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근_깨달음과마음치유

김홍근[깨달음과마음치유 7강] 인간에 자연이 핀다 / 저절로 인도하는 삶

Buddhastudy 2025. 5. 7. 19:00

 

 

  • 인간의 본질: 인간은 본래 자연이며, 그 자연은 내면의 꽃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01:17]. 도시 생활 등으로 인해 인공적인 요소와 관념에 덮여 오염되어 있으며, 이러한 인공적인 요소 중 가장 큰 것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입니다 [01:44].
  • 집착과 고통: 인간은 현상에 집착하여 본질을 놓치고, 이로 인해 불만족과 고통을 느낍니다 [03:13].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심과 평상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03:59].
  • 무심의 경험: 무심은 마음이 텅 빈 상태를 의미하며, 이는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05:00]. 무심을 경험하는 것은 마치 구름이 걷히고 푸른 하늘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11:29].
  • 화두의 중요성: '지금 보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통해 자신의 순수한 의식을 확인하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10:13].
  • 집착의 내려놓음: 마음 공부는 세간의 욕망뿐 아니라 진리에 대한 집착까지 내려놓는 과정입니다 [19:58]. 이를 통해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21:08].
  • 무심과 평상심의 조화: 평소에는 무심으로 마음을 열어두고, 필요할 때는 평상심으로 집중하는 것이 이상적인 마음의 상태입니다 [23:13].
  • 무아의 경지: 무아는 나라는 관념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며, 이는 인간의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입니다 [27:20].
  • 공부의 여정: 마음 공부는 거친 번뇌와 미세한 번뇌(진리에 대한 집착)를 제거하는 여정이며, 이 과정을 통해 본성이 이끄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0:38].

 

 

 

봄이 왜 봄인지 아세요?

보다

뭘 보라고?

꽃 보라고.

 

그런데 무엇이 진짜 꽃이지요?

_ 보다

꽃을 본다.

진정한 봄은 자기를 보는 거죠.

 

여름은 열매 맺다.

열음, 여름.

가을은 갈무리

추수해서 갈무리하는 거

겨울은 겨를이라고 쉬라고, 겨울

단어의 뜻이 있어요.

 

하여튼 봄은 봄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보면

사시장춘, 봄여름가을겨울이 다 봄이 되는

자기 안에 내면의 꽃이 피는 걸 보면 된다.

그렇기 위해 공부하고 있죠.

인생을

사시_ 춘하추동을

장춘_ 긴 봄이 되도록 하도록.

 

/집착하면 고통이 생기고

집착을 내려놓으면 자유다./

 

내면에 꽃이 핀다이것을

딱 한마디로 말하면

내면에 자연이 핀다고 할 수 있어요.

지금 우리의 삶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도 자연이잖아요.

근데 그 자연에 인공이 지금 가미되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

 

인간은 본래 자연인데

살다 보면, 특히 도시생활을 하다 보면

인공이 그 위에 덮여서 오염되어 있다?

뭐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결국 우리 공부는

자기 안에 자연을 발견하는 것인데

그러려면 그 덮여 있는 인공을 제거해야 되는 거죠.

 

그래서 지금 우리 공부는

자기 안에 자연을 발견해서

자연이 꽃이에요, 진정한 꽃.

그 꽃이 피도록 하는 것인데

근데 지금은

그 자연에 좀 쓸데없는 인공의 요소가 덮여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근데 인공의 요소 중에서

가장 인공적인 요소는 뭐냐 하면

관념이에요.

 

관념이 있어요?

없다고 할 수가 없지요?

선입견들, 고정관념들.

그게 지금 우리 자연을 덮고 있어서

그 자연이 스스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관념, 이것을 만들어낸 것이 집착이에요.

집착한다이 말은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집착하는 것은 현상을 집착해요, 인간이.

현상을 집착해서 본질을 놓친다.

그래서 본질로 돌아오라고 하는 표시가 고통이에요.

 

왜 고통이 있는가?

인간에 자연인 본질이 있는데

그 본질을 놓치고 살아가니까

대개 인간의 고통은 한마디로 말해서

불교에서는 고통이란 무엇이냐 하면

불만족이에요, 불만족.

 

집착하면 불만족이 생겨요.

하여튼 뭘 해도 흔쾌하고 시원하지 못하고

뭔가가 빠진 것 같은, 모자라는 느낌

그게 불만족, 그게 고통이에요.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

무심과 평상심/

 

그러니까 중도에 대한 표현이 많지만

선에서 말하는 무심과 평상심이

가장 좀 보편적인

우리가 또 잘 이해할 수 있는 그런 표현 같아요.

