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너무 멀어서 못 보고
불교는 너무 가까워서 못 본다.”
어떤 스님께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해석은 다양할 수 있겠네요.
멀다는 건
예수님이 현실의 나와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라는 말이겠습니다.
신과 인간을 대비하니 멀겠고
가깝다는 건
“당신이 부처다”라고 하는데
그건 또 너무 가까워서 모른다는 거죠.
그런데 절에 가서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부처님은 엎드려 절하는 신성이 되어 있죠.
부처님은 전혀 가깝지 않습니다.
종교가 그런 거라고 하면 수긍합니다만,
석가세존이 예수 그리스도에 비해 그다지 가깝지 않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낀다는 생각은
꼭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문답의 전통을 헤아리면서 느끼는 것은
선문답에서만큼은
이런 종교적 권위 같은 것이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살불살조,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이라는 경구는
정말로 기독교에서는 감히 말하기가 힘들고
불교에서도 선불교에 가끔 비유적으로 등장하는 것 말고는
전통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선불교에서는 그것이 전통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철칙이자 결론입니다.
부처를 만났다고 생각되면 부처를 죽여라.
조사를 만났다고 여겨지면 조사를 죽여라.
철저하다 못해
도를 넘어서는 듯한 살불살조의 유훈 앞에서
선공부는 살벌함을 충분하게 느끼게 됩니다.
“예수를 만나면 예수를 죽여라
그래야 니가 산다”
말이 되는 소립니까?
사실 선이 인정하지 않고 죽이라는 것은
부처가 아니라
우리가 부처라고 여기고 신봉하는 모든 권위의 상징입니다.
그것은 결국
그 사람의 의식 수준이자, 신앙이자, 고정관념이자
기대, 습성, 카르마 같은 모든 에고의 투영입니다.
우리의 아집과 편견, 자기주장과 방어는
아주 쉽게 그런 권위에 달라붙습니다.
선은 설명하지 않고
이해시킬 마음도 없이
이 집착의 덩어리를
아예 발아래에 놓으라고 명령합니다.
그 어떤 상황이든 고려하지 않습니다.
변명 같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스님이 설봉을 뵈니
설봉이 대뜸 일어나 멱살을 잡으면서 말하길
“무엇인고?”
이에 스님이 확연히 깨닫고
또 알았다는 마음까지 없어져서
손을 들어 흔들 뿐이었다.
설봉이 다시 물었다.
“그대는 어떤 도리로 여기는가?”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
이에 설봉이 인가하였다.
놓으면 아는데
그게 쉽지 않아 말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는 이에게는
놓음이 쉽고 오히려 받듦이 어렵습니다.
마음이 사라진 자리에 무슨 도리 같은 것이 있단 말입니까?
당연히 설봉이 스님을 인가할 밖에요.
대사께서 밥 짓는 행자에게 물었다.
“불을 지폈는가?”
“조용히 하십시오.”
“어디서 그런 소식을 얻었는가?”
“여러 소리가 필요치 않습니다.”
밥 짓는 행자가 한 소식 했음을 알아본 큰스님이 묻습니다.
그러자 아직 스님도 못 된 행자가 주지에게
뭔 말이 필요하냐고 답합니다.
이게 바로 살불살조입니다.
진실을 아는데 무슨 권위가 필요합니까?
저였다면 말도 하지 않고
밥주걱으로 대사님의 눈앞에서 휙휙 바람을 저었을 겁니다.
조용히 하라는 이야기를 한 번 했으니 이미 낭비입니다.
“어떤 것이 제일의 입니까?”
“다행하게도 말해버렸구나.”
제일의란
궁극의 진리
가장 뛰어나고 첫째가는 도리를 의미합니다.
스님께서는 내 입으로 올리지 않을 것을
그대가 미리 말해버려서 다행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선의 간결함은
허례허식을 치우는 정도가 아니라
진실이 아니면 아예 입으로 올리지 않는 것에 힘을 입습니다.
살불살조의 정신은 말과 글을 닿게 합니다.
하지만 이런 선의 정신은 그 형식을 오해하면
그저 앞뒤 맞지 않는 말대답 싸움이 되고
잘못하면 폭력을 행사하는 기괴한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그 내용과 정신이지
관습이나 전통, 형식과 규격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그 나라와 그 의이지, 다른 것들이 아닙니다.
“그대는 무엇을 구하러 왔는가?”
“부처의 지견을 구하러 왔습니다.”
“부처란 지견이 없다.
지견이 있다면 그것은 악마의 경계이다.”
생각과 의견, 말과 느낌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주 미세한 감각의 영역까지
자신의 견해를 투영한 집착의 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감의 영역이라고 생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이미 물들어 있어서 그곳마저 악마의 경계이기 쉽습니다.
“문밖에서 들리는 게 무슨 소리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입니다.”
“너는 빗방울 소리에 잡혀 있구나.”
“그럼, 선사께서는 빗방울 소리를 뭐라 하시겠습니까?”
“하마터면 나도 사로잡힐 뻔했구나”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모든 사물에서 초월하기는 쉽지만,
자연 그대로의 소리를 표현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아마 고요한 명상이라고 부르는 곳마저도
사실은 그게 어때야 한다는 상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을 통해
계속 덜어내고, 버리는 연습을 합니다.
도무지 내 주장과 방어가 아닌 생각은
찾기 어렵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계속 끊고 쳐내야 합니다.
“만일 언어의 길이 끊기고
마음이 갈 자리가 없어진 것을 알면
비로소 옛사람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마땅히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
만일 이와 같음을 이름과 말로만 집착하려 한다면
공연히 정신과 힘을 소비할 뿐이어서 전혀 쓸 곳이 없다.”
-전등록-
자각, 각성 수행이자 마음공부에는
가깝고 멀고가 없습니다.
허깨비 같은 생각에 진을 물리는데
거기에 무슨 부처가 있고 조사가 있겠습니까?
가장 가까운 곳이 가장 먼 곳이고
가장 먼 곳이 가장 가까운 곳입니다.
“일러도 30방, 이르지 못해도 30방이다.
일러보라!”
저라면 과연 어떻게 일렀을까요?
스님의 노고가 크시나
제가 그것을 대신해 이를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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