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감각기관이 아니라 생각이 문제다

Buddhastudy 2024. 6. 25. 19:04

 

 

붓다는 아난이 질문한 욕망의 문제에 대하여 3단계로 대답한다.

"접촉하지 마라, 흔들리지 마라, 깨어있어라"

정확히 계정혜를 말하고 있다.

 

감각기관을 통한 지각이

모든 생각과 감정의 출발점인 것은 맞지만

실제로 감각기관은 포착하고 움켜잡는 것을 본성으로 한다.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내가, 나의 생각이 결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편집하는 존재다.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

나의 관점이 사실과 진실에 기초한다는 지나친 믿음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 일으키게 되어있다.

자유는 자신의 인식으로부터의 자유가 출발점이다.//

 

 

오늘은 감각기관이 아니라 생각이 문제다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난이라고 하는 부처님의 사촌 동생이 있었죠.

아난이 머리도 좋고 일단 잘 생겼다고 합니다.

출가를 했었어도 여자들한테 인기가 되게 많았다고 합니다.

 

아난이 이성 문제에 관하여 부처님에게 이제 물어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난의 질문이 조금 집요합니다.

그 여자 문제라든지 이런 욕망의 문제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그러니까 이제 부처님이

야 그거 접촉하지 마, 쳐다보지 마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러니까 이제 아난이

그런데 어쩌다 보면 쳐다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접촉하지 않을 수가 없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얘기하니까 부처님이

접촉을 하더라도 마음을 내지 마

욕망에 흔들리지 마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또 아난이

근데 어쩌다가 보면 욕망이 흔들릴 때도 있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이 접촉해서 욕망이 흔들리고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라고 또 집요하게 질문하니까

부처님이 그때는

깨어 있어라. 깨어 있으라이렇게 이야기를 하시는 거죠.

 

사실 그것이 뭐냐 하면은

계정혜를 이야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접촉을 하지 않는 것

-그다음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그다음에 본질을 통찰해서 깨어 있는 것

이것이 이제 계정혜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아난이 현실적인 욕망의 문제를 질문했을 때도

부처님은 늘 계정혜 삼학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계정의 삼학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감각기관이 어떤 것을 접촉하는 것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접촉하는 것은 다 번뇌가 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래서 감각기관이 상황을 접촉하면은

느낌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래서 촉, , , , 유 라고 하는 과정이 진행이 됩니다.

 

접촉하면 느낌이 생기고

그 느낌에 따라서 애

이때 []라고 하는 것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그다음에 []는 좋아하는 것은 취하고 싫어하는 것은 밀어내는

선택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러면 내 마음속에

이건 이런 것이고 저건 저런 것이다라고 하는 하나의 결론이 생겨나 있는 겁니다.

그게 []입니다.

그것이 어떤 계기를 만나면 [] 일어나게 된다.

이게 이제 불교적인 심리학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그 처음을 추적해 보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접촉 촉감이라든지

이런 감각 작용을 기초로 한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견물생심이다, 이런 말도 있죠. 그죠?

 

그게 못 봤을 때는 몰랐을 때는 아무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데

보면은 여러 가지 생각이 물밀듯이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이 감각기관을 잘 다스리는 것이

어떻게 보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중요하긴 하지만

이 감각기관을 산스크리트어나 중국의 한자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를 보면

그 본질을 좀 더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이 감각기관이라고 하는 것은 인드리아라고 하는데

우리는 이 인드리아는 인드라망과 관련이 있거든요.

인드라망은 세상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그물과 같다라고 하는

쉽게 말하면 그런 것인데

그런데 이 그물은 그물을 쳐서 포착한다, 포획한다 라는 뜻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물질

포착의 뜻을 갖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모든 걸 다 볼 수 없는데 그걸 보잖아요.

모든 걸 다 들을 수 없지만 그걸 듣잖아요.

그러니까 포착한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포착

붙잡아야 인식이 된다, 이런 뜻입니다.

근데 인식의 본질은 그러니까 포착에 있다

 

[보이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봐야 보인다]

이런 얘기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붙잡는 성질을 한자로 번역할 때는

뿌리가 흙을 이렇게 꽉 움켜쥐고 있다

이런 느낌으로

붙잡는 인드리아라고 하는 단어를

뿌리 근자라고 이야기를 했죠.

 

그래서 육근이라고 하는 것은 시각 청각

이런 촉각 이런 감각기관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근 자라고 하는 것은

뿌리가 된다기보다는

움쳐진다 붙잡는다 이런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감각기관에 센싱이 되면은

뇌에서 해석을 해야 되잖아요.

이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결정하고 행동하고 이렇게 되는 것인데

 

이 진화적으로 보면

우리는 어두운 뼛속에 뇌가 있고

그 캄캄한 동물 속에서 뇌는

감각기관의 보내오는 정보를 전기적 화학적 정보를 받아서

해석하고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까?

기본적으로 이렇게 돼 있거든요.

 

/그러니까 뇌 자체는

바깥의 세상이 진짜로 어떤 모습인지를 아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뇌가 가공할 해석기술, 판단기술 결정기술을 그렇게 하기 때문에

향상시킨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짐승과 적과

그다음에 자연적인 재해가 난무하는 원시시대 때

인간은 그러면 이것은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을 센싱하고 해석하고 판단하는 데

모든 시간을 소비했을까?