 

인간이 가장 잘 살 수 있는 그 방식은

무심과 평상심이에요.

무심이란 말은

쓸데없는 인공적인 것은 걷어내고, 무심.

집착해서 생긴 그 많은 집착의 관념들을 걷어내고

그러면 무심이고

무심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게 평상심.

그래서 무심과 평상심.

 

결국은 여러분께서 무심을 한 번

무심이라고 하는 그 상태를 한번

자기가 알아채야 돼요.

그러니까 그게 고비라고 할 수 있어요.

그 무심이라고 하는 것을 한번 알아챈다.

 

절에 가면 대웅전 벽에다가 십우도 그려놨잖아요.

소를 찾는 그림에서

_ 마음이고

텅 비는 동그라미가 있잖아요.

그게 무심인 거죠.

그래서 마음이 한 번 텅 비는 거.

 

거친 욕망은 어느 정도 내려놓고

그다음에 그 상태에서

지금 이 순간 그 자연스러운 마음, 혹은 순수의식

이런 말을 써요.

이게 본질이에요, 인간의 본질.

 

인간의 본질은 딱 한마디로 말하면

지금 보는 거예요.

 

보이는 것이 있죠?

아침에 눈 뜨고 난 뒤에 항상 보이는 것이 있죠.

보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은

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요.

 

인간의 본질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모든 경험하는 것이에요.

경험하는 주체.

안이비설신, 그리고 그걸 통합해서 의라고 하는 생각하는

그걸 통합을 해서 상황을 파악하고 살아요, 인간은.

 

그중에서 5개의 감각 기관 중에서

지금 보는 것이 9할을 차지한다고 해요.

인간에게 받아들이는 정보 중에서

9할은 보는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해요.

 

그러면 지금 이 순간에

여러분 보시죠?

, 그 보는 것이에요, 본질은.

그러니까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보는 것이에요.

근데 보는 것이 무엇인가?

이게 지금 근본 질문, 즉 화두

줄여서 이 먹꼬?’가 되거든요.

 

근데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지금 돌아보니까

이 무심을 확실하게 확인하고 나면

그 무심이

, 내가 이거 처음 아는 건 아니구나하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한번 무심을 정확하게 확인하고 나면

, 요 무심이라는 것이

내가 살면서 지금 처음 경험한 건 아니구나.”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살다 보면

인공의 때가 얼핏 얼핏 벗겨졌을 때가 있다, 이거예요.

그래서 돌아보면

저 같은 경우는 26살 때

본질이 뭘까?” 하고

그때 도서관에서 집중했을 때, 경험했던 그것이었어요.

그리고 제주 서귀포 신라호텔에 한 번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드라마, ‘쉬리의 언덕이라는 벤치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거기 앉아서 거기가 약간 높은 언덕이에요.

그 밑에 그 해안이 있고, 그리고 바다가 쭉 펼쳐지잖아요.

근데 거기에 앉아서 그냥 바다를 구경하고 있을 때

10, 20분쯤 되면

저절로 모든 상념이 바다를 보고 있으면 가라앉으면서

그때도 한번 그 체험을 했었어요.

돌아보면 그런 게 드문드문 있었어요.

아주 장엄한 노을을

막 소나기 내린 뒤에 구름이 막 춤을 출 때

노을이 지면 굉장히 장엄하지요.

 

하여튼 드문드문

우리 마음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를

거기 무심 상태인데

그걸 경험한 적이 돌아보면 있어요.

 

근데 차이점이 뭐냐 하면

그때는 이것이구나라고 확인은 못 했어.

경험은 했는데 그냥 지나가고

이것이구나하는 자기의 존재의

가장 그 순수한 자연스러운 상태를

확인하는 작업이 깨달음이거든요.

그때는 확인을 못 했어요.

근데 공부하고 나서는 확인을 했다, 이거예요.

 

그럼, 차이점이 어디에 있는가?

그때는 화두를 가지고 살지 않았어요.

인간의 가장 순수한 상태는 뜻밖에도

지금 보는 이거예요.

 

지금 보는 이것을 확인하는 건데

그런데 이것을 무엇인가?”라고 하는 이런 문제의식이 없이 살 때는

와도 그건 줄 모르고 그냥 흘려버렸는데

이렇게 철이 들면서 궁금증이 생겨서

나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 나의 무심, 순수한 의식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그게 참나니까, 그게 진정한 나니까

나는 누구인가?”라고 하는 질문이

결국은 지금 보는 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좁혀지거든요.

 

이렇게 문제의식을 가지고 살 때는

확인할 때 이 순수의식 자체가

이거구나하면서

내 입장에서는 이거구나지만

순수의식 입장에서는 걔가 깨어나는 거예요.

