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라선공부

[릴라선공부] 공부가 깊어진다

Buddhastudy 2024. 7. 23. 19:29

 

 

처음에는 다양한 삶의 경계가 불편해서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공부를 할 때 기본적으로 준비가 되거든요.

떠날 준비가 돼요.

 

그래서 어느 순간 이게 딱 드러나면

이전과 다른 아주 홀가분해지는 삶을 경험을 해요.

그거는 누구나가 다 똑같아요.

 

이 경계에 막 묶여 있을 때와

문득 어떤 분별이 쉬어지면서 이게 딱 드러나면

이상하게 분별이 쉬어지면

여기 아무 일이 없고 편안하거든요.

 

그런데 안목이 미세하지 않으면

요 편안함

이것이 분별인 줄을 모르는 거예요.

아주 미세한 어떤 게

자기도 모르게 사로잡히는

분별인 줄을 모르는 거예요.

이것까지도 다 이렇게 떨어져 나가야 되거든요.

 

근데 처음에는 이걸 볼 수 있는

어떤 안목이 열리기가 쉽지가 않아요.

워낙에 우리가 경기에 오염돼서 살아왔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이것들이 편안해지고 그러면

자기도 모르게 확 잡게 되는 거예요.

뭔가가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어

이런 식으로.

분별할 수 없는 이것, 어떤 느낌 같은 느낌

이런 것을 잡게 돼요.

우리가 너무 시달려서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근데 이렇게 공부를 하다 보면

이게 아주 미세하게 새 나가는 분별이라는 걸 보게 되거든요.

그걸 볼 수 있어야 돼요.

그래서 그걸 놓아버릴 수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잡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잡고 있는 게 있으면 그거는 구속이에요. 구속

그리고 잡는 주체와 대상이 따로 있는 거예요.

이원성이 있는 거예요.

주객관 의식이.

 

그래서 마음에 두고 있는 염두에 두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져야 됩니다.

그게 여래가 됐든, 부처가 됐든, 깨달음이 됐든

그런 게 있으면

그거는 여전히 이원성

이원성이 분별의 속성이거든요.

 

예전에는 다양한 거를 잡고 있었어요.

근데 어느 정도 좀 공부하다 보면

다양한 거에 대한 마음이 새 나가는 거는 쉬워졌는데

공부에 대한 어떤 미묘한 감정적인 상태라든가

어떤 경계를 잡고 있는 게 있어요.

 

근데 그거는 여전히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이원성의 구조에 갇힌 거는 차이가 없는 거죠.

 

단지 여러 가지를 잡고 있느냐

하나를 잡고 있느냐의 차이인 거죠.

그것마저도 탁 놓아버리면

이원성이 사라져 버려요.

 

요 잡는 사람만 남는 게 아니에요.

이것도 같이 사라져요.

같이 사라지거든요.

그게 이게 미묘한 전환이죠.

미묘한 전환

 

그러면 이상하게 좀 눈앞에 가리고 있던 안개가 확 걷히는 듯하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던 어떤 길이 끊어진 듯해.

그러면 어떻게 되냐?

그게 바로 밝아지는 거거든요.

 

눈앞에 있는 이 현실에 그냥 밝아지는 거예요.

이것밖에 없어요.

여기서 안도 없고 밖도 없고, 깊이도 없고 높이도 없고, 좌도 없고 우도 없고

그냥 이거예요.

 

그러니까 눈길 가는데, 발길 가는데, 손길 닿는 데가

너무 100% 다 이거인 거예요.

이 틈이 없어요. 틈이.

 

그래서 마치 생각을 해도 생각의 그림자가 사라진 것 같고

느껴도 느낌의 그림자가 사라진 것 같고

봐도 그 이면이 사라진 것 같고

들어도 그것의 이면이 사라진 것 같아서

아주 100% 분명하게 드러난 듯한 전환이 오고

그래서 이게 공부가 깊어진다고도 표현을 하거든요.

이런 거를.

 

근데 공부가 깊어지면요.

깊은 게 아무것도 없어요.

공부가 진짜 깊어지면요

다 백주 대낮에 드러난 것처럼 다 드러나요.

그러니까 아주 단순해져요. 삶이라는 게.

 

그리고 우리는 막 이거잖아요.

막 막 좌고우면하고 어쩔 줄 모르는

그런 식의 어떤 주저주저함들이 뭔가 사라져.

왜냐하면 다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복잡하니까 우리가 이 삶에서, 여러 가지 생각 속에서

헤매다니는 거거든요.

아주 단순하기 때문에.

그래서 공부가 깊어진다는 건

아주 삶이 단순해지고 단조로워진다는 거를 느끼거든요.

스스로가.

 

그러면 어떻게 되냐 하면

어제도 주변을 둘러보는데

요 아주 잔잔한 들꽃조차도 너무너무 귀엽고 예쁜 거예요.

그냥 그게 찬란한 거예요.

풀 한 포기 하나

그냥 주변에 둘러봐도 너무 반짝

다 이걸 얘기하는 거야

다 이걸 얘기하니까

 

옛날에는 예쁜 것만 봤어.

귀한 것만 봤어.

더러운 건 안 봤어

싫은 거는 안 보려 했어, 회피했어요.

 

근데 그 아름다움

아니면 아름답지 못함

아니면 더러움, 그러지 못함

이게 다 진실하다는 걸 알게 돼.

그게 바로 다 진실하다는 게 다 평등하다는 걸...

 

그래서 어디에서 행복을 느끼냐면

순간순간 하나하나가 다 이거니까 아주 투명하죠. 삶이.

이게 숨겨진 게 없죠.

비밀이 없죠.

예전에는

내가 모르는 비밀이 무수히 많을 거야이런 생각하면서

그거를 찾을 거라고

우리가 자기만의 어떤 파랑새를 찾아간다거나

그런 자기만의 유토피아를 꿈꾸면서 막 헤매 다니잖아요.

그런 것들이 다 사라지는.

 

그래서 진짜 눈앞에 다 모든 것들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 있고

아주 단순해요.

그냥 이것밖에 없어요.

이것밖에 없다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

다 드러나 있어요.

어디 갈 데가 없어요.

그냥 이거예요.

그냥 이거.

 

근데 우리가 여기서 갈 데가 있고

뭐가 뜻이 있고 헤아릴 게 있으면

그게 어떤 느낌이냐면

삶이 너무 복잡해져.

그리고 너무 두려워.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은 것 같은 그런 것들 때문에.

 

그다음에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어느 순간 나를 덮칠 것 같은 그런 두려움들이

세계가 복잡하고, 어둡고

아니면 여기 말고 다른 게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마음속에서 헤매다니거든요.

 

근데 그게 다 이것뿐이에요.

순간순간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하는 이것뿐인 거예요.

지금 여기에.

한 번은 여기에 통해야 된다.

그러고 여기에 통하고 나서

따로 있다고 여겼던 것들이

다 이것의 표현인데

거기에 어두웠다는 거를 확인해 가는 과정이에요, 사실은.

 

그러니까 뭐냐면

자기 실수를 계속 확인해 가는 과정이예요.

남김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