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반야심경

법륜스님 반야심경-제06강 애쓸 것 없는 경지-육바라밀(2)

Buddhastudy 2017. 5. 24. 21:36


  

안녕하세요. 반야심경 강의 6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번에 우리는 반야바라밀다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관자재보살님께서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셨다. 이 반야바라밀다는 대승보살의 수행법입니다. 반야바라밀다는 육바라밀 가운데 하나인 동시에 또한 이것은 육바라밀 전체를 의미한다. 육바라밀은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이렇게 6가지인데, 6가지는 다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가는 배와 같은 것들입니다.

 

첫째 우리가 베풀게 되면, /보시/를 행하게 되면 바로 이 괴로움의 바다를 건널 수가 있다. 이것이 보시바라밀이다.

 

그런데 이게 우리가 좀 이해가 안 되죠. 얻어야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어떻게 베풀어야 괴로움에서 벗어나느냐? 이건 우리들의 생각이 잘못됐다. 우리가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저 언덕으로 건너가지 못하고, 항상 이 언덕에서 헤매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은 잘못되었다. 그것을 전도몽상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다시 살펴봐야 된다.

 

왜 우리의 생각이 잘못 되었느냐?

얻으려고 하는 것은

바로 종이 되는 길이다. 노예가 되는 길이다. 속박 받는 길이다.

 

바로 이 얻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주는 마음, 베푸는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종에서 주인으로 전환되는 길이다.

괴로움에서 행복으로 가는 길이다.

 

그래서 지난 번에 제가 보시바라밀이 되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얻으려고 하는 존재, 주려고 하는 존재, 그러나 주는 목적은 얻는데 근본이 있다.

 

그다음에 조건 없이 주는 존재,

왜 조건 없이 줘야 하느냐?

붓다의 깨달음의 경지에서 볼 때는

본래 내 것이라 할 것이 없다. 무소유. 무아소.

본래 내 것이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의 만물은 다만 존재할 뿐이고,

중생의 필요에 의해서 쓰여질 뿐이지

누구의 것이라고 할 것이 없다.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서 보살은 베풀 되 베푼다는 생각이 없다. 그래서 관세음보살님께서는 일체 중생에게 다 베풀기만 하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에게는 괴로움이 없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가서 그 지옥 중생을 건져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들에게는 괴로움이라는 것은 없다. 그래서 이것이 그들을 위하되 위한다는 생각마저도 놓아야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보람이고 기쁨이다. 어떻게 보면 이기적인 거 같지만, 그렇게 생각을 바꾸어서 그들을 돕는다. 베푼다. 하는 것까지 놔져야 바라밀이 됩니다. 안 그러면 하다 그만 둡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다만 사랑할 뿐이어야 합니다. 그가 나를 사랑하고 안하고는 누구의 문제다? 그것은 그의 문제에요. 남의 인생에 간섭하자 마라. 남의 인생에 간섭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거요. 그래야 바라밀다가 된다. 베푼다고 다 바라밀다가 되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베풀어야 바라밀다가 된다. 이게 보시바라밀다에요.

 

/지계/

두 번째 지계입니다. 지계라는 것은 계율을 지킨다. 계율이란 뭐냐? 계율은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하고 마땅히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을 계라고 그래요. 좀 추상적이죠. 마땅히 행해야 할 게 뭐냐? 마땅히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이 뭐냐? 자기 자신에게 먼저 살펴보십시오. 나는 살아있는 생명이요. 살고 싶어요? 죽고 싶어요? 살고 싶어요. 가끔 죽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신 이상이에요. 약간 정신이 이상증세에서 일어나는 일시적 현상이지, 보편적으로는 살아있는 생명은 다 살고 싶어 합니다. 나만 그래요? 다른 사람도 그래요? 다른 사람도 그래요. 사람만 그래요? 다른 생명도 그래요? 다른 생명도 그래요.

 

그런데 만약에 이것을 누가 강제로 죽인다면 자기가 자발적으로 죽는 다는 것은 놔놓고, 누가 강제로 죽인다면 저항이 생깁니까? 안 생깁니까? 생기죠. 미움이 생기죠. 원한이 생긴다. 원한이 생기면 반드시 원수를 갖게 됩니다. 누군가로부터 내가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면 반드시 원수를 갚을 거고, 만약에 누군가 내 부모를 죽였다면 내 반드시 그 집에 가서 원수를 갚지 않습니까? 그죠? 그러니까 이게 돌고 도는 거요.

