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성은 그것이 사라질 때
그것이 그전의 모든 고통과 두려움과 불행의 원천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근본적인 오류입니다.
에고의 입장, 태도, 옳다고 보였던 좋은 생각들
에고의 생존, 정체성의 지속에 기여하는 모든 경향성이
바로 위치성입니다.
에고는 인과적 패러다임의 제한을 받으며
실상을 제대로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사실상 모든 것은 그 어떤 외적 원인도 없이 나타나며
모든 사건은 주어진 어느 순간의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전체성이 나타남인데
에고의 위치상과 제한된 범위의 관점에서 볼 때
세상은 무수한 것을 개선하고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에고가 그리는 세상은
자신의 환상들과 자의적인 위치성들이 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논쟁과 의심의 원천이 되는 가설을 빈번하게 사용하는데
이런 가공적인 개념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언제든 가능합니다.
무의식적인 목표는
언제나 옳은 입장에 서서
다른 관점들을 논박하겠다는 허용심입니다.
이것이 위치성의 자기정당화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아견, 내 견해는
자아가 스스로를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하도록 하는
주요한 근거입니다.
작게는 의견에서
넓게는 신념, 주의, 사상으로 확장되는 것이
바로 마음의 경향성입니다.
그것의 주된 주장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견이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생각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의 깊게 검토해 보면
모든 의견은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견은 고유한 가치가 없는 생각입니다.
자세히 보면
거의 모든 의견은 중요하지도 않고 고유한 가치를 갖고 있지도 않죠.
마음은 많은 견해를 가지고 있고
언제든 그것을 꺼내 쓸 태세가 되어 있는데
의견과 주장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정신 작용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견은 이른바 위치성에서 비롯됩니다.
나의 위치에서 보면 다른 것들이 구분됩니다.
당연히 의견이 위치성에서 비롯되므로
의견과 주장은 위치성을 강화합니다.
이렇게 형성된 악연은
그 위치에서는 자신을 입증할 수단이지만
실제로 그 위치성으로 인해
고통을 일으키고 받게 되는 것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마음이 현재에서만 잘못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도 습관적으로 그렇게 해왔으며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환상들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기억의 가치도 축소됩니다.
우리의 위치성은
이런 기억과 기억에 대한 고집으로 발생합니다.
과거의 모든 행위는
자신이 당시에 이렇게 저렇게 했다고 생각한 것들로 이루어진
환상에 근거하고 있죠.
연기법을 통해 살펴보면
삶의 현상들은 그 어떤 것이나 어떤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모든 사건들은 인연 화합으로 일어납니다.
그런 사건들의 범주에는
몸의 기능, 정신 작용
마음의 생각과 사건들에 부여하는 가치와 의미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이런 자동적인 반응들은
그전의 프로그래밍의 비인격적인 결과들일 뿐입니다.
이해와 관찰을 통해
우리는 프로그래밍 된 생각을 듣는다는 것을 압니다.
의식의 그런 흐름을 일으키는
내적인 ‘나’라는 것은 없습니다.
각성 수행을 통해
생각을 멈추도록 하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각성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마음이 우리 바램을 완전히 무시하고
이제까지 해온 대로 계속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이 의지적인 선택에 의해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프로그래밍 된 기계적인 생각은
자신의 바램과는 정반대로 움직이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필터로 작용하며
실상을 가리고 생생한 앎을 가로막습니다.
실제로 에고가 초월되었을 때나 생각이 끊어졌을 때
가장 먼저 인지되는 것은
사물과 생명체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고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에고를 초월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추정을 통해 편집된 흐려지고 왜곡된 실상을 체험할 뿐입니다.
에고는 자만심과 두려움에 의해 지탱되는
위치성들이 모여 엮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에고가 인지 능력이자 생존이라고 믿는 우리 신념이
자만과 공포의 토대입니다.
우리는 에고를 자신과 세계에 대해 알려주는 근원으로 여깁니다.
