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붓다는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무상, 고, 무아를 설했다

Buddhastudy 2024. 7. 8. 19:28

 

 

무상, , 무아는

불교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삼법인이다.

붓다가 그것을 강조했던 이유는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필요한 바른 견해이기 때문이다.

붓다에게 괴로움은 심리적인 것이지만

원인은

인지부조화, 즉 잘못된 생각에 있다고 본 것이다.

생각으로 지은 집에서

방점을 생각에 둔다면

집착에서 벗어나 유연함을 확보할 수 있고

그것이 평정심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은 붓다는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서 무상 고 무아를 설했다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삼법인이 무상, , 무아인데, 지겹도록 들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법의 도장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놔두고 다른 얘기를 할 수는 없죠.

 

그런데 그 삼법인을 이야기한 이유는

아주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괴로움의 소멸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붓다가 대답을 안 한다든지

그 화제로 삼지 않은 것에 그 이유는

대부분은 그것이 괴로움의 소멸과 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죠.

 

그래서 붓다의 법은 마음법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마음의 법이죠.

이것은 물리법칙, 자연현상에 대한 물리법칙도 아니고

사회현상에 대한 규범론도 아니기 때문에

오직 거의 개인의 마음에 관한 얘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오해가 좀 덜할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붓다가 살았던 시대에

네 가지 정도의 특징적인 주의나 주장이, 이데올로기가 있었는데

그게 네 가지 정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근데 붓다는 이것을 부분적으로 맞지만

이걸 전적으로 주장하면 좀 문제가 있다라고 해서

중도적 입장에서 그걸 통합하고 재창출해서

완전히 새로운, 혁신적인, 진리를 설했다

이렇게 말할 수가 다.

 

이전의 주장들을 간단히 살펴보면

첫 번째는 브라만 사제들이 주도하는 경전에 의거한 세계관과 제사의식

이런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근데 붓다가 사는 시대에는

이미 그것의 폐해가 컸고

이걸로는 안 된다, 마음의 문제 해결 안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고요.

 

두 번째는 브라만 계급들에 대한 반발로

합리주의자들이 등장합니다.

즉 논리와 철학을 내세우면서

세련되고 깔끔하고 모순이 없는 문장들을 가지고

형이상학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인데

그 대표적인 것이 사실은 우파니샤드 그건 후기지만

범아일여 사상, 이거는 좀 철학화 된 것이죠.

 

그래서 브라만이 있고, 아트만이 있고

이건 하나고, 합의에 이르는 것이 구원이고 해탈이다라고 하는

하나의 형이상학이 된 것인데

붓다는 이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마치 자명한 것처럼 얘기하는 위험성이 굉장히 크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 번째는 물질주의에 관한 것인데

인도에서 지수화풍이라든지

그리스에서 사원소론이라든지 하는 원자론 종류의 이런 것들은

물질의 근본을 쪼개 들어가는, 분석해 들어가는

그런 것에서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는 생각이죠.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

오직 물질과 물질 간의 작용만이 있다라고 했을 때

정신작용을 인정 안 하는 것이죠.

그럼 그거는 어떻게 보면 부산물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다음으로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과 책임에 대한 부분을

인정을 안 하는 것이죠.

그냥 물리적 작용의 결과일 뿐이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붓다가 보기는 이것도 지나치게 극단적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죠.

 

네 번째는 또 하나의 극단인 도덕주의라고 하는 것인데

자이나교를 말 것입니다.

이 자이나교는 인과법을 너무나 엄격하고 철저하게 적용해서

한 번 사람이 업을 지으면 과보는 피할 수 없다.

그것은 기계적으로 결정이 되어 있다

이렇게 1, 1획도 인간이 어떻게 개입해서 바꿀 수가 없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어쨌든 신과의 거래에서부터 인간의 도덕적 책임까지

인간의 의식은

어떤 면에서는 진화해 왔다고 할 수 있는데

붓다는 이거는 어느 한쪽을 너무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적절치 않다.

 

여기서 적절치 않다는 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별 효과가 없다

오히려 더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본 것이죠.

 

그렇게 해서 붓다가 대안으로 내어놓은 것이

바로 연기법

연기법을 제시하면서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생기고 조건에 따라서 해체됐기 때문에

조건생 조건멸이라고 하는 연기법이야말로

인과법도 포괄하고

개인의 노력과 책임도 포괄하고

논리적으로도 하자가 없고

모든 미망과 미신을 거두어서

인간이 자기 마음에 대해서 책임을 가지고

향상시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렇게 제시를 했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연기법을 내세울 때

연기법으로 모든 현상을 이해하게 되면

어떤 일이 나한테 닥치더라도 그것을 우리는 수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이런 조건 하에서 일어났겠구나

-두 번째는 그러면 이런 조건을 바꾸어 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할 거 아닙니까?

