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264회 중3 담임, 지금 아이들을 교육하는 방식이 옳은 것인지 고민돼요

Buddhastudy 2013. 1. 29. 04:40

출처 YouTube

  

. 결혼할 상대 남자 있어요? . 결혼할 생각이에요? 남자 없는 게 부처님의 가피력인 줄 아세요. ~ 내가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거냐? 이런 생각을 하기 전에 이 문제를 가지고 내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걸 더 중심에 놓고 먼저 보는 게 좋다. 결혼도 하기 전에 결혼하면 내 모습이 어떨지가 얘기 중에 이미 거의 드러나고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결혼 안 하기를 참 잘했다. 남자 없기가 부처님의 가피력이다. 이렇게 얘기 한 거요. 그러니까 선생님이다. 이런 생각을 다 떠나가지고 자기 마음을 좀 살피는 게 필요하다. 지금 이렇게 보면 엄마가 애들한테 잔소리하듯이 선생님이 애들하고 그렇게. 애들에게 첫째 잔소리를 하고 있고, 두 번째는 엄마가 애들하고 조그마한 애하고 싸우잖아. 그죠. 보면.

 

그런 것처럼 선생님이 지금 애들하고 싸우고 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교육 효과가 덜 난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니까 그 작은 애들하고 싸우면 안 돼요. 그리고 애들하고 잔소리해도 안 되고. 그러니까 그 음식 먹고 예를 든다면 청소를 아이들이 해야 된다. 그런데 애들이 안 한다. 그런데 널브러진 걸 내가 도저히 내가 못 봐주겠다. 그러면 여기서 못 봐주는 거는 나의 문제입니다. 그건 교육하고 아무 관계 없는 문제요. 널브러진 것을 못 봐주는 나의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 내가 선택을 해야 돼요.

 

이것은 애들이 안 하니까 내가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그걸 못 봐주는 나의 문제이기 때문에. 첫째는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 내가 치우는 거요. 나를 위해서 내가 치워야 된다. 나는 그런 거 못 봐주니까. 그래서 그냥 애들 일인데 내가 대신해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하는 거를 애들이 보고 거들어 주려는 생각도 하지 말고. 나는 이렇게 해 놓고는 내 승질이 못사니까. 그냥 끝나면 내가 화닥닥 치우고 다 정리를 해 버리는 게 낫다.

 

이거는 아이들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교육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 꼴 못 보니까 내 성질로 내가 하는 거요. 이렇게 내가 편안하게, 내 일로서 내가 그냥 할 뿐이지 애들하고 연결 짓지 마라. 애들이 밥 먹고 치워야 되는 것처럼 선생님도 밥 먹고 치워야지. 그걸 왜 애들만 치우라는 게 없잖아. 그러니까 내 일로서 받아들여서 그냥 내가 한다. 이거를 교육하고 연결 짓지 말고.

 

그래서 아이들이 보고 선생님을 본받아서 애들이 따라 하는 일이 생기면 교육적 효과가 난 거고. 애들이 아무도 그렇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내 밥 먹고 내 밥그릇 치우는 일이라고 생각을 해야지. 요즘 애들이 영악하다. 선생님이 치우는데 어떻게 애들이 가만있나. 이런 생각 하지 마라. 이거야. 그런 생각을 하면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내가 미워하게 된다. 그럼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내가 미워하는 거는 선생님의 태도가 아니다. 교육적으로 선생님이 가르치는 아이들을 사랑하라고 돼 있지. 선생님이 아이들을 미워하라 이렇게 돼 있지 않다 이 말이오.

 

첫째 제 아이들을 제가 미워하니까. 이것은 교육적 효과도 아니고, 효과도 없고, 교육적 자세도 아니고. 두 번째는 나도 괴로운 일이다. 내가 어떤 선생님한테 배울 때 우리 선생님을 자랑스럽게 해야 나에게 좋고. 내가 누군가를 가르칠 때 그 사람들을 사랑해야 그게 나한테 좋은 거요. 그런데 지금 애들을 미워하게 되면 그거는 교육자로서의 태도도 아니고 내 인생도 행복하지가 못하다. 이런 얘기요. 그거 미워하는 이유는 내 일을 해야 되는 거를 자꾸 선생님이라는 상이나 이런 걸 가지고 보기 때문에 결국은 이런 일이 발생한다.

