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無其實分
-경은 그 실체가 없다
이때 수보리가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시는 것을 듣고
그 뜻을 깊이 이해하고 감읍하여 아뢰었다.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이처럼 심오한 경에 대해 듣는다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옵니다.
제가 오래도록 수행해서 나름의 혜안을 얻었다지만
일찍이 이와 같은 경을 들은 바가 없었나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신심을 청정히 하면 –일체 미혹에서 벗어나-
실상을 갖추게 되리니
이 사람이야말로 보기 드문 제일의 공덕을 성취한 것이라 생각되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을 갖춘 자는 사실상 실상이 없기 때문에
여래께서 실상이라 이름 붙여서 설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와 같은 경을 듣도 이해하고 받아지닐 수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만일 다음 세상 2천5백 년 후에 어떤 중생이 있어서
이 경을 듣고 믿고 이해하여 마음에 받아 지닐 수 있다면
이는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 될 것이옵니다.
이 사람은 아상이 없어지고 인상이 없어지고
나아가 중생상이 없어지고
더 나아가 수자상이 없어지게 될 것이옵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상에서 벗어난 것이 곧 부처라는 이 경의 가르침을 통해
아상을 비롯하여 인상중생상수자상이
실체가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참으로 그러하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거나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불교 수행에- 바람직한 사람임을 알지라.
왜 그런가 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무상의 바라밀이란 것은
사실은 바라밀이 아닌 이름만 그러하기 때문이니라.”
-解義-
경이란 부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성스런 책이다.
그래서 불제자에게 있어서 경이 없는 것은
마치 항해 시에 나침반이 없는 것과 같다.
이런 까닭에 수행자는 경을 대함에 마치 부처님 대하듯 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경에 집착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경의 가르침은
한결같이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응무소주하라고 한다.
응무소주마저 뛰어넘게 되면 이생기심하게 된다.
불법이나 부처도 버림으로써 평범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렇게 한 사이클을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면
聖도 아니고 俗도 안게 된다.
부처와 중생의 구분이 없는 상태,
그래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으면서도 없게 된다.
이런 경지를 금강경은 반복해서 제시하고 있다.
깃발과 바람에 얽힌 다음의 선문답을 떠올려 보자.
--
어느 날 네 명의 승려가 도담을 나누고 있었다.
한 승려가 먼발치에서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깃발이 힘차게 펄럭이는군” 하였다.
그러자 다른 승려가 이를 듣고는
“저건 깃발이 펄럭이는 게 아닐세,
자네 눈엔 요동치는 바람이 보이지 않는가?” 하였다.
그러자 또 다른 승려가 헛기침을 한 번 크게 하고는 말을 꺼내기를
“둘 다 틀렸네,
깃발이 바람이 움직인 게 아니고
자네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네” 하였다.
그러자 그때까지 구석에서 묵묵히 있던 승려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셋 모두 틀렸네.
깃발도, 바람도, 마음도 움직인 것이 일절 없네.
그저 시공이 한 판 춤사위를 당겼을 뿐인 것을...” 하였다.
이때 이들 네 명의 승려 옆을 지나던 한 나그네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이런 행동을 의아하게 여긴 네 번째 승려가 물었다.
“당신의 그 웃음은 대관절 무슨 뜻이오?”
그러자 나그네가 말하기를
“네 분 모두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틀렸습니다.
그래서 맞은 것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니지요.” 하면서 껄껄 웃는 것이었다.
네 명의 승려가 의혹의 낯빛을 드리우며 날선 눈빛읕 번득일 때
마침 길가 논두렁에서 밭을 가는 촌부가 있었다.
그는 허리를 펴고 구슬땀이 송송 맺힌 이마로 눈부신 햇살을 가득 받으며
환한 웃음을 내비쳤다.//
여기서 깃발을 보는 것이 아상
바람을 보는 것이 인상
마음을 보는 것이 중생상
시공을 보는 것이 수자상이다.
그리고 나그네처럼 사상에 얽매임 없이 두루 볼 수 있으면
대개 한소식 들었다고 한다.
일각을 한 건 맞지만 아직도 불법에 얽매이는 마음이 남아 있어 해탈에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위의 선문답에서 초점은
마지막의 촌부에게 맞춰진다.
그는 아마 두 종류의 사람일 것이다.
중생 그대로의 촌부이든지
아니면 수행의 한 사이클을 돌아 제자리로 온 붓다일 것이다.
촌부가 깨달음을 얻고서도
자신이 이룬 경지에 일모의 머무름이 없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대각을 이룬 셈이 된다.
이런 이유로 인해 세존의 설법은 뭔가 해답을 주면서도
결국엔 그 해답마저 부정한다.
중생들에게 불법의 동아줄을 길게 내려주면서도 그런 적이 없다고 잡아떼는 것이다.
왜냐, 불법이 중생구제의 동아줄이 되기 위해서는 그 실체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모든 분별을 다 넘어서기 위해서는
경의 가르침에도 머무름이 없어야 한다.
이런 취지로 세존은 경마저 그 실체가 없으니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輕武其實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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