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13)

[즉문즉설] 제266회 착하던 아이, 중학교 들어 반항과 화가 심해요

Buddhastudy 2013. 1. 30. 05:01

출처 YouTube

  

사람은 기계가 아니죠. 기계는 입력을 딱 시키면 입력시키는 데로, 그대로 반응한단 말이오.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어린애들이라도 가르치면 가르치는 데로 따라 해도 그것이 또 사람마다 다 달리 반응을 한단 말이오. 그런데 사춘기가 되면 사춘기 이전은 따라 배우기. 고대로 부모가 가르치면 가르치는 데로 따라 배우기 하는 게 특징이라면. 사춘기부터는 저항하기입니다.

 

저항은 아니에요. 사실은. 따라 하다가 자기대로 한번 해 보기 하거든요. 그게 자립으로 가는 길이에요. 어른이 돼 가는 과정인데. 자기식대로 어떤 시도를 해 보니까. 거기에 뭐가 있나 하면 첫째 잘 안 돼요. 자기식대로 시도해 보고 싶은데 잘 안되죠. 잘 안되니까 스트레스를 받는 거요. 이유 없는 반항을 하죠. 어머니가 볼 때는 이유가 없죠. 학교 선생님이 봐도 이유가 없고.

 

애가 어제까지 멀쩡하더니 오늘은 왜 저런 식으로 고함을 지르고 저러냐? 자기 나름대로는 스트레스를 받는 거요. 첫째는 자기가 뭔가 시도를 하고 있는데. 자립을 향해서 몸부림을 치는데. 그것이 실수할 수, 실패할 수밖에 없죠. 자전거를 타더라도 한 번 만에 타지는 게 아니잖아요. 여러 넘어지는 과정을 거쳐서 타지는데. 자꾸자꾸 넘어져 봐야 이 안되는 거, 넘어지는 것을 수용하게 되는데. 처음에 사춘기 초입에는 그게 안 되죠. 늘 따라 하는 건 실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새로 시작하면 실수가 있게 마련이란 말이오. 거기에 스트레스를 받고. 두 번째는 자기는 자기 나름대로 일어서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이제 어른이 볼 때는 말 안 듣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오. 딴짓 하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오. 그러니까 자꾸 야단을 치죠. 그러니까 야단맞을 짓을 하고 야단을 맞으면 교육이 되는데. 자기는 야단맞을 짓을 안 했다고 생각하는데 야단을 치니까 거기 또 스트레스를 받게 되죠.

 

그 다음에 이 신체적으로는 어떠냐 하면 신체가 성장하면서 남자든 여자든 제 1차 성정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죠? 그러니까 심리상태가 어떠냐 하면. 항상 약간 들떠요. 심리가 들뜬단 말이오. 그리고 이성에 대한 뭐라고 딱~ 뚜렷이 말할 수는 없지만. 안정된 심리에서의 이성을 대하는 게 아니고. 약간 불안정한 심리 상태로 이성에 대한 막연함. 막연한 그리움이라고 그럴까? 막연함이죠. 그러니까 그것이 불안한 상태에요. 그 심리 자체는.

 

이성을 그렇게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성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불안정한 그런 상태에 들뜨게 된단 말이오. 그것도 본인으로서는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거죠. 이런 상태에서 또 어릴 때 시키는 말만 잘 듣고 착하게 자란 아이들 같으면, 그 시키는 말 잘 듣고 착하게 잘 듣는다 하지마는. 그 아이 입장에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 저항이 바깥으로 표출이 안 됐지. 마음에 저항이 없는 건 아니거든요. 우리도 지금 그렇게 다 자라지마는 야단을 맞으면 알았습니다. . .” 해도 마음에서 기쁜 건 아니잖아요. 야단맞고 기뻐요?