 

두 번째, 그러니까 첫 번째는 그냥 내 밥그릇 치우듯이 내가 치울 뿐이다. 이거고. 두 번째는 내 성질로 보면 내가 확 치우고 싶지마는 그러나 내가 교육자로서 내가 일을 하기 싫어서도 아니고, 아이들에게 자기 밥그릇을 자기가 치우도록 하는 훈련을 시켜야 된다 이 말이오. 이게 내 임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아무리 그 널브러진 게 꼴 보기 싫더라도 놔둬야 된다. 놔둬야 된다. 치우고 손대지 말고. 가만히 놔둬야 된다.

 

그래서 수업시간이 돼도 그것이 치워지지 않는 한 번, 두 번, 세 번, 이렇게 사례를 모아야 된다. 사례를 모아서 애들하고 얘기를 나눠야 된다. 얘들아! 우리가 먹은 거는 우리가 치우도록 돼 있다. 그런데 지금 너희은 이렇게 지난 3일 동안 그 각자의 자기 책무를 다 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 이렇게 이 문제를 갖고 얘기를 해 봐야 된다. 그러면 우리가 자기가 밥 먹고 자기 밥그릇 안 씻고 그냥 내 버려두고 다닐 거냐. 집에는 어머니가 씻어 주니까 그렇다 치고, 학교에서는 각자 자기가 씻게 돼 있고, 자기가 치우게 돼 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 일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아이들이 자기 맡은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된다. 그런데 선생님이 제 성질이 급해서 지가 반쯤 치워놓고, 그러니 애들이 볼 때는 엄마처럼 선생님이 치우고 있구나. 어리광을 피우는 거 아니요. 같이 좀 치우자 그러면 엄마처럼 자꾸 생각이 드는 거요. 잔소리하는 것도 꼭 엄마 같고. 그러니까 배 아파요.” 하고 어리광 피우면서 적당하게 넘긴다는 말이오. 그럼 또 난 안달이 나가지고 애들 욕을 해 가면서도 자기가 치우고.

 

그러니까 그것은 교육적 효과는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선생이 아이들을 교육적으로 훈련을 시키려면 선생님이 자기 성질대로 하면 안 된다. 냉정해야 된다 이 말이오. 그리고 그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사례를 몇 개를 마련해서. 처벌식이 아니라도 그 사례를 확실하게 내놓고 얘기를 해야 된다. 그러니까 처음에 한두 번 이렇게 한 번 하자, 이렇게 하자 해도 그래서 애들이 따르면 좋은데. 그게 따라지지 않으면 사례를 딱 내서 해결해야 되고. 그래도 안 되면 선생님에게 주어진 만큼의 소위 처벌권을 가지고 해야 된다. 이런 얘기요.

  

선생에게 주어진 처벌권이 어느 정도냐? 야단을 칠 수 있는 권리가 있느냐? 그렇지 않으면 심하면 매를 갖고 손바닥 정도 냉정한 마음으로 때릴 수 있는 권리가 있느냐? 복도에 손을 들고 서 있게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느냐? 선생님이 해 보면 그런 게 있을 거 아니오. 저는 옛날에 어릴 때는 그런 권리가 있다 생각했지만, 요즘은 체벌권이 많이 없어졌잖아 그죠? 그러니까 합당할 만한, 아이들도 동조하고 학부모도 이해하고 학교에서도 공유된 어떤 교육을 위한 처벌권이 있잖아. 그죠? 그것까지 발동해서 애들을 교육을 시켜야 된다. 이 말이오. 인간이 되도록.

 

월급을 주고 하는 거는 다 그렇게 교육을 시키라고 지위도 주고 월급을 줬는데. 내 버려두는 것은 선생님의 자기 책무를 반기하는 게 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이렇게 둘로 나누어서 확실히 봐야 된다. 선생이길 떠나서 아이고 나는 마~ 더러운 꼬라지를 못 본다.’ 이런 것으로 자기 문제 개인 문제라면 이것을 확실하게 개인 문제로 돌려서 애들하고 연관 짓지 말고, 내가 청소를 하든지. 아니면 내가 아무리 그게 꼴 보기 싫더라도 그걸 냉정하게 억누르고,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선생님으로서 아이들이 그런 훈련을 할 수 있도록 가르치든지. 그 둘 중에 선택해야 된다.

