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신과 세계를 이루는 요소들은
동일하다.
-에르빈 슈뢰딩거
유식무경,
10년을 공부했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내가 안다는 것이 뭔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유식론입니다.
처음에는 제가 머리가 나빠서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유식을 정리한 분들이 너무 뛰어난 천재들이라는 걸 알았죠.
저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천재를 알아보는 수준이었던 겁니다.
서구의 현대 심리학과 물리학은
다 같이 의식의 문제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놀랍죠?
아는 것이 곧
존재하는 것의 문제입니다.
분명하게도 서구 철학은
존재론과 인식론이 나뉘어져 있었건만
현대 물리학 이후의 기조는
안다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의 차이에 대해
명백한 기준을 정하기 어려워졌다는 설들이
대단히 많은 논쟁의 영역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연기법을 처음 듣고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시절에
연기법은
존재의 원리를 가볍게 설명할 수 있는 도구처럼 보였습니다.
그 당시 제가 다니던 선원에서는
마인드맵과 비슷한 연기맵을 그려보도록 했습니다.
한가운데 사과 하나를 놓고
사과 하나를 이루는 것들을 연결해 보는 겁니다.
그러면 참으로 많은 것들이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여러 번에 걸쳐 이런저런 마인드맵을 그렸지만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연기법으로 마인드맵을 그려
온 우주를 설명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것을 분명히 알고 표현하는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사과 한 알에
온 우주가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것과 나는 무슨 상관이지?
그 모든 것은 내가 그것을 안다는 것을 제외하면
도대체 뭐란 말인가?
내가 그것을 안다는 것을 빼고서도 그런 일이 성립되는 걸까?
그래서 맵에 사과를 보는 나도 한 줄 그려넣었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바뀝니다.
알음알이 연기법을 넘는 발상의 전환은 이렇게 단순했습니다.
내가 없다면,
즉 아는 주체가 없다면
앎의 대상과 내용은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나라는 것 역시 알려지는 것이다.
나를 아는 것은 또 뭘까?
도대체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너무나 당연하게 잘 안다고 생각했던 나
안다는 것이 미궁 속에 빠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사물은 나머지 모든 다른 사물과의 인연으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 나는 이 관련성에서 벗어나 있는 것일까요?
내가 아는 것은 연기법과 상관없는 것인가요?
아니죠. 오히려 아는 것 전체가 하나의 연기작용이었습니다.
앎이 곧 연기였습니다.
어마어마한 충격이었습니다.
유식론은 중관사상 공사장과 더불어
대승불교의 핵심을 이루는 교리입니다.
유식에 대해서는 시간을 할애해서 이야기할 생각이고
오늘은 연기법의 세계관 중에서
유식의 세계관의 특징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유식을 이해하는 것이 왜 연기법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것인지를
정리해 보려는 것입니다.
유식론에 따르면
이 세상은 물질과 의식으로 나누어진 이원적 상태가 아니라
의식이 곧 실재이며
물질이라는 것은 의식의 내용일 뿐입니다.
더 나아가 물질과 작용의 모든 내용은
[아뢰야식]이라는 심층의식이 드러난 것일 뿐
별개로 존재하는 것도 의식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인식작용 자체가 아뢰야식의 연기작용이며
우리가 보고 듣고 아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일체유심조라는 말에서 보듯
유식은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고 하는데
여기서 마음이란
곧 근원의 마음, 아뢰야식을 말합니다.
[아뢰야식]에서 [아는 주체]와 [아는 대상]으로
[인식 과정의 주객이 갈라져 나오는 것]이
우리가 아는 [세상]입니다.
그렇게 갈라치는 인식과정 자체가
바로 이 세상의 생주이멸 과정에 해당합니다.
유식의 전체를 한번 요약해 볼까요?
본래의 [일심의 자리]에는 능소가 따로 나뉘어 있지 않은데
홀연히 무명의 바람으로 미혹의 꿈속에 들게 되면서
일심에서 [견분]을 세우니
동시에 [상분]이 전개되고
견분과 상분의 미세한 [전변]이 일어나는데
이 자리를 [아뢰야식]이라 이름한다.