 

원한 중에 제일 큰 원한이 뭐요? 살인의 원한이에요. 그러니까 칼로 갖고 찌르는 것, 총을 갖고 쏘는 것은 작은 행위지만, 그것이 생명을 죽였을 때 돌아오는 과보는 엄청나게 크다. 그러니 현명한 사람이라면 작은 행위를 하고, 큰 손실을 보는 짓은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또 반대로 내가 굶주려 죽어가거나 물에 빠져 죽거나할 때, 누가 나를 구해주면 살려주면 고마워요? 안 고마워요? 고맙지. 이건 뭐요? 생명의 은혜죠. 이 살려준 은혜는 내가 물에 빠진 사람을 장대를 갖고 구제해줬다. 그것은 작은 노력이지만, 살은 사람입장에서는 엄청난 은혜죠. 그러니까 그 은혜를 갚으려고 그래요.

 

그러니까 작은 행위를 하고 돌아오는 복은 엄청나다. 지혜로운 자라면 이렇게 해야 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라면 첫째 어떻게 해야 된다? 살아있는 생명은 함부로 죽이지 않으며, 죽어가는 생명이 있으면 기꺼이 살려준다. 살생을 하지 말며, 방생은 하라. 이것이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하고, 마땅히 행하지 않아야 할 것을 행하지 않는 것. 이것을 지키면 누구한테 이롭다? 나한테 이롭다는 거예요. 방생을 하는 것은 복권 당첨 되는 것만큼이나 큰 이익이고, 살생을 행하지 않는 것은 엄청난 손실을 미연에 막는 거다.

 

이게 속박이 아니에요. 어리석은 자는 이것을 지키는 게 속박이에요. 지혜로운 자는 이 인연의 고리를 다 보는 자는 이것을 지킬 게 없어요.

 

두 번째가 뭐냐? 여러분들이 자기가 아끼던 물건을 누가 뺏어갔다. 기뻐합니까? 괴로워합니까? 괴로워하죠. 찾으려 그러죠. 훔쳐갔다. 찾으려 하죠? 어디에 놓아뒀다가 깜빡 잊어버리고 와서 돌아가 보니 없다. 그래도 섭섭하죠. 그래도 찾으려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가 가진 물건을 그런 물건 중에 하나인데, 누가 자기 거라고 찾아와서 도로 가져간다. 그럼 나한테 재산적 손실이 일어나겠죠. 그래서 가난의 과보를 받는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래서 나와 남을 동시에 볼 때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을 갖지 마라. 뺏지 말고 훔치지 말고 갖지도 마라.’

 

이것은 작은 행위를 하고 큰 손실을 본다. 일시적인 이익을 보고 장래에 큰 손실을 본다. 반대로 여러분들이 어려울 때, 곤궁할 때, 그때 누가 도와주면 너무너무 고맙지. 배고플 때 밥 한 그릇 주면 고맙지. 그러면 그 고마움을 갚으려 할 때 밥한 그릇이 문제가 아니에요. 수십 수백 배로 갚으려고 그래요. 그렇기 때문에 비록 내 것이라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을 보면 어떻게 해라? 도와라. 남의 것은 뺏지도 말고 훔치지도 말고 갖지도 마라. 이게 도둑질 하지 마라. 보시하라. 이 말이오.

 

그 다음에 3번째가 사음하지 마라 아닙니까. 어떤 남자가 와서 난 당신을 사랑합니다. 난 당신을 좋아합니다.” 그러면서 나를 껴안고 뽀뽀도 하고 그러면 기분이 좋습니까? 괴롭습니까? 괴롭지. 그것을 괴롭다고 내가 항의를 하면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해요. “내가 당신 때렸어? 내가 당신한테 손해를 끼쳤어? 내가 한 일은 당신 내가 사랑해서 그저 포옹해 준 것 밖에 더 있어?” 말은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괴롭잖아요. 왜 괴로울까?

