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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THATch] 에고의 이해, 자기 방어 (2/2)

Buddhastudy 2025. 4. 3. 19:26

 

 

-에고의 자기방어를 포기하고

자기주장을 철회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02:14].

-에고를 이해하고 약화시키는 영적 수행의 측면에서

자신을 드러내거나 돋보이게 하려는 시도를 멈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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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방어 포기, 상처받기 쉬운 상태, 공격에 대한 무반응

이런 용어들에게

뭔가 억울하고 피해를 받는 느낌을 받는다면

제대로 잘 이해한 겁니다.

 

바로 그 느낌이 상처받기 쉬운 느낌입니다.

이런 용어들만 보고

수행이라는 것이 그냥 당하고 참는 건가요?”라고 묻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과일을 한 입 베어 물었는데

썩은 냄새와 맛이 풍기면

수용한답시고 그것을 삼킬 필요는 없습니다.

 

욕설과 학대를 끝없이 참고

자신이 무의식적인 사람들의 희생자가 되도록

내버려 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때로 상황에 따라

누군가에게 딱 잘라서 그만두라고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고의 방어 없이도

그럴 때는 우리가 하는 말에 힘이 생깁니다.

 

그것은 카발라에서 말하는 단순한 반응성과는 다릅니다.

필요하다면 누군가에게 확실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NO)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썩은 과일을 먹지 않는 비유처럼

그것을 경험하되

부정적인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입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이것을 [질적으로 차원 높은 거절]이라고 부릅니다.

허용, 수용, 포용의 의미를 오해하거나 악용하는 경우에

우리는 이 의미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톨레는 말합니다.

특별히 아무 존재도 아닌 것에 만족하고

앞으로 나서지 않는 데 만족한다면

당신은 우주의 힘과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에고에게 허약함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유일하게 진정한 힘이다.”

 

에고를 관찰하고, 이해하고, 작업해서 내려놓는 영적인 길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가치를 인정하고 그렇게 되라,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는

능력과 행동의 정반대의 위치에 있습니다.

 

에고의 자기 방어 포기를 잘 이해하고 적용할 때

우리는 참된 의미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산이 되려고 하기보다 골짜기가 되라고 가르치는 의미입니다.

 

자기방어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전체성인 실재를 회복하게 됩니다.

골짜기가 되면

천하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로 흘러들어옵니다.

 

신약 성경의

초대받았을 때 가장 끝자리에 앉아 있으면

주인이 와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앉으라고 할 것이다라는 의미,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는 의미의 참뜻입니다.

 

에고를 이해하고 약화시키는 영적 수행의 또 다른 측면은

자신을 드러내고, 돋보이게 하고, 특별하게 보이게 하고

깊은 인상을 심어주거나 주목을 집중시킴으로써

자기 존재감을 크게 만들려는 시도를 멈추는 일입니다.

자기방어의 반대적 측면, 자기주장을 철회하는 것이죠.

 

이따금 모든 사람이 의견을 내세울 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을 자제하고

그때 그것이 어떤 느낌인가를 관찰하는 것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악연, 자기 견해는

자기방어를 위한 틀의 핵심이고

그것이 인간이라는 관념기계에게는

사실을 이해하는 최대의 난관입니다.

 

악연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프로그래밍 된 펌웨어에 가깝습니다.

에고의 관료체계는 단순한 자동 수선장치가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를 흉내내 만든

AI보다 뛰어난 자기 보호 메커니즘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의 체계들이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꾸준히 개선하고 보완해 유지되는 것처럼

큰 틀에서는 체제를 수호하면서

범위 안에서는 자기방어 기제를 혁신할 수도 있는 것이 에고입니다.

 

악연을 수호하고자 하는 기재 메커니즘은

단순한 견해의 고집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월감을 통해

에고 스스로를 강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입니다.

에고에게 우월감을 주는 것으로 에고는 크게 성장합니다.

 

일상적인 교통, 날씨는 물론이고

정치, 경제

구체적으로는 직장, 동료, 커뮤니티, 회원, 가족과 친지들,

지인들에 대해 우리가 늘어놓는 불평들이

내게 어떻게 우월감을 주는가는

금방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불평을 할 때

내 자신은 옳고,

상대방이나 상황은 틀린다는 것을 암시함으로써

우리는 우월감을 갖게 됩니다.

 

자신이 옳은 것보다

에고를 크게 만드는 것은 없습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은

마음의 관점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고

하나의 시각, 하나의 의견, 하나의 판단, 하나의 이야기와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옳기 위해서는

당연히 다른 누군가는 틀릴 필요가 있죠.

이것은 옳고 그르고의 문제보다

조금 더 치졸한 표현으로

맞고 틀리고의 문제입니다.

 

맞는 나와 동일시를 위해서

내가 맞아야 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잘못됨을 만들어 내야 하고

틀렸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내가 더 강한 존재감을 갖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잘못된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에 국한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상황도

불평과 반발을 통해 잘못된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말을 하는

이른바 논리 회로가 있는 지능 기계에게는

대화하듯 화를 내고

말을 못하는 무정물에게도 우리는 화를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이 일은 내게 일어나지 말았어야 해를 의미합니다.

 

자신이 옳다는 것은

내가 아닌 그 무엇은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태도이며

무엇인가 부족한 상대방이나 상황에 비해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상황을 연출합니다.

그래서 에고가 갈망하는 것이 바로 우월감이며

이것을 통해 에고는 자신을 더 크게 만듭니다.

 

에고에 대해서는

이해가 곧 치유이자 회복이고, 극복입니다.

 

자아, 즉 자기의 모든 관념을 냉정하게 살펴보고

남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이 어떻게 있는지

-자기가 하는 말의 속내가 무엇인지를

마치 남을 관찰하듯이 세밀히 관찰함으로써

자아, 에고, 악연, 자기 생각의 존재 양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런 관찰을 통해

자기 한정과 자기 규정이 드러나는데

그런 자기 한정과 규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또한 그것을 탓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관찰할 수 있게 되면

그래서 그런 방법을 일상적으로 적용할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견해의 이해도 그렇고

자기 욕망의 이해도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두려워하거나, 탓하거나, 회피하거나, 저항함으로써

자기가 자신을 얼마나 한정하고 규정해 왔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하고, 탓하고, 회피하고, 저항하는 것이

바로 에고가 하는 짓이기 때문이죠.

 

해탈, 곧 진리는

진리 자체의 의미를 탐구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욕망, 편견, 자기한정, 망상일 뿐인

에고의 덧없는 짜임새 전체를

분명히 앎으로써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꿰뚫어 봤을 때

그것들이 모두 녹아 없어져 남는 것이

실재

곧 참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