 

시어미니가 뭐라고 해도 . .” 하고 지내지만 기쁜 거는 아니잖아 그죠? 그럼 오래되면 스트레스를 받는단 말이오. 그러니까 착한 사람일수록 스트레스를 많이 받습니다. 착하다는 건 뭐냐? 자기의 저항을 표현 안 하면 다른 사람이 볼 때 착한 거요. 착한 남편, 착한 아내. 착한 며느리, 착한 아이라는 것은 심리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거요. 스트레스를 늘 갖고 있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 이게 폭발한다. 이 말이오. 그러면 감당하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거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엄마 말 잘 듣고 착하다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래서 가끔 사람들 자기 착하다는 것, “아이고 착하다.” 이러면 신경질 억수로 내는 사람 있어요. 착하고 싶지가 않다는 거요. 착하다는 그 말에 따라서 항상 자기를 착하게 보여야 하는 거에 저항감이 있는 거요. 그러니까 저항을 하죠. 그래 엄동 짓을 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다. 즉 그런 엉뚱한 짓의 충동이 마음에서만 있는 게 아니라. 현실로 나타나면 사고가 되죠. 그러나 대부분 그런 충동은 가지고 있지만은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많지는 않습니다.

 

그런 증상이 나타나면서 학교에 가서는 한 반에 한 50명 된다. 저희들 다닐 때는 50~60명 됐으니까 요즘은 많이 적어졌다네요. 꼭 그런 학교에 저항하거나 규율에 저항하거나 윤리도덕에 저항하거나 이런 아이가 항상 한 서너 명씩 아이들 중에는 일어나죠. 그래서 담배를 피우든지 연애를 하든지 술을 먹든지. 그렇지 않으면 복장을 불량하게 해 다니든지.

 

그럴 때 그 청소년들에게는 그게 굉장히 나쁘게 보여야 되거든요. 학교에서는 그 말썽꾸러기들 아닙니까? 그죠? 그런데 아이들에게는 그게 굉장히 영웅시됩니다. 그리고 그런 얘기를 하거나 저항했던 얘기를 하면 애들한테는 굉장히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나도 저리 못해본, 왜냐하면 다 대부분 스트레스 하고 싶은 그런 욕망이 있으니까. 못해본 거에 대해서 오히려 자귀하는 이런 형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청소년 사이에서 급속도로 번지죠.

 

어떤 섹스 물이 있다. 그러면 그것도 몰래몰래몰래 빨리 번지고. 만화책도 책상 밑에 넣어놓고 번지고. 담배도 피워도 그렇고. 그게 이렇게 나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부러워진단 말이오. 자기는 행동을 못하지만. 그래서 그 통제하기가 굉장히 어렵고. 우리가 생각할 때 신체가 약하고 뭐한 애를 왕따시키고 하면 나쁘잖아. 그죠? 그럼 안 해야 되는데 그 아이들 사회에는 그런 것에 재미를 느끼는 거요.

 

그래서 약간 위축이 되고 아이가. 두려워하고 그러면 그걸 보살펴주는 게 아니고, 그것을 건드리면서 두려워하는 걸 보고 재미있어하고, 그러니까 하나가 돌을 던지면 다른 애들도 다 덩달아 돌을 던지고. 특별한 아이가 있어야 그걸 말린다든지 이런 일이 생기죠. 이런 현재의 상황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자라온 모습과 이후에 어떻게 될지. 어디로 튈지 잘 모릅니다. 대부분은 우리 아이는 이렇게 되지 않겠나?’ 하는데 사춘기를 거치면서 예측과 전혀 안 맞는 경우도 가끔 생겨난다. 이런 것도 다 성장 과정이라고 봐집니다.

 

그래서 사춘기 청소년을 둔 부모는 제일 좋은 거는 지켜보는 거요. 지켜볼 때도 늘 다섯 가지 불자라면 다섯 가지는 규제를 해야 된다. 그것이 죽이거나 때리는 행위, 두 번째 훔치거나 뺏는 행위. 세 번째 성폭행이나 성추행하는 행위. 네 번째 거짓말하거나 욕설하는 행위. 다섯째 술을 먹고 취하는 행위. 술을 좀 먹는 거까지는 몰라도. 그걸 먹고 취한다 하는 거는 안 된단 말이오. 그러면 지금은 화가 나가지고 펄쩍펄쩍 뛰고, 벽을 부수고 하는 것은 이미 폭력성이 있다는 거 아니오. 그죠? 내부에 스트레스가 그만큼 쌓여 있다는 거요.

 

여기서 대책은 두 가지에요. 하나는 그런 내부의 스트레스를 갖고 있는 아이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감싸줘야 되요. 그리고 그걸 풀어줘야 되요. 안 그러면 이게 억압이 되면 나중에 저런 경우에 어른이 되면 술 먹으면 그런 폭력성이 나타난다. 평상시에는 얌전하다 술 먹으면 잠재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을 어쨌든 감싸 안아서 풀어주는 행위가 필요하고.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스트레스를 드러내는 모습이 폭력적인 것은 규제돼야 됩니다. 안 그러면 남에게 피해가 가거든요.