 

성적인 문제

애정에 관계되는 문제는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니까 이 문제에 있어서는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내가 좋다고 행하면 안 된다. ? 상대에게 괴로움이 되니까. 이게 사음이에요. 그러니까 상대가 원하지 않는 것은 행하지 말라. 그러면 둘이 서로 좋아서 하면 괜찮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3가지는 안 돼요. 첫째 상대가 남편 있는 여자일 때. 우리 둘이는 좋지만 그 남자가 볼 때는 너무너무 괴로워. 아내가 있는 남편, 그 아내가 볼 때는 너무너무 괴로워. 그 다음 미성년자. 그 부모가 볼 때 너무너무 괴롭다. 그러니까 내가 좋다고 남을 괴롭히지 말라에 속하는 거요. 그래서 이것이 삿된 음행에 속한다. 이렇게 남을 괴롭히게 되면 내가 좋다고 남을 괴롭히게 되면 그 과보가 크다.

 

네 번째가 누구 말을 듣고 알고 봤더니 속았어. 거짓말이었어. 굉장히 기분 나쁘죠. 욕 얻어먹으면 기분 나쁘죠. 그래서 말로 남을 괴롭힌다. 속이거나 욕설을 하거나 비난을 하거나 꾸며서 말하거나 여기저기 가서 두 가지 말을 하거나. 이렇게 말로 남을 괴롭히는 것은 하지마라. 오히려 어떻게 하라? 진실을 말하라. 자비롭게 말하라. 4가지가 우리가 말하는 계율에 속합니다. 계에 속한다. 마땅히 행해야 될 거에요.

 

그러데 여기다 4가지가 사바라이. 4가지가 아주 중요한 계율이다. 여기 하나 추가 되는 게 술을 먹지 마라. 이 술을 먹지 말라는 것은 중독성 물질을 섭취하지 마라. 술이나 담배나 마약이나 이런 게 다 들어갑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도 보면 남자가 술 먹고 지나치게 먹고 이렇게 해서 가정불화가 많이 생기죠. 술 때문에 얼마나 분쟁이 많습니까? 자기는 좋지만, 타인에게 큰 괴로움이에요. 또 자기의 건강에도 안 좋아요. 그래서 이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마라. 이것은 손실이 많다.

 

그런데 우리 가족 중에 비록 아버지라 하더라도, 아내라 하더라도, 남편이라 하더라도, 자식이라 하더라도, 첫째 살인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면 부부지간이든 부모자식 간에도 두렵죠? 괴롭죠? 같은 가족 구성원이라도 자꾸 뭘 훔치고 뺏고 하면 괴롭죠? 같은 가족구성, 부부라 하더라도 강제로 자꾸 성적인 접촉을 하면 괴롭잖아요. 가족이라 하더라도 자꾸 거짓말 하고 욕설하고 이러면 괴롭죠. 가족 중이라도 술 먹고 취해서 자꾸 돌아다니면 괴롭잖아요. 가족이라도 이것은 행하면 괴롭다.

 

그런데 전혀 낯선, 알지도 못하는 다른 남자 여자. 그것이 아주 외진 곳에서 두 사람만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절대로 때리거나 죽이지 않는다. 그 사람은 절대로 뺏거나 훔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절대로 타인의 의사에 반해서 성적인 접촉을 행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절대로 거짓말이나 욕설을 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절대로 비틀대고 이러지 않는 사람이다. 5가지만 확실한 사람이라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요. 우리가 길가다가 밤에 사람을 동물보다도 더 무서워하지 않습니까? ? 5가지 때문에. 이것이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담배를 피우고 싶은 사람이 안 피우면 괴로워요? 안 괴로워요? 괴롭지. 그렇다고 피워버리면 더 나쁘죠? 안 피우고 참아도 괴롭죠. 그런데 여러분들은 지금 담배를 안 피우고 있잖아요. 그런데 지금 괴로워요? 안 괴로워요? 안 괴롭지. ? 피워야 된다는 생각을 안 하니까. 피우는 것이 나빠서, 피우지 않는 사람에게는 피우지 않아도 괴롭지 않습니다. 피우지 않는 사람은 안 피워야 된다는 생각도 안한다. 이거야. “, 담배를 안 피워야지. 참아야지.” 이 사람은 피우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범부는 어떠냐?

계율을 지키지 못합니다.

현인은 계율을 지킵니다. 지키지만 참는다 이 말이오.

그러면 성인은 어떠냐? 그것이 나쁜 줄 알면, 그렇게 행하는 것이 자신에게 엄청난 손해가 있음을 알고, 그렇게 행하면 자신에게 엄청난 이익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지킬 것이 없는 거요.

