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라선공부

[릴라선공부] 나만 깨닫지 못하는 이유!

Buddhastudy 2024. 7. 22. 19:22

 

 

근데 왜 나는, 왜 나만, 왜 나만 안 되냔 말이에요.

왜 나만 안 돼?

다른 사람들은 쉽게 되는데

왜 나한테는 소식이 안 오고, 와닿지 않고, 이 맛을 모르냐?

 

내가 이걸 경험을 안 하고 있어서 그런가?

이거와 떨어져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뭔가 능력이 부족해서인 건가?

나한테 갖추어진 이것의 힘이 모자라서 그런가?

이것이 나한테는 있는 데가 있고, 없는 데가 있어서 그런가?

막 그런 생각하시게 될 거예요.

왜 나는 안 될까?

 

사실은 엄밀히 말해서

이것이 오히려, 이 생각이 이걸 가리고 있어요.

왜 나는 안 될까?

이 생각이 이걸 가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만약에

이 소식이 시원하게 안 오신 분들은

이렇게 결국에는 이런 식으로도 좀 자괴감이 들 수도 있어요.

 

왜 나는 안 돼?

다른 사람은 쉽게 오는 것 같은데 왜 안 돼?

할 때

이 생각에 속기 때문이에요.

이 생각에.

 

그러니까 이 생각에 속기 때문이라는 거는

매 순간

이게 이것인가? 저것인가? 아니면 왜 나는 안 돼?

모든 순간에 일어나는 분별에 속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의 하루 종일 하는 경험

일어나는 생각, 일어나는 느낌

일어나는 어떤 현상적인 어떤 의미해석

그 분별의 찰라 순식간에 따라가고 있기 때문에, 속고 있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냐 자업자득이에요.

자기가 속고 있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지

이게 눈앞에 없어서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모자라서 안 되는 것도 아니고

이것이 어떤 능력이나 힘이나

이런 것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적거나 약하기 때문이 절대 아니라는 거예요.

 

일어나는 생각에 속고 있기 때문에

그다음에 엉뚱한 그곳을 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모양에 순식간에 너무도 빨리 빠져들고 있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죠?

제 얘기 잘 들리죠. 이해가 되죠?

잘 빠져들고 계신 거예요, 지금.

 

아주 종이 한 장 차이도 안 되는 거거든요.

잘 이해되고

맞아, 내가 그래

자책하고 인정하고 하면

이게 벌써 생각에 떨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식의 어떤 이해는 아주 좋아요.

그럼 이해가 되면 어떻게 돼야 되냐?

 

한번 정리를 해보죠.

이거는 하루 종일 내가 이걸 떠난 적이 없어.

하루 종일 내가 어떤 생각을 하든, 어떤 느낌을 갖든, 어떤 사건을 맞이하든

누구를 만나든, 어디에 앉아 있든

떠난 적이 없어.

 

정리되셨죠?

이거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까?

인정합니까?

좋아요.

그럼 이제는 다 인정하시죠?

인정 못 하시는 분, 여기 안 오셨겠죠?

 

그럼 뭐냐 하면

조금 더 가까이 가야 돼요.

가까이 가야 되는 게 뭐냐 하면

이거는 매 순간, 24시간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늘 이거야.

이거 생각이에요, 그렇죠?

생각이죠.

 

이런 식의 아주 잘 정리된 정견,

정견이라고 하죠.

이런 거를 정견이라고 해.

 

근데 이건 견이라는 거예요. 견해.

이런 데 약한 거예요. 이런 데.

 

바른 이치를 표현하는 말에 약하기 때문이에요.

근데 그거는 말이다 이거야, .

견해다.

 

근데 대부분의 마음공부를 하면서

이런 바른 가르침을 듣는데도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안 오시는 경우는

이런 견해, 정견, 부처님의 말씀에

그다음에 이거를 가리키는 선사들의 말이나

아니면 선지식의 말이나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스승의 말에, 그 견해에

매여 있기 때문인 거예요.

견에 매여 있기 때문에.

 

어떤 견해?

가장 공부를 어떤 면에서 보면

가장 방해하는 것이

자기 스스로를 봤을 때

이 가르침은 맞는데 왜 나한테 소식이 안 올까?” 하는 사람한테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이런 바른 말이에요. 바른말

이치에 맞는 말.

 

이전에는 사실

이치에 맞는 말과 이치에 맞지 않는 말도 몰랐을 겁니다.

왜냐하면

어떤 고요한 상태가 되는 것이

공부라고 착각했을 수도 있어요.

 

근데 법문을 듣다 보면

그것도 경계라는 말을 알아들었어요.

뭐든, 고요한 것도 경계구나라는 걸 알아들었어요.

 

그럼 어떻게 되느냐?

이 사람이 거기서도 깨닫지 못하는 거는 이거예요.

고요한 것도 경계야라는 그 말.

 

이게 말입니다. 견해입니다.

이게 견해라는 걸 모르는 거예요.

이것이 이렇게 딱 떨어져 나가야 되거든요.

 

견해, 어떤 견해?

여기에서 가장 마지막 고비에서 우리가 놓지 못하는 견해는

그동안에 하신 부처님의 말씀, 스승의 말씀

바른 가르침을 폈던 사람들이 남긴 어록

이 마음이 부처다대혜도 말했어요.

이 마음이 부처다. 마조가 말했어요.

 

근데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음이 부처인 줄 안다.

마조는 그 얘기를 한 게 아니다.

이 마음이 부처다.

이 마음이 부처야

이런 얘기를 한 게 아니다.

 

근데 많은 사람들이

그래, 내 마음이 부처야이러고 살아.

그게 바로 바른 가르침이라는 견해에 속은 거예요.

 

근데 진짜 진짜 나는요, 엄밀해야 돼요.

그러니까 어떤 말에도 의지하지 않아야 돼요.

그게 마조 선사의 말이든 부처님의 말이든.

 

진짜 나, 진짜 나의 본성은

부처니, 선사들이니, 스승조차도 여기서 일어난 분별입니다.

그럼 그 사람들의 말은 더 여기서는 상관이 없는 얘기인 거예요.

 

근데 그거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 우리는.

진짜 자기가 드러나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 당당할 수가 없어요.

그다음에 어떤 경계를 만나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