 

그게 뒤 섞이게 되면 나는 나대로 힘들고, 교육 효과는 교육 효과대로 안 나게 된다. 이 말이오. ~ 그런 것을 자기를 보면서 어~ 내가 만약에 애를 낳아서 키운다면 남의 애도 이런 식으로 미워했다가 좋아했다가 이러는데. 내 아이에 대해서는 어떻겠냐? 이런 걸 생각하면 내가 좀 성격을 바꿔야 될 일이 있겠다. 그래서 학교 선생님 함으로서 이것이 결혼 생활은 아니지마는 결혼생활을 했을 때, 또 아이를 낳아서 엄마가 됐을 때 내가 어떻게 행동할 건지를 미리 나를 내가 알 수 있는 계기가 되니. 월급을 안 줘도 이거는 해볼 만한 일이다. 수행 삼아 해볼 만한 일이다. 이렇게 살펴야 된다.

 

냉정하게 어리광을 부리는 거는 그게 도를 넘지 않으면 어리광을 받아 주는 게 선생과 제자나 부모와 자식 간에 다 그게 정이 오고 가는 거 아니오. 그죠? 어리광은 무조건 나쁘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 그러니까 평소에 별 할 일이 없는데 그저 어리광을 피우고 같이 노는 거는 사랑을 나누는 거기 때문에 좋은 일이에요. 그러나 예를 든다면 청소를 해야 되는데 적당하게 어리광을 피우고 청소를 안 하고 도망을 간다. 그러면 그거는 어리광을 받아서는 안 된다. 이 말이오.

 

그것은 선생님이 화를 내거나 그게 아니라 냉정하게 타이르고, 그래도 안 들으면 몇 번의 사례를 모아서 다시 타이르고, 아이가 자기 책무를 다 하도록 도와줘야 된다. 내가 화가 나서 애를 두들겨 패는 게 아니라. 아이가 아이로서 해야 할 책무를 가르치는 게 선생이라는 거요. 그거를 포기하면 선생이 아니죠. 선생이 화가 나서 애를 두드려 패고 하면, 폭행해도 선생이 아니고, 귀찮다고 내버려 둬도 선생이 아니다.

 

선생이라는 것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 그러나 사랑하지마는 그 사랑이라는 것은 그저 보살펴 주는 것만 사랑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기 책무를 다 하도록 엄격하게 도와주는 것도 선생의 사랑의 한 표현이다. .

 

어린아이들은 따뜻하게 돌봐주는 게 사랑의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아이 때는 누군가 돌봐줘야 되기 때문에.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런 보살핌을 못 받아서. 어린아이들이 보살핌을 못 받아서 고통받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우리 일제시대때 아이들이 제때 제대로 보살핌을 못 받으니까 아이들을 좀 제대로 보살피자 해서 55일 날 어린이날 같은 걸 지정해서 그런 캠페인을 벌인 거 아니오. 그런데 요즘은 365일 맨 과잉보호하는데 어린이날 필요해요? 사실 필요가 없는 일이오.

 

그다음에 사춘기가 되면 아이들은 자기 인생을 자기가 한 번 살아보려고 발버둥친다. 새끼 새가 날갯짓하면서 둥지를 뛰쳐나오면서 발버둥을 치듯이. 그럴 때는 시행착오를 거듭하도록. , 실패를 통한 인생의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지켜봐 줘야 된다. 부모라도 자식을 지켜봐야 되고 선생님이 지켜봐 줘야 된다. 지켜봐 주는 게 그때는 사랑이다. 그때는 돌봐주고 싶은 마음이 막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억제해야 된다. 이 말이오. 아이가 어릴 때는 돌봐주는 게 귀찮더라도 돌봐줘야 되고. 애가 사춘기가 되면 돌봐주고 싶더라도 마음을 억제하고 지켜봐 줘야 된다.