 

여러분들 지금 담배를 안 피우는 계율을 내가 지킨다. 이런 생각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지킬 것이 없는 거요. 그것이 마땅히 행해야 될 일이고, 마땅히 행하지 말아야 할 일일 때는 지킬 것이 없는 거요. 그런데 지금 오늘 우리가 그렇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계율이 우리에게 뭐로 다가옵니까? 속박으로 다가오는 거요. 만약에 마땅히 행해야 할 바 인줄 확연히 알아버리면 속박이요? 자유요? 자유요. 아무런 속박을 주지 않고 우리를 성불의 길로 인도하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이고 그거 다 지키고 어떻게 삽니까?” “아이고 당신 담배 안 피우고 어떻게 삽니까?” 심정 이해가 되죠. 안 피우는 사람은 그거 뭐, 괜찮아. 아무 문제도 없어. 담배 안 피우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난 아무 노력도 안 해. 그런다고 그 사람 피운다는 뜻이에요? 아니에요. 안 피우는데 안 피운다는 생각도 없어요. 이것이 뭐다? 지계바라밀이오.

 

그러면 이 계율에 대한 빤야, 계율에 확연한 깨달음이 있어야 지계바라밀이 되는 거요. 안 그러면 우리는 지계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 속박이 되는 거요. 그럼 자꾸 어기게 되는 거요. 그러니까 계율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그러나 지키는 것만으로는 해탈의 길이 안 된다. 지계바라밀이 돼야 됩니다.

 

/인욕/

그 다음에 인욕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이 세상을 봅니다. 자기를 중심에 놓고 앞, , 오른쪽, 왼쪽, , , , . 이렇게 다 가릅니다. 모든 사물을 볼 때 늘 자기가 중심이에요. 이 말은 자기가 기준이에요. 두 사람이 길을 가면 한 사람이 앞에 가고 한 사람이 뒤에 갑니다. 그러면 뒷사람은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뭘 저렇게 서두르나?” 이렇게 말합니다. 앞에 가는 사람은 자기를 기준에 놓고 뭘 하느라 꼼지락거리나.” 이렇게 말합니다.

 

두 사람이 같이 일합니다. 한 사람은 좀 빠르고 한 사람이 좀 늦다하면 뒷사람은 앞사람 보고 빠르다 그래요. 앞 사람은 뒷사람 보고 늦다 그래요. 우리는 황해를 서해라 그러고, 중국에서 보면 뭐라고 그럽니까? 동해에요. 강북에서 보면 남산이고, 강남에서 보면 북산이에요. 이렇게 다 자기 선 위치에서 달리 본다. 그런데 이것은 상대적이에요. 오늘 우리가 옳다 그르다 맞다 틀렸다 하는 것은 다 가지를 중심에 놓고 바라본 세계에요, 자기 까르마, 자기 업식의 기준에서 본 세계에요. 이것은 절대적인 옳고 그름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이것을 절대화 했어요. 그래서 옳다 그르다 이렇게 늘 시비를 일으킨다.

 

남편이 매일 술 먹고 늦게 들어와. 아내 기준에서 보면 나빠요? 안 나빠요? 나쁘지. 그런데 이 남자가 어디 가서 술을 먹나하고 봤더니 회사 끝나면 꼭 오다가 어느 술집에 들러서 한 시간쯤 술을 한잔 먹고 들어오는 거요. 가 봤더니 거기 주인이 여자에요. 그런데 남편이 얼마 전에 죽고 혼자 사는 분이에요. 그런데 애들 키우고 살기가 어려워. 그런데 이 남편을 아시는 분이에요. 부인이 그렇게 어렵게 사니까 그렇게 오며가며 술을 팔아주는 거요. 이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분이 볼 때는 고마운 분이에요? 안 고마운 분이에요? 고마운 분이에요. 그런데 부인이 볼 때는 남편이 나쁜 사람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동일한 행위라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서 다르다. 그래서 왜 그랬냐? 물으면 아이고 혼자 살고 힘들어서 그렇다.” 그러면 보통 뭐라고 그럽니까? “아이고, 엔간히 자비가 많다, 그 여자에게 베푸느니 나에게 좀 베풀어라.” 이렇게 나오잖아. 이렇게 우리는 늘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본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을 하는데, 그럼 상대편은 또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보니까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를 잘 자각을 못하겠죠. 그러면 갈등이 아주 심해집니다. 그럼 서로 억장이 무너져. 어기가 막히는 거요.

