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의 이해와 자기 방어
*에고의 자동 수선 장치와 방어 메커니즘
*에고 손상과 자기 방어 이해하기
*에고의 허용과 현실 경험
에고의 자기 방어 메커니즘을 탐구하고,
이를 통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여정을 안내함.
에고는 손상을 감지하면 자동적으로 방어 기제를 작동시키는데
이러한 방어는 종종 자기 기만과 허위의식으로 이어짐.
하지만 에고의 손상을 의식적으로 허용하고 방어하지 않을 때
우리는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경험할 수 있음.
이러한 경험은 자아를 방어하려는 시도 없이도
오히려 더 강해지고 확장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줌.
결국, 에고의 소멸은
진정한 자아를 드러내는 성숙과 진화의 과정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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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고의 운용 기재,
즉 인식과 활동 메커니즘을 탐구하고 이해하는 것은
수행과 직결됩니다.
에고를 모르고 수행하면
에고에게 봉사하는 헛수고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IAMTHAT 채널의 에고 이해는 앞으로도 계속됩니다.
오늘은 에카르트 톨레의 어록
그리고 그리스도 요가 등을 발췌해
2회에 걸쳐 에고의 자기방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사라진 적이 없었던 영원의 철학은
에고와 셀프는 서로 혼합되지 않으며
또한 동시에 분리도 되지 않는 것이 인간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진화
즉 인간의 성숙, 발전과 모든 종교의 궁극적 목표는
에고가 사라지고 셀프가 드러나는 것이며
결국에는 셀프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 궁극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상징이나 비유, 공허한 이론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현실 속의 팩트입니다.
자기 중심성이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것이
인간의 발달, 성숙, 진화이자 모든 종교의 목표이며
이것이 바로 에고의 소멸입니다.
그러나 정통 종교와 대부분의 영적 단체, 일반인의 인격 교양 등의 내용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인류의 관심과 초점은
그러한 자기 자신의 에고만 빠져 있고
모두 그 나머지만을 다룹니다.
그래서 수십 년씩 수행을 해도
대부분 자기가 거의 변하지 않기에 무용지물입니다.
에고의 결여, 자신만은 제외하는 것은 달리 말하면
총체적인 허위의식이자 자기기만이며 전도몽상이고,
그것이 에고의 본질이자 속성이자 술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인식하더라도 무시됩니다.
가르침의 몇몇 지점에
우리가 듣기에 살벌하다고 느껴지는 지침이 들어가 있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에고를 부수기 위해
방(몽둥이)과 할(큰소리)이 등장합니다.
‘나를 따르려는 자는 자기를 버려야 할 것’이라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도 같은 맥락입니다.
에고가 사라진 자
즉 내 뜻은 사라지고 당신의 뜻만 남은 자,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의 하느님이 사는 자가
불교의 무아 가르침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본질적이라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것들은 모두 거기에 덧붙여질 것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에고가 사라진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소하고도 하찮은
덧붙여지는 것들만 구하고 있습니다.
에고의 소멸만이
성숙이자 공부이며 종교이자 궁극인데
세상에서는 에고만 쏙 빠져 있는 것이죠.
사실상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진실한 공부의 시금석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알아도 자기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고
아무것도 몰라도 자기를 알면 세상 모두를 아는 것입니다.
에고가 없어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진리이자 실재입니다.
에고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그보다 앞선 주제들을 연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죠.
모든 영적 수행은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작업하는 재료인
에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로부터 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복해 말하자면
문제는 세상의 모든 영적 수련과 종교, 철학, 인격, 교양의 함양 등에서
자신의 에고만은 쏙 빠져 있고
모두 나머지 것들만 다루기에
수십 년씩 수행해도 거의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마음공부란
자기를 끝까지 들여다 보아
내가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나를 속이고 있는지
알아보려는 시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문제는 에고의 지각 안에서는
현상 세계가 매우 실제적이며 압도적이고 단단하다는 데 있으며,
기적 수업에서는
이것을 에고의 관료 체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현실에 너무나 사로잡혀 있어서
어디 다른 곳을 바라볼 여유가 없다고 할 때
그것이 정확하게 에고의 관료체계 중 하나입니다.