 

그래서 도저히 실험 중 실패. 큰 상처를 입고 허우적대면 그때는 조금 도와주지 어지간하면 자기가 일어나도록 놔둬야 된다. 이제 성년이 돼서 살아갈 때는 관여를 일체 안 하는 게 좋다. 즉 돌봄을 완전히 끊어야 된다. 이런 얘기요. 새끼 새가 다 커서 자기 혼자 날아다닐 때는 어미가 먹이를 물어다 주면 안 된다. 제가 책임지고 먹어야지. 그래야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가난한 나라들에는 어린아이가 보살핌을 받아야 할 때 제대로 보살핌을 못 받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가 아니라도 그 아이들을 보살펴야 된다.

 

한국 같으면 사는 형편도 괜찮고 애들도 한둘이기 때문에 대부분 어릴 때는 잘 보살펴진다. 그런데 문제는 갓난아이 때, 즉 한 살에서 세 살 때까지는 그 엄마로부터 보살핌을 받아야 돼. 그런데 직장 다닌다고 그것을 방치한다. 내버려 둔다. 남한테 맡겨버린다. 그러기 때문에 아이는 엄마로부터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는데 아이들이 엄마로부터 사랑을 못 는다. 이것이 사실은 큰 지금 병폐다. 이런 얘기요. 다 돈에 눈이 멀어서 돈에 미쳐가지고 출세에 미쳐서 지금 자기애를 남의 손에 맡겨놓는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제 엄마로부터 버림을 받는, 제 엄마로부터도 자기가 최일선에 문제가 아닌 이렇게 되므로 해서 아이들에게 사랑 결핍증이 생기게 된다. 애정 결핍증이 생기게 된다. 이건 문제다. 그러고 아이들은 본대로 따라 배우게 된다. 또 어릴 때 한 것이 습관화가 돼서 평생을 좌우합니다. 그런데 부모는 제 눈에 들으라고 제 마음에 들으라고 좋은 옷으로만 입히고 좋은 음식만 먹이고 좋은 곳에만 재우고 좋은 것만 태우고 이렇게 해서 아이들에게 잘못된 버릇을 심어 놓는다.

 

그러기 때문에 아이들이 나중에 이기주의가 되고 자기밖에 모르는 이렇게 된다. 이것도 어머니의 과잉보호가 또는 자기중심의 아이 보호가 아이를 중심에 놓고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자기를 중심에 놓고 아이를 키우기 때문에 결국은 아이를 나중에 버리게 된다. 그래도 우리는 어린애들에 대해서 이런 과잉보호가 문제지 덜 보호한 건 크게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부모들의 문제는 사춘기가 될 때 이제 자기 나름대로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실패의 연습을 해야 될 그런 시기에 부모가 지나친 보호를 하므로 해서 아이들의 자립심을 훼손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아이는 스스로 세상을 살 기회를 자꾸 놓치게 되고, 부모는 나이 든 자식을 나중에 무거운 짐으로 받아들여서 평생 자기 무거운 짐으로 삼게 된다. 이건 사춘기 때 정을 끊어야 할 시기에 정을 끊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다. 그런 데서 선생님도 마찬가지다. 집안에서나 주위에서 보살핌이 부족한 아이들은 선생님이 그 부모를 대신해서 정으로 보살펴 줘야 되고. 또 아이들이 과잉보호로 인해서 잘못된 버릇이 든 그런 아이들은 그 아이들 버릇대로 내버려 둬선 안 되고 선생님이 아주 엄격하게 그런 버릇을 갖고 세상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줘야 된다. 그게 교육이다. 이런 얘기요.

 

그러려면 자기감정에 대한 일정한 통제가 되고 아이에 대한 사랑도 있어야 되지마는 사랑의 표현이 때로는 냉정해야 되기 때문에 그런 자기감정에 대한 통제력이 있어야 된다. 옛날부터 스승은 엄격함으로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 엄격한 것이 그냥 재미없는 게 아니라, 바로 마음속에는 따뜻한 사랑이 있지마는 바깥으로는 냉정함으로 가르쳐야 된다. 그래야 사람이 배우고 성장하고 사회성을 갖게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