 

이게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사과라도 해야 용서를 해 줄 텐데, 자기가 잘했다고 우기니까 사람이 더 미치잖아요. 이렇게 해서 이게 갈등이 증폭이 된다. 그럴 때 , 서로 다를 뿐이구나. 옳고 그르다할 게 본래 없구나.” 이게 우리가 배우는 공사상 아닙니까? “, 본래 옳고 그름이 없구나. 텅 빈 거구나.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이 자기를 기준으로해서 옳다 그르다하는 분별이 생기구나. 그것을 절대화 시켜서 움켜쥐니 상이 되는 거구나. 그래서 거기에 집착을 하구나, 내가. 그래서 이렇게 갈등이 생기구나.” 이것을 우리가 깨닫게 된다.

 

그러면 참을 것도 없어지는 거요. 용서해준다는 말은 굉장히 좋은 말이지만, 용서해준다는 말은 누가 옳다는 거요? 내가 옳다는 거요. 그래서 이 용서해주는 수준 갖고는 해탈의 길이 아닙니다. 아시겠어요? 이것은 현인의 길이에요. 성인의 길, 불보살의 길은 뭐냐? 용서해 줄 것이 없어야 됩니다. ? 본래 옳고 그른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인욕바라밀이 되려면 어떻게 된다? 참을 것이 없는 경지. 참을 것이 없는 경지다. 이게 인욕바라밀의 경지다. 이런 얘기에요. 참을 것이 없는 경지.

 

, 한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시어머니가 가끔 며느리네 집에 와서 잔소리를 자꾸 하는 거요. “음식은 우리 아들은 이렇게 하면 안 되고, 반찬은 이렇게 해야 되고, 이것은 삶아야 되는데 너는 볶았고, 이것은 생것을 줘야 되는데 이것을 삶았고, 옷은 다려줘야 되는데 그냥 했고이렇게 자꾸 얘기를 하면 귀찮아요? 안 귀찮아요? 귀찮지. 그러면 대부분 하소연이 하이고 시어머니 잔소리 때문에 못살겠다.” 그냥 집에 와서 가만히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밥 딱 해드리면 먹고, 구경시켜 드리면 구경 갔다 오고, 그렇게 계시면 좋을 텐데, 늘 간섭을 해서 힘들다는 거요.

 

그런데 여기 갖다 놓으면 여기 가만히 있고, 저기 갖다 놓으면 저기 가만히 있으면 꿔다놓은 보릿자루나 그렇게 있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그죠? 이건 뭐요? 시어머니를 내시키는대로 해라. 어린애처럼. 밥 주면 밥 먹고, 구경시켜주면 구경이나 하고, 입 다물고 있으라 그러면 가만히 있어라, 이 얘기 아니오. 이게 남의 인생에 간섭하는 태도란 말이오. 그러니까 이게 갈등이 생기는 거요.

 

그런데 여기서 결국은 남편은 나에게는 남편이지만 시어머니에게는 남편이 누구에요? 자기 아들이잖아, 그죠. 그러면 이 아들의 습성에 대해서 부인이 잘 알겠어요? 어머니가 더 잘 알겠어요? 어머니가 더 잘 알아. 어릴 때부터 키웠기 때문에, 부인은 나하고 사니까 내가 더 잘 알 것 같지만 어머니는 자기가 훨씬 더 잘 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머니가 보니까, “오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 저렇게 하면 안 되는데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오. 어머니는 간섭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아는 바를 얘기하는 거란 말이오. 그런데 며느리 입장에서는 간섭이고 잔소리란 말이오.

 

이럴 때 이 며느리가 만약에 불자라면, 불법을 아는 자라면, 지혜로운 자라면, “, 우리 남편에 대해서 나보다는 우리 어머니가 더 잘 아신다. , 어머니가 오셨을 때 우리 남편이 어떤 식성을 갖고 있고, 어떤 취향을 갖고 있는지 좀 배워야 되겠다.” 이렇게 마음을 내면 어떻겠어요. “음식은 이렇게 만든다.” “, 그것을 좋아하구나. 그래서 요즘 음식을 나로서는 해줬는데도 젓가락 가지고 찍접찍접하고 안 먹으면 짜증내고 가더니, 야 삶아야 되는데 볶아서 그랬구나. 날것을 줬는데 사실은 무쳐줘야 되겠구나.” 이렇게 아는 맛이 있잖아. 그죠?

