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1

[Pleia] 상위자아와 소통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Q&A]흥미있는 일이 없어요

Buddhastudy 2025. 3. 19. 19:43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으로

문자 그대로

눈에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전부를 포함하기에

이 세상에서 신의 일부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상위자아는 이러한 신의 한 조각으로

신이 개별화되었다 할 수 있는 영혼에 속해 있습니다.

그래서 상위자아는 영원히 물질계를 경험하기 위해

육체적 자아와 함께 분화시킨 영적(비물질) 부분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특정한 인격은

육체적 자아, 즉 에고와 상위자아라는

두 요소로 이루어진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고 할 때는 상위자아를 포함하여야

완전히 [한 사람의 나]가 되는 것입니다.

 

신과 상위자아의 중간에 있다 할 수 있는 [영혼]

신의 양상을 가지고 있으며

상위자아보다는 높은 차원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언어로는 이렇게 분리가 되는 듯하지만

상위자아는 [, 영혼]이 물질적 경험을 하기 위해

특정한 진동을 가지게 만든 또 다른 나 자신이며

육체 역시 그와는 또 다른 진동을 가지는

[, 영혼]의 한 부분입니다.

 

상위자아는 반드시 육체적 자아와 함께

물질적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망각으로 시각이 제한된 육체적 자아는

발밑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캄캄하고 험난한 계곡을

아무런 빛도 없이 헤매는 상태와 같아집니다.

 

상위자아는 내가 영혼으로서 스스로 설정해 둔

나의 모든 계획, 모든 인생 테마, 모든 목표를 담고 있는

내가 이번 세계에서 이룰 수 있는 [나의 최고의 버전]입니다.

 

그래서 상위자아는

나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나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다 알고 있습니다.

 

육체적 자아의 시각은 제한적이지만

상위자아는 높이 떠서

소위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새의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늘 상위자아와 가까워지도록

이리로 이리로라며 손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적 자아는

언제나 상위자아의 이런 안내를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육체적 자아에게도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에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상위자아의 안내를 무시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것이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이루고자

모든 디테일과 통제를

혼자 다 하려고 헌신의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상위자아가 이것이 너의 길이다라고 사인을 보내도

무시하고 다른 길을 가려고

열심히 모든 방법을 동원해 창조하려다

결국엔 지쳐서 하게 되는 말이

삶은 투쟁이고, 고통이며, 자유 의지란 없다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선택이긴 하지만

상위자아는 나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이기에

나는 상위자아와 정렬된 상태에 있을 때

가장 긍정적인 상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육체적 자아는

상위자아가 나에게 트릭을 쓰고 함정에 빠뜨린다라는 믿음을 갖기도 하는데

이것은 분리와 두려움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적인 의식에서만 가능한 관점입니다.

 

내가 고통을 느끼면 상위자아도 함께 느낍니다.

상위자아는 바로 나이기에

나와 모든 동고동락을 함께 합니다.

 

상위자아는 조건 없는 사랑과 거의 흡사한 진동을 내기에

늘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고통에 빠지는 경험을 선택하는 나를

매번 용서하고 다시 이끌어주려 합니다.

 

상위자아가 우리와 소통을 하는 에너지적 방법은

정렬(열정), 흥미, 즐거움, 기쁨, 사랑, 창의성, 관심 등을 통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적 자아가 해석해 낸

상위자아의 상태이자 언어입니다.

 

그래서 특정한 결과에 대한 고집 없이

매 순간 최선을 다해

흥미 있거나 즐거운 일을 한다라는

삶의 공식을 실행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통해 동시성이 나타나게 되고

이 동시성을 통해

상위자아는 우리를 이끌어 주게 됩니다.

 

흥미나 즐거운 일이 없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 흥미 있는 일을 너무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아주 오랫동안 상위자아가 전해준 속삭임을 무시해 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하면 즐겁겠다, 이걸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네라는

내면의 사인을

귀찮아, 하면 뭐 해라며

실천하지 않고 오랫동안 무시하게 되면

상위자아는 더 이상 그러한 느낌을 전달해 주지 않게 됩니다.

 

이전에 준 사인에도 반응하지 않았기에

또 다른 자극을 줘도

여전히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 역시 육체적 자아의 선택이기에

상위자아는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상위자아와 연결이 끊어질 수 없는 사이입니다.

상위자아는 바로 나이기에 내가 원한다면

커피 한 잔, 오붓한 산책으로

다시 내 즐거움을 깨워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느껴보려 한다면

흥미 있는 일을 하는 것에 흥미를 가져야 가능해집니다.

 

지금 여러분께서 하고 싶은

가장 즐거운 일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