 

만약에 그런 것들을 사람을 때리는 데 썼다. 그러면 감옥에 갈 거 아닙니까? 그죠? 그러면 아이한테 큰 충격을 주죠. 남의 아이 피해도 있지마는 내 아이에게 피해도 크잖아. 그죠? 그러기 때문에 어떤 스트레스가 있고 어떤 행위. 그러한 심리 상태는 이해해 주는 게 필요하고. 그러나 그 행위를 표출하는, 언어나 행위의 표출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일정한 규제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부모가 어떠냐? 또는 선생님들이 어떠냐? 아이의 그런 바깥 행위만 보고 그 심리까지도 이해를 못 하기 때문에 그냥 나쁜 행위라고 하고 야단만 친단 말이오. 그러면 여기에서 뭐냐? 야단을 그럼 안쳐야 되느냐? 아니요. 여기 심리를 이해 못 하는 게 큰 병이오. 그러니까 저항감만 불러오는 거요. 그다음 부모는 어떠냐? 이럴 때. 그냥 자기 아이 귀하다고 그냥 그거를 봐줘 버린단 말이오. 행위에 대한 규제가 안 돼요. 그래서 양쪽으로 치우치는 거요.

 

학교 선생님은 학교에서 그런 행위에 대한 규제를 하게 되니까 부모가 볼 때는 그게 못마땅하죠. 부모는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하니까. 선생님들은 바깥으로 드러난 행위를 중심에 두고 있다는 거요. 그래서 그 심리는 이해하되 행위는 규제를 해줘야 돼. 그 행위에 대해서 응당한 책임이 있다는 거를 아이가 어릴 때부터 알아야 된다는 거요. 그래서 부모님들이 그런 걸 보고 무조건 피해 가려고 하거나 오냐오냐 하거나 이렇게 하면 버릇이 나빠지고.

 

그다음에 그것을 무조건 야단을 치고 억압을 하게 되면 상처가 돼서 나중에 폭발하는 쪽으로 나타나고. 그러니까 이제 지금 만 한 대로 그런 것은 기도하는 게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한 번 정도 화를 벌컥 내서 애가 운다면 내가 봐지는데. 20분 계속 그렇다면 처음에 좀 봐주다가 화가 나요? 안나요? 나고 너무하다 싶잖아.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우리도 다 이해한다고 하지마는 다 참는 거란 말이오. 참으면서 봐주기 때문에 이것을 오래 봐주기가 어렵다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내 기도가 지속이 돼야 아이를 그거를 마음을 따뜻하게 받아 들일 수가 있다. ~ 그런 데서 기도를 우선 부지런히 정진해야 된다. 그 기도라는 건 뭐 해달라는 게 아니라. 그 아이의 마음을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넉넉함이 있어야 돼. 그런데 아이가 앞에서 껴안으면 저항을 하는 것은 뭔가 제 뜻대로 안 되는 것에 저항이 있고. 뒤에 와서 껴안는다는 것은 정을 그리는 것도 있고. 이중심리죠. 우리가 애증하고 똑같아요.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면서도 제 뜻대로 안 되는 거에 대해서는 미워지는. 그래서 엄마가 먼저 다가오면 약간 저항을 하고, 또 엄마가 물러나면 또 자기가 다가오고. 이것은 우리 자녀들의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그 아이만 그런 게 아니고. 부모님에 대한 저항 상처가 있고 부모님에 대한 은혜에 대한 고마움이 있고. 전부 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모님이 계시는데서 는 늘 갈등을 일으키고, 부모하고 멀리 떨어지면 늘 참회도 하고 그리워하고 이런 이중심리가 있단 말이오.

 

그런 이중 심리의 표현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말씀드리면 애들이란 건 그냥 시행착오를 거듭 할 수 있도록 좀 놔두는 것. 멀리서 지켜보는 것이 가장 좋다. 지켜본다는 거는 아이가 실수하는 거를 용인을 해내야 된다는 거요. 때로는 화가 날 수도 있고 때로는 저항할 수도 있고, 그런데 거기에 선을 일정하게 그어줘야 된다. 아까 얘기한 데로 부처님 말씀한 다섯 가지는 울타리를 쳐주고. 그 울타리 안에서는 그거 다섯 가지 말고도 우리 부모가 볼 때는 저래서는 안 된다는 게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그죠? 그것은 지켜봐야 되요.