마치 텔레비전 화면처럼
우리에게 세상과 그 의미를 전해주는
우리와 세상 사이의 접점으로 보는 것이죠.
당연히 우리는 에고가 없으면 길을 잃을까 봐 두려워합니다.
사람의 일생에서 에고는
모든 노력들과 시도들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에고에 대한 정서적인 투자는 실제로 엄청납니다.
노력, 실패, 성취, 상실, 승리, 비극 같은
온갖 형태의 감정들로 착색되어 있는 것이 에고입니다.
너무나 많이 투자했기 때문에 아깝게 느껴집니다.
소망, 기대까지 포함하고 있는 에고가
우리에게는 친밀하며 삶 그 자체의 체험에서 중심입니다.
에고를 버리려고 하면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은
생존과 유지를 확보하고자 하는 에고의 제어 기능입니다.
이런 기능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의 모든 것이 에고의 기능입니다.
이익과 획득, 학습, 연합 소유의 축적, 정보 기술 등에 대한
에고의 강박적인 집착이 그것입니다.
그런 기능의 배후에
자체의 생존을 확보하자는 에고의 기본적인 목적이 깔려 있고
이런 기능들은 계속 분화되어 나가며 드러나고 잠복하기 때문에
무수히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골적이고 분명히 드러나는 계획이 있는가 하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교묘한 계획들도 많습니다.
위치에 대한 동일시를 벌이는 것은
실제로는 에고의 죽음이 아니라
에고의 목적과 계획의 허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에고를 넘어선 깨달은 사람도
다를 바 없이 걷고 말하고 먹고 웃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이 내가 아니라 그냥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애써 표현하면
나라고 하는 사건, 이 사람이 되는 것이죠.
위치성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국 자아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잘못된 생각조차
지극히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오류라는 점도 알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잘못을 저지르며
다만 소수만이 그것이 잘못임을 깨닫고 바로잡으려 하거나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겁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바로 잡을 수 있는 이유는
에고가 필사적이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에고는 변화하는 것도 원치 않고, 변화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에고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자신이 옳다는 것에 집착하고
자신의 소중한 신념들을 지키려고 애씁니다.
에고는 가끔 스스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개성으로 잘못 아는데
그것을 우리는 [정체성]이라는 심리학 용어로 부릅니다.
정체성도 하나의 위치성이자 신념인데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합니다.
에고를 버릴 경우
자신의 개성을 상실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바로 정체성 상실인데
이것이 바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다름이 아닙니다.
내적인 성찰을 통해
우리는 개성이라는 것이 학습된 반응들의 체계이자
조건화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은 그 개성에 대한 목격자이므로
개성을 진정한 나와 동일시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실제로는 정체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을 바라보는 목격자의 회복이 깨달음에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런 것들이 참다운 의미에서의 중요성이나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죠.
정체성 때문에 행복하거나 불행한 결과들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 어떤 영향력이나 힘도 갖지 못합니다.
사실상 에고는 무찔러야 할 적이 아니라
치유해야 할 환자입니다.
에고는 구조 자체에 내재돼 있는 망상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하고 있어서
정상화 될 필요가 있는 기계입니다.
정상 상태로 돌아가려면
오로지 겸손해지려는 자발성만 가지면 됩니다.
물론 지혜, 헌신, 놓아버림, 받아들임의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그것은 치유 받는 과정에서의 경험일 뿐이죠.
에고를 잃는다는 것은
무서운 일로 여겨지며 상실의 두려움을 동반합니다.
안전하고 친숙한 것을 잃는다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동일시의 대상을 자아에서 참나로 바꾸면
보다 작은 것이 보다 큰 것에 의해서 대치되므로
그 어떤 상실도 경험되지 않습니다.
깨달음이란
실제로는 에고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명확한 인식에서
빈 공간이 생기고
거기에 실재가 흘러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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