 

아침에 나갈 때 옷 입으면서 신경질내고 나가서 왜 그러나그랬더니 와이셔츠를 안 다려줘서 저랬구나.” 이렇게 어머니를 통해서 배운단 말이오. “, 그러세요. 아 그러세요.” 이렇게. 그러면 며느리가 시어머니 잔소리를 듣고 참는 거요? 참을 것이 없는 거요? 참을 것이 없는 거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배운다, 이 말이오. 그리고 또 모자지간에는 오래간만에 만나면 할 얘기가 많아요? 안 많아요? 많지. 그러면 저녁에 아이고 여보, 어머니하고 주무세요.” 이렇게 자리 비켜주는 거예요. 오래간만에 모자지간에 같이 놀라고 얘기도 좀 하고.

 

그러면 이웃집에서 볼 때는 , 저 집 며느리 대단하다. 그 시어머니 잔소리를 저렇게 참고 잘 견디네.” 이렇게 말 하지만, 사실은 참을 것이 없다. 그러면 참는 자가 오래 참겠어요? 참을 것이 없는 자가 오래 참겠어요? . 참을 것이 없는 자는 영원히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괴로움이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뭐라고 한다? 인욕바라밀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참는 것은 그냥 인욕일 수는 있지만, 인욕바라밀은 아니에요.

 

그러면 이게 보시든, 지계든, 인욕이든 그냥 베푼다.

그렇지 않으면 지킨다. 참는다하는 문제가 아니죠.

거기에는 제법의 공성, 본래 옳고 그름이 없다, 하는.

나와 남을 동시에 바라보는 관점.

베푼 것이 나에게 이익이다. 라고 하는

그 본질을 꿰뚫어 있어야 이렇게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사실은 이게 보시바라밀이라 하지만 거기에는 뭐가? 반야바라밀이 들어있다. 지계바라밀이지만 반야바라밀이 들어있고, 여기에 인욕바라밀이지만 반야바라밀이 들어있는 거요.

 

/정진/

노력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정진. 노력이거든요. 우린 게을러요. 이게 중생이에요. 그런데 현인은 어떠냐? 애를 쓰고 노력을 하는 거요. 노력한다는 말은 하고 싶다는 거요? 하기 싫다는 말이오. 하기 싫다는 거요. ‘노력 한다이 말은. 하기 싫다고 안 해버리면 범부 중생, 하기 싫지만 하면 현인. 그런데 그 하기 싫다고 하는 싫다는 어디서 온다? 내 까르마에서 온다. 좋다 싫다는. 그러니까 그 싫다에 사로잡힌 것은 탁~ 놔버리면 어떠냐? 그냥 하는 거요. 하기 싫은데, 애쓰는 게 아니고 그냥 하는 거요. 그러면 이것은 노력할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아침에 5시에 일어난다. 못 일어나는 사람은 범부 중생이오. 일어나려고 내~ 애를 써. 노력을 해.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하면서 이불 밑에서 계속 노력을 하는 거요. 주로 못 일어납니다. 아예 이건 범부중생은 일어나기 싫다고 안 일어나는 거요. 그런데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하는 것을 탁 꿰뚫어보면. ‘잃어나기 싫다여기에 지금 사로잡혀 있는 상태란 말이오. 그러니까 일어나야지라는 것이 일어나고 싶은데 몸이 말을 안 들어서 못 일어난다.” 주로 이렇게 말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몸은 죄가 없어요.

 

공연히 수행하는 사람이 몸을 자꾸 문제를 삼아요. 그러니까

 

못 일어나는 것은

몸이 말을 안 들어서 못 일어나는 게 아니라,

몸이 아픈 것을 핑계로

일어나기 싫어서 못 일어나는 거요.

일어나기 싫다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니까 이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는 게 공부란 말이오. 그러니까 어떻게 일어나느냐? 일어나버려야 돼. 어떻게 일어난다고? 일어나버리라니까. 그냥 벌떡, , 그냥 일어버려야 된다. 그러면 일어나야지라는 것은 번뇌에 속하는 거요.

 

일어나야지라는 것은

일어나기 싫다는 것이 있고,

그것과 싸우는 또 다른 번뇌에 속한다.

그러니까 번뇌가 일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가야 돼.

 

그러니까 벨이 따르릉울리면 일어나야지는 번뇌를 일으키지 말고, 벌떡 일어나버려야 돼. 그러면 일어나야지라는 생각은 할 필요가 없어요. 일어나야지라는 것은 일어난 뒤에 생기는 생각이오? 일어나기 전에 생기는 생각이오? 일어나기 전에 생기는 생각이오. 그러니까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로 연습을 하지 말고, 저녁에 잘 때, “벨이 울리면 싹 일어납니다.” 이러고 딱 자란 말이오.