 

우리도 어떤 일을 해 놓고도 내가 화를 벌렁 내놓고도. 속으로 아이고 미안할 때가 있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화가 나서 미안해요. 화를 내서 미안해요.’ 이런 말 입에서 잘 안 나오잖아. 그죠? 그러면 가만히 있으면 쟤가 아무것도 모르느냐? 그건 아니에요. 자기도 다 속으로는 그런 걸 자각을 하는데. 그럴 때 그자기가 잘못했다. 한 열쯤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미안해하는데 야단은 한 백쯤 쳐버리면. 미안함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억울함만 남는단 말이오.

 

그러니까 저항이 생기는 거요. 그럴 때 그 야단이 교육효과가 없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그리고 또 뭐든지 잘못해도 오냐하고, 내버려 둬도 교육효과가 없죠. 그러니까 잘못을 자각할 수 있도록. 그러니까 한 대의 종아리 정도면 얘가 좀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될 텐데. 열 대를 때려 버린다든지. 한 대의 종아리가 필요한데 그냥 오히려 칭찬을 해줘 버린다든지. 이러면 여기에 문제가 생긴다는 거죠.

 

그러니까 엄마가 볼 때 잘못하는 거 하고 아이가 자기가 스스로 잘못했다는 정도 하고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든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것을 자기가 그만한 크기로 자기가 못 받아들이니까. 또 바깥사람은 그 사람의 행위 의도보다는 항상 크게 그게 눈에 보이잖아요. 피해는 그죠? 그래서 항상 내가 생각했던 , 제가 잘못했다.” 하는 양에 약간 낮춰서 계기는 줘야 줘. 그러니까 지금 지나가지고 애하고 얘기했다. 그렇다 하면 왜 잘못했는지 왜 그렇게 네가 스트레스를 받았느냐?”

 

그런데 이 스트레스에 대한 이해를 해서 아이의 마음을 받아주는 게 하나 필요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행위를 표현할 때 이렇게 폭력적으로 표현하거나 욕설로 표현하는 것은 바르지 않다. 앞으로 그것은 네가 고쳐야 된다. 이것이 이제 정리가 돼야 줘. 그러니까 그것이 이렇게 자각시켜주는 선이 될지. 그게 좀 심하면 그 문제에 대해서 약간의 벌칙. 옛날 같으면 종아리를 맞든지. 감정에 의해서 두드려 패버리는. 그거는 교육 효과가 떨어집니다.

 

저희도 어릴 때 맞아보면 그것이 선생님이 딱 이유를 대고 냉정하게 때리는 거는 교육 효과가 나고. 그냥 감정에 의해서 자기감정을 못 다스려서 폭력적으로 때릴 때는 그것이 굉장히 상처가 되거든요. 내 잘못한 거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오히려 저항심만 생기게 된다. 그런 조정, 그러니까 받아주는 것과 거기에 따라서 일정한 룰에서 야단을 치는 것. 그것이 조절돼야 돼그리고 아까 미니스커트를 입는다 뭐한다 이거는 심리가 어른이 되고 싶은 심리야. 어른의 흉내를 내고 싶은 심리거든요.

 

그런데 어른에 따른 책임감. 옛날 같으면, 요 나이에 시집을 보내 버린다든지, 장가를 보내 버린다든지. 그러면 며느리로서 자기 일을 다 해야 되고, 애를 낳게 되면 엄마로서 자기 일을 다 해야 되고. 이렇게 되는데. 지금 어른이 취급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몸뚱이는 어른이 되고 아직도 사람들의 취급은 어린애 취급을 하게 되니까. 거기에서 어른 흉내를 내게 되는 게 미니스커트를 입는다든지. 힐을 신는다든지, 화장한다든지.

 

남자들 같으면 담배를 피운다든지 술을 먹는다든지. 자기들의 어디 그런 이상한 집에 간다든지 그래서 바깥에서 나이를 항상 올리죠. 항상 나이를 올린단 말이오. 두세 살 올려서 행동한다든지. 이런 증상이니까. 그것도 한쪽은 지켜보는 게 필요하고. 애들이니까 애들 문화라 그럴까? 분위기를 따라가는 거는 하지마는. 그것도 일정한 규칙. 그러니까 그것이 조금 방종, 청소년의 방종이 흐르면 안 된다는 것.