덮여서 힘을 못 쓰고 살다가

걔가 스스로 깨어나는 거.

 

깨달음은

내가 순수의식을 깨닫는 게 아니라

순수의 순수의식이 스스로 깨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가 나로서는 느낌이

, 이거구나하는 발견 같은.

 

마치 항상 구름이 낀 상태에서 살다가

구름이 거쳐지고 푸른 하늘을 볼 때

, 푸른 하늘이 본래 있었네하는 거와 같은 거예요.

 

그게 이 육체를 가지고 사는 입장에서는 그렇고

그런데 본질의 입장에서는

본질이 스스로 깨어나는 거죠.

그래서 그 차이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자기의 순수의식은 다 경험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어린 시절을 살았기 때문에, 다 경험했어요.

그래서 , 어릴 때 그 느낌이구나하는 걸 우리가 알아요.

 

근데 문제는 그 뒤에

구름이 낀 날에서만 살았어.

어른이 되고 난 뒤로는.

그러다가 다시 자기의 구름이 벗겨진 푸른 하늘을 이렇게 확인하는 것.

 

기나긴 장마의 먹구름 사이로

푸른 하늘이 얼핏 나타날 때

이것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그런 거죠.

 

지금, 이 공부를 하는 사람은

자기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를 확인해 들어가서

그것이 나구나, 본래의 나구나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 건데

확인하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근데 어느새 잃어버리고

이 번뇌망상의 구름에 덮여서

이렇게 찌든 인생을 살아가는 지금 입장이다.

 

그래서 이게 회복이에요. 우리 마음공부는.

그래서 언제 회복하느냐 하면

어른이 되고 난 뒤로는 질문을 가지고 살아야 돼요.

그래서 화두라는 게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요.

 

화두를 안 가지고 살면

만나도 또 지나갈 거 아니예요, 그건 줄 모르고.

근데 화두를 가지고 살기 때문에 딱 만나면

, 이거구나하고.

화두를 가지고 사는 삶은

오매불망 이 순수한 나의 의식이

일종의 님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걸 그리워하고 사는 거예요.

 

그러다 딱 만나면

본격적으로 그냥 알아

, 이거구나하고 딱 이렇게 알아요.

 

아무튼 그런 기회를 가지는데

덮여 있던 것이 되게 두 가지다.

거친 망념하고 미세한 망념인데

-거친 망념_ 세간의 욕망들이고

-미세한 망념_ 순수한 푸른 하늘을 이런 공부를 통해서 배운 거예요.

공이다, 불법이다, 자성이다, 마음이다, 순수의식이다, 중도다, 무심, 평상심

이런 식으로 배운 것들이

결국 마지막에는

그것이 관념이 되어서

소위 말하는 법이라고 하는 상, 진리라고 하는 관념이 되어서

그걸 듣고 있어요.

마지막에는 그거를 내려놓는 것이 핵심이에요.

 

그래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

소가 사라진다.

그러면 정말로 보고 있는 이것이 굉장히 선명해요, 걷히면.

 

처음에는 자기 보고 있는 이 시야가

자기 욕심에 가려지고

그리고 나중에는 이런 진리라고 하는 관념 자체에 가려져 있어요.

그것이 차츰차츰 다 사라지고 나면

평상심인데도 불구하고

굉장히 선명한 느낌이 확실하게 있어요.

 

아무튼 자기 시야가 아주 투명한 수정체 같은

그런 느낌으로 이것이 드러나서

그리고 수정체 같지만, 완전히 텅 비어 있어서

완벽하게 텅 비어 있어서

이거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근데 알고 보면

, 이게 처음부터 이렇게 있었네

그리고 부처님 말씀처럼

, 이거는 나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고

모든 사람이 다 이걸 가지고 사는데

다만 지금 자기 관념에, 자기 욕심하고 관념에 사로잡혀서

이걸 못 알아채고 살아가네

이제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게 되는 거예요.

지금 전체 우리 공부 과정을 한번 말씀을 드린 거예요.

 

/백척간두 진일보/

백척간두는 마지막 법상만 남아 있는 그 상태가 벽척간두고

진일보는 그것마저 내려놓아야 된다.

 

아마 진리에 대한 감이 있을 거예요.

나름대로 꾸준하게 공부하신 분들은

, 이런 게 진리구나하는 감이 있을 거예요.

마지막에는 그 진리라는 감을 느끼는 그 자리가 벽척간두

30m 장대 끝에 딱 선 상태라면

진일보라는 말은

그 진리라는 감을 내려놓아야 되는 거죠.