그럼 주도권이 있는 것이죠.

-그다음에 나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작용 여하에 따라서

결과가 조금씩 변형될 수도 있는 여지가 있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방향성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 조건에 따라서 생기고 조건에 따라서 멸하는 것을 보면서

근본적으로 내 마음의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이 방향성은 중요하다.

 

이 네 가지 정도의 연기법이 주는 효과를 중시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연기법에 따라서

이 연기법은 근데 어떻게 생긴 거냐 하면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고

무슨 논리적인 것도 아니고

뭐냐 하면은 현상을 잘 관찰해서, 편견 없이 관찰해서

일어나는 현상의 모습을 그대로 이해한 거잖아요.

그렇게 본인은, 붓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거든요.

연기법은 있는 그대로의 세계의 모습을 그냥 그대로 이야기한 거다.

그럼 거기서 한 세 가지 정도의 결론이 도출된다 유추된다

하자 없이 논리적으로 깔끔하다.

 

그래서 첫 번째가 무상하다는 것이죠.

근데 사실 무상하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다 조금만 살아보면

영원한 게 없다. 유지되기 어렵다

무상하다는 것은 우리 다 알죠.

 

아는데 여기에 구조를 좀 부여하기도 합니다.

즉 아까 연기법이 조건생 조건멸이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것은 조건에 따라 생겨나지만

그 조건은 조건이 변하면

현상은 변화하거나 소멸하기 때문에

항상 유지된다고 할 수가 없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이 무상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너무나 강력한 영원불변하는 어떤 주체를 상정하는 것을 깨부수는 망치와 같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는 고, 괴로움, 두카라고 쓰여 있는 단어에 대한 얘기인데

정확하게 두카는 괴로움이라기보다는

어긋난다, 맞지 않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만족스럽지 않은 거죠.

격차가, 이격이 차이가 좀 있는 것이죠.

 

그래서 내 맘 같지 않고, 내 기대와 같지 않고

내가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르고

그러니까 그것이 주는 긴장이 생기고

그것이 결핍이나 격차라고 느껴져서

마음의 번뇌로 전환되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서 두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인지부조화일 뿐인데

그것이 꼭 마음의 번뇌가 돼야 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괴로움을

내 생각과 현실이 일치하지 않는구나라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사실은 이것이 과학적인 사고잖아요.

그 가설을 설정하지만

다른 증거들에 의해서 그 가설이 기각되면

또 그것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가설을 만들고

점점점점 더 완성도를 올려가는

그러면은 그 인지는 열려 있는 거지 않습니까?

 

그래서 과학적인 사고와 이 두카가 암시하는 것은

사실은 상통하는 게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겠죠.

 

내 생각과 틀리다고 했을 때

과학자들은 야 이게 뭔가 더 심한 원리가 있나 보다

이렇게 하지, 자기 생각이 맞다고 목숨 걸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받지는 않거든요.

 

네 번째는 무상하고

그다음에는 우리가 잘아는 무아라고 하는 것이 나옵니다.

이 무아라고 하는 것도 범어로는 안아트만이잖아요.

아트만이 아니다라고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문장을 만들면

인간은 아트만이 아니다.

근데 아트만은 뭐냐 하면

어떤 영원한 속성을 가진

영혼 불변하는 생을 바꿔가면서 업을 짓고 과보를 받고하는 것의 주체이며

그 아트만의 본성은

영원하고 불편하고 깨끗하고 지복에 차 있고

이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어떤 상황을 상정해서

그것이 본질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주장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붓다는

아니야, 사람이라고 하는 게

결국은 몸과 마음이고

마음도 수상행식, 그런 정신작용인데

이 몸과 마음을 분석해서, 분해해서 보면

오온에 불과하고

그 각각의 오온에는 어떤 아트만도 없는 거야.

왜냐하면 그 각각의 오온은

이 조건에 따라 형성된 것이며 무상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걸 본질이, 영혼 불변의 본질이 있다고 할 수가 없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게 맞는 말이지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죠.

 

그래서 무아까지도 아주 연기법을 얘기하면

그다음에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결과들입니다.

그리고 어쨌든 불교계에서는

이거 연기법에 따른 무상 고 무아를

부처님의 법의 도장이다

불교라고 하는 것은 이거다 라고 찍어놨죠.

 

근데 붓다는 그러면 왜 무상, , 무아를

아트만에 반대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왜 이야기 했는가?

 

아까 이야기 것처럼

붓다의 유일한 목적, 딱 하나의 목적은

그 괴로움의 소멸과 관련된 것이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의 괴로움의 소멸이라고 하는

대단히 실용적인 목적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 세계가, 이 우주가 어떻게 생겼는가는

형이상학적인 호기심은 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붓다의 설명은 이런 것이죠.

