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
신비주의는 참으로 많은 영역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비가 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고, 정의하기 나름입니다.
신화, 마법을 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령, 정묘를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성과 깨달음을 신비의 영역으로 볼 수도 있고
이성과 합리의 과학이 아닌 것을
모두 신비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주제가 워낙 방대해서
선별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 깨달음 공부를 위한 세계관을 점검하고 있는 중이라
그에 걸맞은 주제를
하나 정도 고를 필요가 있다는 것을 고려했습니다.
후보를 놓고 저 혼자 투표를 했습니다.
후보에는 각 종교의 신비주의, 초자연 현상, 기타 등등등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카발라]입니다.
카발라는 유대교의 신비주의 분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카발라를 간단히 보고 가려는 이유는
우리가 진행해 온 공부 주제의 많은 부분을
불교에서 가져오기 때문에
꽤 다른 관점이 필요할 것 같고
서구 종교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유대교가
기독교나 회교를 포함하고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는
시리즈 네 번째의 실천론, 수행편에서 다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가르침은
하나의 산을 오르는 다른 길입니다.
산을 오르는 다른 길은 어떤지
거기에서 참고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없는지
가능한 한 찾아보는 것이 좋겠죠.
이런 과정을 통해서 모든 깨달음 전통이
사실상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보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카발라,
카발라는 유대교 신비주의 전통이며
‘전승’이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이나 탈무드와는 결이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여기도 창조와 존재, 존재의 수준,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다른 신비주의 전통처럼 전해지고 있습니다.
카발라의 대표적 고전은 <조하르>입니다.
이 문헌에는
창조의 내용을 재미있게 풀어놓은 내용이 있는데
이것을 또 간단하게 요약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원하고 무한한 에너지가 있었습니다.
이 에너지는 확장하고 나누고 베푸는 성질이자
충족, 기쁨, 깨달음이 본질이었습니다.
베푸는 성질을 충족시키기 위해
에너지는 자신의 본질을 나누어 줄, 수혜자를 창조했습니다.
지적이고 비물질적인 그릇이었는데요.
그릇은 받고자 하는 무한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에서 생겨난 유일한 존재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에너지인 빛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받고자 하는 그 욕망이었습니다.
빛의 본성을 물려받은 그릇에는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 갈망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창조자의 유전자인
무한한 충족이 빠져 있었습니다.
스스로가 충족의 원인이 되는 능력이 빠져 있었던 것이죠.
그릇은 스스로 충족의 능력을 갖기 원했고
빛을 계속 받기만 하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이 저항으로 영적인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빅뱅입니다.
그릇이 빛에 저항하자
빛은 물러나 공간을 창조하고 스스로 수축해
무한세계 안에서 한 점의 어둠을 창조했습니다.
무한함이 유한함을 탄생시켰습니다.
빛은 이로써 그릇에게
신성한 본질을 진화시켜 나갈
시간과 공간을 주었습니다.
그릇이 스스로 성취감을 맛볼 수 있도록
무한세계는 하나의 그림 퍼즐로 해체되었습니다.
그릇은 이제 창조의 퍼즐을 다시 짜맞출 수 있게 되어
가장 심오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한 세계의 빛을 숨기고
우주를 탄생시키기 위해
여러 겹의 장막이 드리워졌습니다.
열 겹으로 된 장막을 세피로트라고 부르는데
가장 높은 차원은 무한세계에 가까우며
가장 낮은 차원은
가장 어둡고 우리의 물질우주를 나타냅니다.
무한한 그릇의 성질도 아담과 이브, 남성과 여성으로 갈리우고
다시 무수한 조각들로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영혼은
지금은 조각조각 흩어져 있는
태초의 무한한 영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1% 빛의 세계에 있고
99%인 상부세계와 연결시키는 법을 터득해
무한한 빛의 세상으로 돌아가
퍼즐 게임을 완성해야 합니다.
--
어떤가요?
재미있으면서도 우주 창조의 원리를
정말 쉽게 이해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10개의 세피로트는
현대물리학의 끈이론에 나오는 10차원 우주와 비교하면
소름이 돋고
절대적 무, 충만한 공으로 표현되는
하느님인 ‘아인 소프 Ain-Sof’의 설명은
처음 보면 깜짝 놀라게 됩니다.
조하르에는 공, 업, 윤회, 음양, 무, 태극 등에 해당하는 개념이
유교와 불교의 그것과 유사한 표현으로 등장하고
빅뱅 이론과 거의 유사한 우주창조 묘사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유대 신비주의가
세상이 만들어진 원리와 궁극에 이르는 단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결국 산의 정상으로 올라가면
모든 기능은 하나로 통할 거라는 강한 확신을 줍니다.
조하르의 이런 분위기를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이슬람 수피의 시 한 구절을 찾아냈습니다.
길과 길은 하나로 통한다는 우리의 생각을
정말 잘 표현해 준 내용입니다.
신비주의 세계에 관해서 꼭 다루고 싶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는 잘랄루딘 루미의 시 한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내가 지나온 모든 길은
곧 당신에게로 향한 길이었습니다.
내가 거쳐온 수많은 여행은
당신을 찾기 위한 여행이었습니다.
내가 길을 잃고 헤맬 때조차도
나는 당신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당신을 발견했을 때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 역시 나를 향해 걸어오고 계셨다는 사실을/
카발라에서 제시하는 수행법
스스로 빛의 속성을 실현하는 방법은
창조자 원인이 되려는 능동성이며,
이것은 피조물, 결과, 피지배
받으려 하는 반응성을 변화시키려는 태도와 노력을 의미합니다.
문제와 장애물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되
즉자적인 반응을 멈추는 것이죠.
카발라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에는
다섯 단계가 있고, 또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동물적 욕구인 음식, 번식, 가정 등이고
둘째는 인간적인 욕구인 부, 명예, 지식 같은 것이며
세 번째는 영적인 욕구입니다.
첫째와 둘째는 길들이고 억누르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지만
영적인 욕구는 그렇게 다스릴 수 없죠.
그래서 틱쿤이라는 교정이 필요해집니다.
반응적 행동은
우리의 신적 본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저항을 재현해 빛을 막는 것입니다.
이런 반응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 목적이며
우리가 상위 99%의 빛의 영역으로
자동적으로 연결되는 변화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의도를 변화시키는 것이
까발라식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지
아주 구체적인 내용으로 내려가 보면
불교의 수행법과 거의 비슷해집니다.
이 정도로 카발라에 대해 요약해 봤습니다.
이렇게 신비주의 세계관을 정리하는 데는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실천, 수행편에서
아주 많은 신비주의 영역을 다루게 될 거라고 약속드립니다.
--
자아를 떠나서는 지옥이 없고
무아를 떠나서는 낙원이 없다.
-수피 아빌 카이야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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