동시에 제8식의 견분을
‘나’라 여기는 세력이 이루어지며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내가 있다’고 하는 생각이 흐르는데
이를 [말라식]이라고 한다.
이렇게 나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잠재된 가운데
상분을 대상화하는 것이 더욱 거칠게 이루어지며
이 대상들에 대한 증오, 애락, 시비 등의 모든 분별심이 전개되는데
이를 [의식]이라 한다.
이 분별심이 또 전변하여
그 성분을 각 방면별로 분별 인지하게 되는데,
이를 [전오식]이라 한다.
동시에 전오식의 각각의 상분을 또 한 번 더 대상화하여 전변하니
본래 식에 있던 것들이
식의 외부에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것이 곧 [색성향미촉]이며 모든 바깥 대상들이다.
그래서 결국 제8식 이하의 모든 식의 경계는
미혹으로 인해 나온 것이어 꿈일 뿐이다.
바로 본래 일심인 까닭에
견분과 상분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한 자리인 것인데
이를 따로 나누어 분별 집착하니
생사윤회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이 과정이 찰나찰나 이어지는 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우주 삼라만상입니다.
유식에서는
의식이나 말라식의 활동인 업이 종자를 남기고
그 종자가 아뢰야식에 심겨지며
그 종자가 구체화되고 현실화되는 과정이
끝없이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땅 위의 나무로부터 꽃과 열매를 거쳐
그 씨인 종자가 땅에 떨어지고
그 종자가 겨우내 땅 밑에 살아있다가
봄이 되면 다시 지면 위로 싹을 틔우고 나무로 자라는 것과 같은 과정이
계속되는 것이죠.
우리의 상식이나 과학은
마음이나 의식을 물질의 산물이라고 여기며
물질세계가 분명 우리 마음 바깥에
우리 마음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제라고 여기는
유물론적 입장에 서 있는데
유식론에서 세계는 이와 같이 완전히 뒤집혀 있습니다.
제가 마인드맵으로
바깥에 보이는 객관적 실제의 연관성을 그려보다가
이것을 아는 나를 그렸던 사건을 떠올려보면
바로 그 지점이 뒤집힌 세상의 입구였던 셈입니다.
저는 거기로 들어가 지금까지 나와 세계,
의식과 물질로 나뉘어 있던 이분법의 세상이
일종의 환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지요.
이걸 알아차리는 데 거의 10년이 걸렸네요.
한순간 현상적으로 드러난 존재는
모두 이전 순간까지
아뢰야식 안에 심겨져 있던 종자들이 현행된 결과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뜻하는 기세간은 물론이고,
그 세계 속에 사는 사람들 유근신도 그렇습니다.
종자의 업이 차이가 있을 뿐
그것이 나타나게 된 원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의식하는 모든 관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뢰야식이 현행한다는 것은
아뢰야식이 견분과 상분으로 이원화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뢰야식의 변화 현상을
우리 의식은 포착하지 못하고
그 결과물만 알 수 있기 때문에
내 몸을 몸이라고 여기고 세상을 객관 세계로 여기게 됩니다.
결국 우리 의식은
아뢰야식의 견분을 자기로 알고
견분이 의식하는 대상인 상분을 세상으로 이해하며
여기서 발생한 좋고 싫고의 집착이 종자가 되며
계속 흘러가고
분별의 세계에서 벗어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아뢰야식에서 벌어지는 작용이며
내 몸과 마음, 저 바깥의 세상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유식무경, 일체유심조라는 것이
유식론의 세계관입니다.
유식론에서 우리가 명확히 이해해야 할 것은
세상이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을 떠난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는 것과
나를 포함한 모든 현실 세계가
심층 마음에서 업의 작용으로 나타난
꿈과 같은 세계라는 바른 견해입니다.
이 견해를 바탕으로 깨달음의 지도를 그려본다면
꿈은 깨야 하는 것이고
꿈을 깰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서게 될 것입니다.
의식의 원리와 이치를 알아야
착각과 집착을 깰 수 있으므로
세상의 유식성을 깨닫는 것이
바로 연기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그대가 세계라고 부르는 하나의 꿈을
그대가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출구 찾기를 그만두십시오.
자신의 꿈을
하나의 꿈으로 볼 때
그대는 깨어납니다.
-마하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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