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3)

법륜스님의 하루_ 붓다를 닮은 공통의 DNA를 만들기 위해 (2023.08.11.)

Buddhastudy 2023. 11. 15. 20:13

 

 

여러분 개개인은 스스로 좀 더 행복하고 자유로워지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공동체 구성원으로서도 각자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나가야 하며

전 세계 어디에 가더라도

그곳에서 다시 정토회의 싹을 틔우고 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 각자가 수행자의 DNA를 체화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마지막 나흘간 나눈 대화는

함께 수행자의 DNA를 만들어 가는 작업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아라한과를 증득할 만큼

깊은 수행을 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에

오백 아라한이 다시 모여서

3개월간 부처님의 말씀을 정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그 수가 많으면 견

해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백 아라한이 모여 부처님 말씀의 요지가 무엇인지

정립하고 실천 덕목인 계율을 확립했습니다.

 

사람은 오백 명이었지만 법은 하나로 통일이 되도록 정비를 했기 때문에

오백 명이 여러 지역에 흩어져 그 싹을 틔웠지만

그 오백 개의 싹은 거의 동일한 나무로 성장해 나갔습니다.

 

물론 후대에 불법이 좀 변질될 때도 있었지만

비교적 그 원형을 오래도록 유지하며 이어져 왔습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매년 하고 있는 안거는

각자 개인의 고뇌에서 벗어나도록 서로 돕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상가 전체가 모여서 붓다를 닮은

공통의 DNA를 만드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방금 전 안거를 마친 여러분들의 소감을 잘 들었습니다.

그 소감을 들은 제 소감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선재, 선재로다!’

 

다시 말해 착하고 착하구나! 훌륭하고 훌륭하도다!’ 이런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앞서 있고

어떤 사람은 조금 뒤에 있고

어떤 사람은 출발선에 있을 뿐

우리 모두는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길을 향해 한 발을 내디뎠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얼마나 갔는지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 모두는 같은 방향으로 출발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 넘어져 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넘어진 뒤에 다시 일어났고

어떤 사람은 넘어질 뻔하기도 했고

각자 여러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이 길을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차이일 뿐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설령 넘어진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직 길을 가는 과정에 해당합니다.

길을 가다가 넘어진 것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잘해 나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모두가 각자 자신의 부족함을 자각하고

다시는 이런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이렇게 다짐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여러분께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또 넘어져도 괜찮다.

주저앉지 말고 일어나기만 해라.’

 

다시는 넘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한 후에 또 넘어지면

나는 안 되나 보다. 내가 문제야하면서 자신을 학대하게 됩니다.

남을 탓했을 때는 비교적 쉽게 돌이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탓했을 때는 쉽게 돌이키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쁜 행동은 확실히 잘못했다고 자각할 수 있지만

나쁜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은 잘 돌이켜지지 않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욕구는 일어날 수 있지만 집착하면 괴로워집니다-

예를 들어 나쁜 꿈을 꿀 때는 꿈을 깬 뒤에 고개를 흔들며

다시는 그 꿈을 꾸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좋은 꿈을 꾼 뒤에는 꿈을 깨고 나서도

미련이 남아서 다시 눈을 감습니다.

 

꿈속의 세계에서는 좋은 꿈을 꾸는 것과 나쁜 꿈을 꾸는 것이

지옥과 천당만큼이나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꿈을 깬 분상에서 보면

좋은 꿈이나 나쁜 꿈이나 모두 그냥 꿈일 뿐입니다.

그래서 꿈을 깬 분상에서는 좋은 꿈이 꿈을 깨는 데에

오히려 장애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등 나쁜 행동을 했다면

스스로 자각하기도 쉽고, 옆에서 알려주기도 쉽습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닌 것에 대한 집착은

그것이 집착인지 아닌지 자각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주말마다 산행을 너무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이런 행동이 뭐가 문제인가? 이런 것도 안 되나?’

자꾸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괴로움은 좋은 행동과 나쁜 행동을 하는 것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행동과 나쁜 행동은 모두 꿈의 분상에 불과합니다.

괴로움은 좋은 행동이든 나쁜 행동이든 집착하는 데에서 일어납니다.

 

우리 모두는 사람으로서 욕구나 욕망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집착하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집착을 집착인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집착인 줄 모르기 때문에 법문을 들을 때만 잠시 깨우치고

일상에서는 괴로움이 반복되는 겁니다.

연습이 부족해서 안 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백 번 잘못 해도 백한 번째는 일어나기-

물론 분명히 자각했음에도 괴로움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수행을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찰나 무지가 일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 번 잘못하면 백한 번째에는 일어나고,

천 번 잘못하면 천한 번째 일어나면 됩니다.

하지만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게 되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어집니다.

 

수행적 관점을 놓쳐버리면 어떤 해결책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이란

수행이 잘 된다’, ‘수행이 안 된다하는 기준으로 판단하면 안 되고,

수행적 관점을 분명히 가졌는지를 더 중요시해야 합니다.

 

그게 분명하다면

되고 안 되고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니

주변에서 너무 닦달하지 말고 좀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계율을 어기는 것을 합리화하자는 뜻이 아니라

잘 안되는 사람에 대해서 조금의 기다림과 포용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관점을 갖는다면

출가 공동체의 원칙도 분명히 지키면서

또한 많은 사람의 현실을 수용해서 포용력도 갖게 될 거예요.

 

포용을 하더라도 중구난방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

원칙을 지키면서도 배척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을 부처님께서는 중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거를 마치면서 중도의 실천적 의미를 여러분들이

다시 한번 분명하게 인지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