 

그런데 보통 부모들이 너무 우려해서, 너무 간섭을 많이 하죠. 그러니까 아이들이 자기 행위를 숨기게 됩니다. 부모한테 안 알려 주게 되죠. 그래서 사고가 나면 갑자기 왜 이런 일이 생겼느냐? 놀라게 되는데. 그러니까 그 아이들의 행위는 지켜보는 게 필요하다. 그것이 잘했다는 게 아니라. 그 지켜봐야, 사고가 날 만한 방종을 막을 수가 있죠. 알아야 막을 거 아니오. 나도 모르게 저질러 버리면 내가 못 막잖아요.

 

그런 데서 알고 이거를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 그게 사실은 실질적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력이 필요하다는 거요. 모르면 몰라서 그보다 더한 일을 해도 괜찮고. 알면 조그마한 일에도 간섭하게 된다는 거요. 그러니까 아는 건 다 알고. 제재를 가하는 건 아주 극소수로 간다. 이게 굉장히 냉정해 져야 되죠. 그래서 아이의 정을 떼어 주는 것. 내 아이를 이웃 아이 보듯이, 이게 사랑이라는 거죠.

 

싫어서 내 말 안 들어서 싫어서 네 맘대로 해라.” 가 아니고 사랑이 정을 떼어주는 게 사랑의 표현이다. 그래서 어릴 때는 보살펴 주는 게 사랑이고 사춘기 때는 정을 떼어주는 게 사랑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춘기 때 정을 떼어주는 사랑을 못 하죠. 집착 때문에. 그래서 이래서 다 공부를 하는 거요. 이때 정을 못 떼어주면 조금 더 커서 아이가 자립심이 없어지죠. 공부도 지가 알아서 안 하고 연애도 지가 알아서 안 하고 직장도 지가 알아서 안 다니고.

 

부모가 늘 간섭을 했기 때문에 거기 습관이 들어서 요 사춘기 때 자립을 해야 되는데. 사춘기 때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엄마가 뺏어 버리면 그 이후에 아이는 세상에 대한 도전을 할 용기가 없어지죠. 그런 자립성을 잃어버린 자녀를 둔 아들이 26살인데. 아들이 31살인데. 아들이 35인데. 장가도 못 간다. 시집도 못 간다. 직장도 안 구한다. 집에만 있다. 친구도 잘 못 사귄다. 이런 문제로 고민하죠.

 

그런데 그거는 그 사춘기 때 어떤 시도를 할 때 연애도 해보고, 뭐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뭘 여러 가지 시도를 해봐야 고 때 고 나이에 그걸 겪어야 나중에라도 할 텐데. 그때 봉쇄를 해버리니까 그게 이제 경험의 기회를 놓쳐버렸죠. 그래서 마치 학생들이 배울 나이에 학교 안 다녀버리면 나중에 배움의 기회를 놓쳐서 나중에 배우려면 어려운 것처럼. 이렇게 되면 나중에 짐이 되죠.

 

그러면 아이들은 그것에 대한 저항을 다 부모한테 떼어 넘기죠. 말은 안 하지마는 이게 다 너 때문에 그렇다. 당신 책임이다.” 이런 게 심리에 있는 거요. 그러면 평생 지고 살아야 되는 거요. 그래서 여기도 대학 갔는데도 자기가 자기를 못해낸다 하면 그건 뭐 아이 책임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부모 책임이지. 그럴 때는 부모가 , 내가 아이의 그런 사춘기 때 제 하고 싶은 대로 뭘 하려고 시도할 때 내가 기회를 박탈했구나.” 이렇게 반성을 해야지. 그때가면 늦죠.

 

그러니까 지금 조금 사고를 치는 게 나중에 평생 짐 지는 거보다는 조금 나을 거요. 그래서 그런 큰 룰. 부처님의 가르침의 그런 오계의 원칙에 의해서가 아닌 거는 지켜보는 게 중요하다. 여기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사춘기 때는 요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그 자체가 이미 내가 정해진 법 아닙니까? 그죠? 그러니까 이때는 어떤 실험들을 각자가 할지 몰라요. 그래서 큰 그런 오계라고 하는 울타리 이외에는 가능하면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것. 마음을 아프게 가지고 라도 지켜봐 주는 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