개를 흔들었다.

불법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열흘이 지나고 법안의 가슴에 무언가 맺혔습니다.

불법이란 생각을 일으키기 이전의

아무것도 없는 상태의 세계입니다.”

불법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또 열흘이 흘렀습니다.

법안에게는 계침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들렸습니다.

그래 불법이란 무엇인가?”

법안이 말없이 앉아 있자 계침이 말했습니다.

불법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다시 열흘이 흘러 법안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했습니다.

그래도 모르겠습니다.”

불법이란 것은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져 있는 것이니라.”

 

이토록 평범한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말을 듣고

법안은 깨침을 얻습니다.

어째서일까요?

 

열흘, 열흘, 열흘 동안 법안은

시선을 안으로 돌리겠다는 억지를 멈추고

연못을 청소했던 것입니다.

 

시선의 초점에는 안과 밖이 따로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람의 마음이 나를 내려놓고

본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인지,

내가 원하는 믿음과 생각을 찾는 것인지의 차이입니다.

 

부처의 본성과 중생의 본성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황벽이 말했다.

본성에는 같고 다름이 없다.

오직 한 개의 마음만을 가리킬 뿐이니

같음도 다름도, 원인도, 결과도 아니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은

사실상 주인이 없습니다.

그것을 굳이 내 마음이라 하지만

나라는 생각도, 나라는 느낌도, 그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그러니 안과 바깥이 따로 있지 않고

부처와 중생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시공간이 허물어진 자리에

원인과 결과의 분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승이 향림에게

조사가 서로 온 의도가 무엇이냐고 묻자, 향림이 말했다.

오래 앉아 있었더니 피곤하구만

 

 

보고 듣고 느끼는 그 무엇은 내내 그대로인데

조사는 서로 와서

앉고 서고 걷고 내내 피곤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