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그것을 수행자 입장에서 마주 보게 됩니다.
막연히 극복하고 제거해야 할 것으로 상정합니다.
하지만 흔히 하는 말로
극복하겠다는 것, 제거해야 하겠다고 마음먹는, 그것은 무언가요?
그것은 에고가 아닌가요?
우리는 참나를 배경으로 살지만
깨닫지 못하면 현실에서는 에고가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이런 역설은 쉴 새 없이 발생합니다.
우리가 현명하게 대응하기 위해서
이 말도 아주 강한 딜레마를 가진 말이긴 합니다만
에고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에고의 원리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에고를 하나의 장애물이라고 볼 때
그 장애물이 가진 특성을 알아야
넘거나 뚫을 수 있습니다.
앞을 가로막는 장애들이 제거될 때 실상이 드러납니다.
우선 에고라는 장애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으므로
그것들을 하나씩 짚어봐야 합니다.
그것들에 대해 잘 정리해 준
데이비드 호킨스의 <나의 눈> ‘에고의 해체’ 장을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그중 하나가 [행위자 관념]입니다.
호킨스는 원인이라는 개념으로 그것을 지적합니다.
원인이라는 것이 있다는 믿음은
에고가 가진 망상의 주요한 버팀목인데
그것이 바로 자기 스스로를
행위자로 여기는 에고의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저것의 원인이 되는 이것이 있다고 할 때
저런 행동들의 원인이자 설명이 되어주는 나라는 존재가
논리적으로 반드시 필요하게 되는 것이죠.
무엇이 발생하든
그것의 원인에 해당하는 행위자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생각의 배후에는 생각하는 자가
행위의 배후에는 행위자가
느낌의 배후에는 느끼는 자가 따라붙게 됩니다.
자신을 활동이나 행위, 역할, 명칭들 따위와 동일시하는 혼동 역시
자아를 별도로 분리된 행위자로 동일시함으로써 일어납니다.
자기의 행위와 느낌과 생각이
바로 자기라고 하는 것은 분명 착각이지만
그것은 너무나 흔해서 일반적으로 이것은 사실처럼 여겨집니다.
자신의 성격적인 특성이나 직업적 특성을 자기라고 여기는 신념은
행위의 배후에 존재하는
별도의 행위자라는 관념에 따른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 구조에 반영되어
우리는 생각이나 대화에서 그 관념을 벗어나기 힘듭니다.
언어만이 아니라 사회적 기반 구조가
바로 그런 전제에서 설계되고 운영되기 때문에
일상에서는 그것을 파악할 수조차 없습니다.
‘나’는 원래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자기 규정을 받게 됩니다.
그 규정된 내용이 좋으면 행복하고
나쁘면 우울하거나 죄의식을 느낍니다.
그런데 사실은
모든 자기 규정들은 잘못되고, 그릇된 것들입니다.
독립된 자아가 있다는 것을 거짓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이런 정체성에 대한 집착은
극복하기가 아주 어렵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는 인간 사회가
독립된 자아를 가정하고 이루어진 것이므로
비록 가정에 근거한 모델이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거기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도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이름과 주민번호는
내가 아니지만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자기를 규정하는 것들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
큰 문제가 없지 않을까요?
문제는 그것을 알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소중한 자아에 매혹되기 쉬운 방향으로
양육되고 길들여 집니다.
그래서 사춘기를 지나 성인이 된 시점에 이르면
평균적인 현대인은
자아라는 관념을
말과 생각과 행동의 주관적인 중심점으로 의지하고 살게 됩니다.
자아는
자신의 인생 역정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나 여자 주인공으로 윤색됩니다.
나라고 하는 자는
가해자나 피해자, 원인, 온갖 형태의 칭찬과 비난을 받아 마땅한 자
나라는 인생 드라마의 주연 배우가 됩니다.
당연히 그 자아를 지켜줘야 할 필요성이 생기고
자아의 생존은 더없이 중요한 일이 되어 버리죠.
자아에 대해 확고한 실체성을 느끼는 수준에 오면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아는 울어야만 한다고 믿게 됩니다.
좋고 나쁘고, 높고 낮고를 떠나
자아 그 자체가 있고
그것이 나라고 하는 믿음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자아가 실체라고 하는 믿음은
존재 그 자체의 생존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 됩니다.
에고가 지속적이면서도 지배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의 근본은
바로 행위자 관념입니다.
모든 주관적인 체험을 지원하는 제작자가
바로 자기라고 믿는 것이
행위자 관념입니다.