우리는 원래부터 영혼 불멸한 영혼이 아니고

형성된 존재일 뿐이다.

조건에 따라서 형성되고, 조건에 따라서 유지되다가

조건이 달라지면 해체되는

형성된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 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그 무수한 경험들을 통해서

나름대로의 경향성과 패턴과 나름대로의 편견을

삐뚤어진 왜곡된 비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그래서 보통 그거는 무명에서 행 식에 이르는 그 식이

행이라고 하는 식, 의도가 있는 경향성이 있는 식이

즉 우리 사고방식이 문제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자라오면서

어느 순간에는

나는 이 정도는 사다줘야 돼라고 하는 기대가 있지 않습니까?

사실은 그 기대가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그게 충족이 안 됐을 경우에는, 미달했을 경우에는

괴로움이 되고, 우울이 되고, 병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정도는 살아줘야 된다라고 하는 것도

다 원래부터 그렇게 네가 생각했던 것이 아니고

형성된 것이다, 주입된 것이고

그런 것들이 모여서

내가 이만큼 공부했고, 유학도 갔다 왔고, 이렇게 하니까

이 정도 투자가 됐으니까

이 정도 본질은 뽑아야 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경량성이 있는 의식이라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불교의 특징은 뭐냐 하면

정서적 심리적 문제죠,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데 이 문제의 원인을

도덕이라든지 다른 어떤 심리에서 찾지 않고

인지부조화로 본다는 것이죠.

 

인지부조화라고 한 것은 뭐냐 하면

니가 잘못 봤다.

그러니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못 보고

니가 뭔가 왜곡해서 봤기 때문에 자꾸 뭐가 틀린다

그것이 괴로움이 된다이런 것이죠.

 

그래서 만약에 네가 있는 그대로 본다면

즉 편견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다면

여기서 옛날 사람들 소박한

편견만 배제하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인식론적인 문제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붓다가 보기에는

너의 편견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그래서 그것만 없으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있는 그대로를 우리가 본다라고 했을 때는

...

내가 보고 싶은 것과 있는 그대로 사이에 격차가 없어지기 때문에

혹은 격차가 있어도

이거는 나의 왜곡된 곡률 때문에, 나의 편견 때문에 일어난 불일치다 라고

곧바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곧바로 심리적인 괴로움으로 가게 되지 않는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본다라고 하는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

나의 의식의 구조화되어 있는 어떤 경향성, 편향

이런 것들을 알아차리고

알아차리면서 걷어내는 것, 사라지게 하는 것

이것이 불교수행의 핵심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혹시 불일치가 생기더라도

그것은 곧바로 알아차리고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회복 탄력성이 대단히 큰 것이죠.

이것이 붓다가 생각한 괴로움과 인지부조화의 상관관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인지부조화와 관련된 것이

잘못 생각한 거

그러니까 신의 어떤 속성이나 운명이나

또는 신의 어떤 의지나 이런 것이 아니고

조건의 문제다라고 하는 것

 

두 번째는 무상한데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그것도 문제다.

세 번째는 인식의 차이일 뿐인데

이것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다.

그리고 영혼불멸하는 영혼

이런 컨셉은 증명된 바가 없는데도

그것을 믿고 있는 그것이 문제다

이렇게 얘기를 정리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괴로움의 소멸, 심리적인 괴로움

현대인에게는 그건 불안과 우울이죠.

현대인들의 괴로움의 소멸과 관련된 것을

적어도 붓다는

내면에서 찾고, 그래서 마음법이라고 그랬잖아요.

 

세상을 바꾸거나 사회를 바꾸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평정함으로써

나의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

붓다의 기본적인 생각이고 설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정리를 하자면

인간은 모두 생각으로 집을 짓는데

그 생각으로 지은 집은 꼭 나쁘다고만 할 수 없죠.

그렇지만 이것이 내 생각으로 지은집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알아차릴 것

그다음에 그러니까 당연히 집착은 안 하겠죠.

왜냐하면 그 집은

뜯었다가 또는 보완할 수도 있고 다시 지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 집이 문제가 아니고

생각이다라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또 얼마든지 유연하게 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추위와 굶주림과 타인의 공격이라고 하는 생리적인 고통은

어떻게 보면 피할 수가 없겠지만

그거 말고 심리적인 괴로움까지 우리가 겪을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심리적인 괴로움은

그런 잘못된 생각, 잘못된 인지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두 번째 화살까지 맞을 필요는 없다.

그것이 붓다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의 핵심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무상, , 무아를 기계적으로 외울 게 아니라

그것이 괴로움의 소멸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또 옛날의 그 인도의 사상과 어떻게 진화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면

좀 더 선명하게 와 닿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