 

울리면 싹 일어나려고 하는데 못 일어났다. 번뇌가 끼어서. 그러면 오늘 놓쳤구나. 다음에 다시 해봐야지. 연습을 하더라도 근본을 딱 꿰뚫어서 연습을 해야 2~3번 하면 해결이 된다. 이 말이오. “일어나야지라는 식으로 노력을 하면 10년 해도 늘 그 나물에 그 밥이오. 그러니까 이 노력할 것이 없어야 됩니다.

 

이런 우리들의 그 마음을 살펴야 되요.

그래서 이게 반야가 필요한 거요.

그냥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업식에 휘둘려서,

그 번뇌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자꾸 애쓰는 것은 효과가 없습니다.

훌쩍 뛰어 넘어버려야 돼.

 

어린아이들이 화장실에 가서도 만화책 보죠. 게임하죠. 걔들 노력하는 거요? 노력 안하는 거요? 노력 안하는 거요. 노력한다는 말 안 합니다. 그냥 하는 거요. 재미있어서. 그런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의 일을

재미를 내어서 그냥 가볍게 하셔야 됩니다.

이를 악 다물고

이빨이 부러지도록 각오하고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면 병 생기는 거요.

 

그럼 이빨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몸도 아프고 이렇게 되요. 병나는 거요. 그래서 늘 가볍게 마음을 탁 내어서, 그냥 하셔야 됩니다.

 

/선정/

그 다음에 간단하게 정리를 하면 선정, 이것도 바라밀이 되어야 되요. 우리는 어때요? 늘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하고 들떠있죠? 그러니까 고요하지 못하다. 그러면 이 현인은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마음을 고요히 하려고 노력하는 거요.

 

마음을 고요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이 말은 지금 고요하다는 거요? 들떴다는 거요?

들떴다는 거요.

 

그럼 고요하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이 경계에 끄달려 있다.

경계에 끄달려서

거기에 시비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고요하지 못한 거요.

 

우리가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지면,

, 다만 그것을 그것으로 보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어떠냐?

마음은 어디를 가나 고요해 있는 거요.

그러니까 고요하게 하려고 할 필요가 없는 거요.

 

그러면 고요하게 하려고 할 게 아니라,

경계에 끄달리지 않도록,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중요하지,

자꾸 이미 이 경계에 끄달려서

마음이 들떠 있는 것을 자꾸 눌러서 안정시키려고 하는 것은

마치 밑에서 불은 떼고, 위에 물이 끓는다고

자꾸 바가지에 물을 퍼다 붓는 것과 같다.

불을 빼버려야지.

 

그래서 여러분들이 선정바라밀이다. 선정을 통해서 우리가 괴로움이 없는 경지로 나아간다. 이 말아니오? 선정바라밀이라는 말이. 그래서 여러분들이 앉아서 선정을 닦는다고 선정 바라밀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여러분들은 번뇌를 가지고 지금 놀고 있기 때문에. 마치 그것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욕망을 억누르고 참는 것은 고행이지 해탈의 길이 아니다. 이 말이오.

 

욕망이 일어나는 대로 따라가면 쾌락이고,

그것을 억누르면 고행이에요.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 둘을 늘 왔다 갔다 하는 거요.

 

욕망을 따라가지도 말고 억누르지도 마라.

이게 중도요.

그럼 따라가지도 말고, 억압도 하지 않는 게 뭐겠어요?

참는 것도 아니고 행하는 것도 아닌 게?

다만 지켜보는 거요.

 

그것을 그것으로 그냥 다만

일어나고 사라짐을 다만 지켜 볼 뿐이에요.

이게 비파사나죠. 알아차림, 지켜봄.

그러면 사라짐.

 

이렇게 우리가 공부를 닦아가야 된다. 여러분이 참 노력은 많이 하시는데, 이게 약간 조금 방법이 잘못되어서 시간을 많이 낭비하는 거 같아. 수행하다 병나고, 그리고 빨리 여러분들이 자유로워져서 여러분들이 가진 재능을 이 세상을 위해서, 세상에 필요에 다 곳곳에 쓰여야 되잖아. 그죠? 그런데

 

죽을 때까지 중생은

자기 인생도 못살아 남보고 내 도와 달라하다가 죽고,

수행한다 하면서 죽을 때까지

자기 인생 문제에 매달려 살다 죽는단 말이오.

