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조께서 정법안장을 대대로
이심전심의 방법으로 전승한 소식이란 무엇입니까?”
“용이 길게 물을 내뿜으니
물고기가 하염없이 물거품을 삼기는 꼴이다.”
“화상께서 용과 물고기를 조용히 잠재워주십시오.”
“북을 두드려 배를 달려보고
노를 저어 물에 비친 달을 건져보라.”
물음에 답하는 동천 선사가
처음부터 용으로 변신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자세하고 친절하게 답을 해 준 후에
그 긴 답을
용이 물을 내뿜는 격이라고 한 것입니다.
“세존이 꽃을 들어 가섭이 미소를 지은 것으로
알려고도 말고 가섭을 시샘할 이유도 없다.
혜가는 눈 속에서 애타게 법을 갈구했지만
달마는 면벽하며 끝내 발설하지 않았다.
그것이야말로 불조께서 정법안장을 전하신 소식이다.”
이심전심으로 전한 소식은, 언설로 설명되지 않으니
그 은밀한 전승에 대해, 묻고 답해서 알려고 하는 것은
가당하지 않다고 했던 것이죠.
그런데 가만 보니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물고기 숨 쉬듯 벙긋벙긋 바다만 먹고 있는 모습이
가당하지도 않습니다.
“물거품을 삼키고 있구나.”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못한 중이
용과 물고기를 잠재워 달라고 합니다.
선사가 말합니다.
“쉽지는 않겠다만 직접 배를 저어서 수행을 해보고
진실한 뜻을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한 승이 동산 도전에게 물었다.
“청정한 수행자가 천당에 오르지 못하고
파괴한 비구가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동산이 말했다.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그들의 그림자도 남아있지 않은데
다시 그 중생들이 열반의 세계로 들어간다.”
선승에게 말의 뜻을 물으면 대답해 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천당과 지옥을 한 번에 지워버릴 방법이 없다면
그 시선을 거두어 돌려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장면들은 선문답에서 꽤 자주 나오는 사례들입니다.
입을 닫게 해, 눈앞으로 다가오도록 하는 것이 첫째이고
그것이 어려우면 시선을 돌려,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둘째입니다.
태위 벼슬을 하는 단원이 물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의식은 어디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그대는 지금 살아있는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거늘
어찌 죽은 이후를 알려고 합니까?”
“살아있는 제가 단원이라는 사람인 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지금 살아있다는 바로 그것은 어디서 온 겁니까?”
단원이 머뭇거리자 달관 선사가 멱살을 잡고 말했다.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데 또 달리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뒤에 이어지는 자세하고 친절한 설명은 소개를 생략합니다.
그런데 다 듣고도 딴소리를 하면
정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집니다.
선사들은 고달픕니다.
“제 마음을 어찌 하면 알 수 있겠습니까?”
“선과 악을 모두 분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제 마음은 이후에 어디로 돌아가는 겁니까?”
“그만 관아로 돌아가세요.”
“대사님은 생사의 일대사를 해결했으면서도
어째서 부모님의 상행을 당해야만 하는 겁니까?”
“봄바람이 불어오지 않으면 꽃은 피지 못하는 법이다.
꽃이 피었으면 마침내는 떨어지는 법이다.”
어느 승의 질문에 청봉 전초 선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연하죠.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상중인데 방망이를 휘두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질문은 흔합니다.
깨달음을 초능력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지 않습니다.
깨달으면 생사를 초월한다고 하니
말만 들으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모든 부처님께서 출연한 것도
단지 남의 말을 전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다.”
구봉 도건 선사가 답했다.
“세종께서는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남의 말을 전한 것입니까?”
“세존은 단지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켰을 뿐이다.
그래서 남의 말을 전한 것이다.”
구르지예프는 스승이 너무 높으면 제자가 힘들다고 했는데
그 반대도 그렇습니다.
제자가 너무 낮으면 스승이 힘듭니다.
이런 경우는 보는 사람도 꽤 힘듭니다.
가슴이 미어지죠.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캄캄한 밤에 까마귀 머리에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였는데
동력에 먼동이 트니
벙어리가 머리를 감싸안고 집으로 들어간다.”
곡산 도연 스님의 답은 한 편의 시처럼 느껴집니다.
캄캄한 밤에 하얀 눈
동이 트는데 말을 잊고 돌아서는 이 광경은
면벽한 달마와 눈에 파묻힌 혜가를 닮았습니다.
“경문에 의거해 뜻을 아는 것은
부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경문을 벗어나면 또한 마귀의 뜻이 되니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동안 스님이 답했다.
“높은 봉우리가 아득하니 연무조차 가리지 못하고
반달은 허공에 걸려 있어도 흰 구름과는 구별된다네.”
“스승의 뜻을 새길 수 없어 가슴이 미어지면
그때서야 그 자리가 부처임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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