이런 체계가 알 수 없는 영역까지 펼쳐져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에고의 관료 체계의 작동 원리는 자기방어입니다.
본성적으로 에고는
어떤 종류의 손상도 경계하는데
우리 마음속에서는 기준이 되는 틀을 복구시키기 위해
자동 에고 수선 장치가 항상 작동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비난하고 나무랄 때
에고에게 그것은 자기 존재의 손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고는 정당화와 방어와 맞비난에 나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손상된 자기 존재감을 수선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뛰어듭니다.
상대방이 옳은가 그른가는 에고에는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에고는 진실보다 자기 보존에 훨씬 더 관심이 크며
이것이 나라고 하는 마음속 형상의 보존입니다.
길을 가다가 다른 운전자가 당신에게 뭐라고 소리를 지르면
되받아서 무엇인가를 소리치는 것과 같은 일은
꽤나 정상적으로 여겨지지만
그것 역시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인 에고 수선 장치입니다.
가장 흔한 에고 수선 장치 중 하나는
화를 내는 일이고,
이것은 일시적이지만
에고를 거대하게 부풀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죠.
모든 에고 수선 장치는
에고에게 완전한 느낌을 주지만
실제로는 기능 장애적입니다.
기능장애에서 가장 극단적인 것이
신체적인 폭력, 과장된 환상의 형태로
자기를 속이는 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행위는 자기방어를 넘어서
자기 공격의 단계로 들어선 것이라
우리가 겨우 극단적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고에 손상이 일어날 때
그것을 복구하려는 시도 없이
의식적으로 그것을 허용하는 것이 강력한 영적 수행인 이유는
자기방어의 허상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상처받기 쉬운 상태를 허용하면
우리는 불안, 두려움과 함께
해방감, 자유로움도 느낄 수 있는데
그 지점이 바로 중요한 이해의 영역입니다.
만약 해본 적이 없다면 이것을 실험해 보기를 권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나를 비난하고 문제를 내 탓으로 돌리고, 험담을 늘어놓을 때
즉각적으로 응수하거나 자신을 방어하지 말고
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미지가 손상되도록 허용하고
그것이 내면 깊은 곳에서 어떤 느낌인지 지켜보는 겁니다.
사람의 현상에 따라서, 그리고 연습 정도에 따라서
아예 불가능한 수준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로 스펙트럼이 펼쳐질 겁니다.
어쨌든 허용하고 지켜봅니다.
아주 낮지도 높지도 않은 수준을 가정한다면
나는 몇 초 동안은 불편함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마치 자신의 크기가 줄어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다가 나는 강렬하게 살아 있음을 느끼는
하나의 내면 공간을 자각할지도 모릅니다.
만약 이 상황에서 허용을 통해 어떤 느낌이 온다면
나는 전혀 손상 당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확장된 것입니다.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놀라운 경험이자 깨달음입니다.
방어하지 않았는데 더 강해졌고
사수하지 않았는데 더 넓어진 경험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손상 당한 것처럼 보이고
철저히 무반응으로 머물러 있었지만
외부적으로만이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실제로 어떤 것도 손상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방어를 포기하고 공격을 허용하면 작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반대로 더 커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더 이상 자신을 방어하거나
마음이 만들어낸 허구의 형상을 강화하려고 시도하지 않을 때
우리는 자신의 형상과 동일시하는 상태
즉 마음속 자기 이미지로부터 걸어 나올 수 있습니다.
에고의 측면에서 더 작아짐으로써 사실 더 넓어지며
진정한 존재인 실재가 앞으로 나올 공간을 만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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