 

내 문제라는 것은

간단하게 해결을 해야 되요.

그리고 남은 생을 이 세상에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한데 써야 되는 거요.

그 필요한데 쓰는 것도 써야지하면 안 됩니다. 아시겠어요?

 

자기 문제가 없으면

저절로 쓰여져요.

 

이런 과정을 겪어서 반야바라밀에 이른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순서 개념은 아닙니다. 반야라는 것은 모든 바라밀에 근본 관점이 잡혀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것이 바라밀다가 될 수 있는 거요. 선정을 닦는다고 선정 바라밀다가 될 수 없고, 정진 한다고 정진 바라밀다가 될 수 없고, 인욕 한다고 인욕 바라밀다가 될 수 없고, 계를 지킨다고 지계바라밀다가 될 수 없고, 보시한다고 보시바라밀다가 될 수가 없다.

 

보시든 지계든 인욕이든 정진이든 선정이든 그것이

바라밀다가 되려면 바로 빤야,

, 법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야 된다.

그래서 이 반야바라밀다는 육바라밀을 다 포함한다.

 

그러니까 관자재보살님께서 어떻게 사셨지 이해가 되시겠어요? 베풀 되 아무런 대가 없는 그런 베품의 행을 하셨고, 계를 지키되 지킨다는 생각도 없이 당연하기 때문에 행하는 거고, 제법이 공한도리를 알기 때문에 참을 것이 없이 중생을 있는 그대로 보신 거고,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

애쓰고, 각오하고 이렇게 사는 게 아니라,

그냥 하는 거요. 마땅히 하는 거요.

 

애쓰고 노력하면, 34번 안되면 실망하고 지치죠.

다만 할 뿐이오.

넘어지면 일어나는 거요.

안되면 다시 하는 거요.

연구해서 하는 거요.

 

그러니까 길이 잘못되었으면 길을 바로 찾아야 되고

길이 바른데 아직 거리가 멀면 계속 가야 되는 거요.

 

그리고 어디에 가나 꼭 무슨 시간과 장소를 정해놓고 거기서만 선정이 아니라, 일체시 일체처에, 경계에 끄달라지 않는 그런 선정을 닦았다. 또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면 바로 경계에 끄달림을 알아차리고, 즉시 원래대로 돌아갔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 사바세계의 삶 그대로가 뭐에요? 정진이에요. 이게 그대로 수행이고. 이런 수행을 통해서 확연히,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 이런 법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이런 수행을 할 수 있겠죠. 또 이런 수행을 통해서 결국은 반야바라밀,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 이 말이요.

 

그 깨달음을 얻은 내용이 뭐에요?

제법이 공한 도리에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시고 제법이 서로 연기되어있다는 것을 깨닫듯이. 그러니까 모든 법이 실체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게 다음 문장이오. 여기서 잠깐 반야바라밀다에 대해서 조금 이론적인 설명을 더하면, 이 반야라는 말은 3가지로 우리가 나누어서 설명을 합니다.

 

첫째 실상반야, 실상 반야라는 것은 존재의 참 모습, 제법의 실상, 있는 그대로를 반야라고 한다. 이것을 실상반야라고 한다.

두 번째는 그 실상을 확연히 있는 그대로 보는 나의 지혜, 이것 또한 반야라고 한다. 이것은 관조반야에요. 비추어 보는 힘. 반야심경에서 뭐라고 그랬어요? 조견이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중생의 그 병을 하나하나 다 알아서 중생이 깨달음에 이르도록 그 인연 인연 따라서 바르게 인도해주는 힘, 이게 방편반야에요.

 

그러니까 이 지혜는 제법의 실상, 진리 그 자체를 말할 때도 있고, 지혜를 말할 때도 있고, 방편을 말할 때도 있다. 그래서 이것을 실상반야, 관조반야, 방편반야라고 합니다.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그렇고, 좁은 의미에서 말하면 반야는 무슨 반야다? 관조반야가 되겠죠. 존재의 참 모습을 내가 확연이 깨닫는 지혜. 이렇게. 그것을 비추어 보는 나의 지혜. 이것을 반야라고 한다. 그런데 이 지혜는 바로 일체법의 실상을 확연히 깨친, 붓다의 지혜, 보살의 지혜를 반야라고 한다. 이렇게 정리를 해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럼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