여러 가지 조건들로 인해 발생하는 생각에 대해
에고는 즉각적으로
‘내가 생하겠다’라는 생각으로 마음속에 끼어듭니다.
에고 스스로 원인이 됨으로써
신을 흉내내는 것이죠.
호킨스의 표현으로
만 분의 1초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내적으로 감지하는 것과
에고가 그 작자라고 주장하는 것
사이의 시간 간격은 만 분의 1초입니다.
에고가 한 인간의 삶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측면들이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실로 번개같이 마음속으로 끼어드는 것은
각성과 통찰을 통해 생각이 흘러오고 흘러가는 것을
유심히 주시하지 않고서는
간파하기 어렵습니다.
에고가 스스로를 주장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패턴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낯설고 불편합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도 쉽지 않지만
들었다고 해도
그것이 사실인지 관찰할 용기를 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에고는 모든 발생한 사건의 행위자로 끼어든다는 사실을 관찰해야 합니다.
에고가 행위자로
원인의 위치에서 주인공이 되는 간격은
매우 짧은 순간이고
오랫동안 익숙해져서 발견하기가 쉽지 않지만
일단 이 간격이 발견되면
에고는 급격히 지배권을 상실합니다.
이런 상황을 하나의 깨달음이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과 행위자에 대한 이해는
범부각과 상사각에서 주요한 앎의 내용입니다.
자신은 현상의 목격자이지 현상의 원인이나
현상을 일으킨 주체가 아니라는 점이 명백해지면
우리는 자아라는 것이
스스로를 목격자나 경험자와 동일시하지 않고
그저 목격되는 것이 되도록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실상과 마음 사이에 끼어드는 에고를
제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현실적으로는 워낙 기계적이라서 알아차릴 수 없지만
일단 알아차리면 방법이 생깁니다.
호킨스는
에고가 실상과 마음 사이에 끼어드는 과정을
“한순간 전에 녹화된 프로그램을
재생해 주는 기능”(테이프 모니터링)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평소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은
에고가 바로 직전에 녹화해 놓은
재생 화면들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미 에고의 프로그래밍에 의해 편집된 상태, 왜곡된 상태인 것이죠.
행위자 관념의 극복을 위해서는
자아와의 동일시를 추동하는
정신적인 성향들을 놓아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한 이해와 관찰과 더불어
그렇게 익숙해진 모든 정신적인 습관들을 놓아버리고자 하는
의지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호킨슨은 그 의지를
신께 기쁘게 바치고자 하는 사랑과 겸손에서 비롯된
자발성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정리해 보죠.
에고가 사실상의 지배자로 기능할 수 있는 중요한 메커니즘이 바로
발생한 생각과 행동, 사건의 원인의 위치에 서서
행위자를 자처하는 것입니다.
자아가 있고, 자아가 주인이며
주인이 모든 생각과 행동의 원인자라는 행위자 관념은
인간사회에서 지지를 받고 적용되는
매우 일반적인 원리여서
우리는 이것이 착각이라는 사실을 쉽게 납득할 수 없습니다.
신중한 이해와 관찰을 통해
행위자인 에고를 발견할 수 있으며
에고의 지배력을 상실하게 하려면
과감한 발심과 꾸준한 수행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악연, 내 생각을 고집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버릴 수 있어야
생각이 빚어낸 모든 가정과 추정들을 버리고자 하는
자발성이 생깁니다.
지속적으로 그렇게 할 때
진실이라 여겼던 망상들이 사라지고
그것들이 오류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마음을
그것이 실증적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한정 짓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마음의 크기와 영향력을 축소시켜서
마음을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하인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다루고 있는 것은
지각적으로는 실상으로 오인하는 가정이나 형상, 사건들이고
관념적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결론, 정신작용일 뿐입니다.
‘머릿속에 그린 그림’은 실체가 없으며 존재하지 않습니다.
최종적으로 에고가 몰락할 때
마음은 사실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마음이 안다고 믿는 그 무엇이란
모두 개념, 관념, 이미지들의 주관적인 조합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그 무엇이라는 관념에 대해 아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안다는 것은
아는 것이 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마음은 참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가공적인 행위자를 참된 자아로 믿는 태도는
이해와 각성을 통해
모든 현상들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임을 깨달을 때
약화됩니다.
원리를 이해하고, 관찰하는 각성수행과
모든 현상이 연기적 드러남이라는 지혜수행을 통해
에고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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