당연히 아니죠.

즉각 행동하지 않으면

다 죽는 게 그때의 상황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뇌는 이것이 무엇인가?’의 본질이 규명되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겠다라고 하는 따위에 작동 방식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피하고, 일단 뛰고 나서

그 뒤에 여유가 있으면 분석하는 것이죠.

 

이렇게 우리의 생존 조건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뇌는 생각보다는 반응을 더 잘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뇌는 불확실한 정보로

예측하고, 판단하고, 해석하고 이런 걸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해석하고, 판단하고, 예측하는 것 자체가

다 불확실한 정보를 규명되지 않은 진실을 기초로 해서

가공해야 되는 거기 때문에

뇌가 헛발질을, 판단 착오를 하기가 구조적으로 쉽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이것만 알더라도

우리가 자기 확신에 너무 빠져들지는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문제가

자기 확신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각기관에 포착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건 내가 포착했기 때문에 나에게 들어온 것이라고 하는

이 역전, 역전 현상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됩니다.

 

있는 것이 우리한테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감각기관으로 포착을 해야

우리에게 인식이 된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것도

세상은 내가 봐야 보인다

이런 의미하고 상통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를

우리가 알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다 라고 하는 게

칸트 철학이기도 하고요.

 

어찌 됐든 이게 진실이 아니고

심지어 사실이 아닐 경우도 있는 거죠.

우리가 본 것은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

어느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서 있는 곳이 다르면

풍경이 달라 보일 수 있다라고 하는

상대주의적인 관점이 어쩔 수 없이 용인돼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달리 보일 수 있다, 같은 거라도.

 

조금 더 나아가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게 아니다.

있는 세상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편집하는 것이다./

 

그래서 융 같은 사람은

우리는 세상을 살고 있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머릿속에 있는 세상을 이렇게 내놓는 것이다

이런 표현까지도 쓰는데

다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 편집의 핵심은

인드리아 또는 근이라고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붙잡는 거죠. 붙잡는 거.

 

그러니까 이거는 사진 찍는 것과 같은 거죠.

내가 구도를 어떻게 잡고

사진 찍은 뒤 뽀샵을 어떻게 하고

그런 것, 다 내 생각이 인식을 결정하는 데 너무 큰 영향을 미치니까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가치관, 나의 기억, 나의 우선순위와 있을 수 있는 사실이 결합된 형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정도만 돼도

자기 확신

혹은 이건 당연한 거다라고 하는 것이 가지는

또 그것이 관철되지 않는 세상에서 받는 스트레스의 상당 부분이

구조적으로 사라질 수 있겠죠.

 

조금 더 나아가면

인식으로 인한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다르게 환원시키면 어떤 거냐면

그물을 던져서 붙잡지만 않으면, 움켜잡지만 않으면, 인식의 그물을 버리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문제는 뭐냐 하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인식되지도 묘사되지도 되기도 어렵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일 뿐

언어화되기가 어렵다.

묘사되기가 어렵다 또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겠죠.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는 해방감 자유로움이 있는 것인데

궁극적으로 언어화하는 한

생각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생각 안에서는 다 번뇌를 느끼게 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방법은 사실은 없죠.

방법은 없고 다만 인식이 필요하다.

어떤 인식이 필요한가 하면

내가 뭔가를 붙잡고 있다.

 

내가 붙잡고 있다.

내가 뭔가를 포착하고 있다.

내가 편집하고 있다.

내가 세상을 이렇게 언어화하고 있다라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잖아요.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다.

 

두 번째는 그런 식으로 편집한 세상이

만족스럽지 않고 괴롭다, 편안하지가 않다.

이것을 또 괴로움을 알아차리는 것이죠.

 

이 두 가지 알아차림만 있더라도

진정한 어떤 면에서는

불만족 불만이 생기고

불만이 생긴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지 움직이게 되어 있거든요.

그것이 나를 생각의 감옥으로부터 꺼내줄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방법은 알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위빠사나라고 하는 것이

지혜에 의한 통찰인데 그건 뭔가 하면

그냥 보는 것이죠.

정확하게는 컨퍼런테이션이라고 해서

직면한다,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자유가 뭐냐?라고 하는 얘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유가 뭐냐?

근데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은

자기가 본 것으로부터의 자유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가 본 것을 너무나 확신하고 있고

거기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는 그걸 좀 더 확대하면

자기가 5060년 살아오면서

이건 옳고 이건 그르고, 이건 좋고 이건 나쁘고 하는

자기 프레임이 있는데

이 프레임이 너무 단단해서 거기에 갇혀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자유의 1번은

자기가 갇혀 있다, 붙잡혀 있다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거, 알아차리는 거

그것이 시작이고 끝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알아차리면

더 이상 그것이 자신을 구속하는 그 힘이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무엇도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붙잡혀 있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붙잡혀 있는 것에 대해서 알아차리고

점차 놓여나는 것

이것이 붓다가 이야기한

감각기관을 잘 다스려라라고 하는 것에 진정한 의미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