그게 마지막 진일본인데

근데 벽제간두 가야지 진일보 하지.

상황은 이해되세요?

그러니까 말만 배워서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모든 공부가

여러분 백척간두 올라갈 필요 없잖아요. 이리되면.

처음부터 안 올라가면 되잖아요.

근데 올라가서 진일보 해야 돼

이게 참 또 하나의 아이러니해요.

 

부처님도 6년 선정을 닦고, 고행을 해서

백척간두 가서 다 버려버렸더니

안 되는구나하고 버려버렸더니

깨달음이 왔다, 이거잖아요.

아무것도 안 하고 허공으로 바로 나간다?

그거는 인간한테는 거의 불가능한 것 같아요.

 

열심히 하다가

, 내가 뭘 잘못했구나를 알아차리고

그걸 내려놓는 순간

그냥 완전히 텅 빈

온 세상이 공으로 드러나는

그런 인연을 맞이합니다.

 

/백척간두 진일보

100척이나 되는 높은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왜냐하면 백척간두가 대사일번 절후소생

크게 한 번 번/

대사_ 크게 죽을 장소예요.

절후_ 끊어진 다음에 소생

소생한다 그런 말 쓰죠?

거듭 중()자를 써서 중생(重生)이라는 말을

중생_거듭 태어난다.

에고가 한 번 죽고

우리들의 본래면목이 다시 태어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하여튼 여러분은 안심하고 공부하세요.

Itinerary, 이 마음공부가 완성되는 Itinerary

Itinerary가 뭐죠?

일정표, 여행 일정표가 딱 나와 있는 거예요.

나와 있어서 가기만 하면 돼요.

착실하게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 집착하는 것이

이번 단락 첫 문장이 집착인데

그 집착하는 것이

일반인들은 세간의 식색명

_ , 먹는 것,

_ 남녀 문제

_ 명예

대개 일반인들은 현상에 식생명에 집착해요.

근데 마음공부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진리에 집착해요.

둘 다 집착이에요.

 

이 말은 거친 번뇌는

세간의 식생명에 집착하는 그 욕심을 번뇌, 그 번뇌를 내려놓는 거고

두 번째 내려놓는 것은

진리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거예요.

 

진리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그 석가모니라고 하는

석존, 부처님이 진리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자마자

얼마 안 있어서 깨달았다는 거죠.

대각을 이루었다.

 

지금 여러분께서 말을 듣고 이해는 되죠?

근데 그 이해가 실제로 일어나려면

자기가 나도 모르게 진리를 집착하고 있다는 것

100% 여러분 다 있어요.

그것 때문에 아직 완전히 못 깨닫고 있는 거예요.

 

이런 말을 많이 들었죠?

그런데 실제로 자기가 그렇다는 걸 돌아보는 것은 쉽지 않아요.

앞에 앉은 저 같은 사람은 계속 상기시켜 드려야 돼.

 

이해하는 거 하고

실제로 자기한테서 실감하는 거 하고

그 간격이 있죠.

그 간격을 좁혀 나가는 게 지금 마음공부예요.

 

집착 하나 내려놓는 게 중도예요.

근데 그 집착이 미세하게 변장을 잘해.

마지막 변장이 깨달음으로 변장을 해요.

그 깨달음에 대한 집착으로.

 

나는 깨달음을 공부한다.

지나간 사람들 보고

난 너희들과 달라, 나는 도 닦는 사람이야하는

그게 미묘한 마지막 집착이라서

하여튼 그것까지 돌아보는데 시절 인연이 필요한 거예요.

푹 익어서 그런 것까지 봐야 된다.

 

/대사일번 절후소생(大死一番 絶後蘇生)이란 말은

에고가 크게 한 번 죽어서 끊어진 다음에야

진정한 자기로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무심과 평상심이 그렇다.

살인도 활인검, 사람을 죽이는 칼 활인검

사람을 살리는 칼이라고도 한다./

 

이 공부가

한 번 사람을 죽였다가 살린다 이거예요.

한 번 죽인다, 이 말은

집착하는 당사자를 죽이는 거죠, 집착하는 그 당사자.

집착하는 당사자는 누구겠어요?

에고겠죠, 애고. 아상이라고 하는 거.

 

이것이 쉽지는 않아요.

지금까지 아상으로 살았는데

그 아상이 스스로 물러나겠느냐 이거예요.

물러나기 어렵죠.

그러니까 그게 하나의 큰 고비입니다.

 

무심할 때는

내가 어느 한 곳에 집중하지 않아요.

이 의식의 포커스를 무심할 때는 되게 열려 있어요.

어느 정도 열려 있는가?

완전히 열려 있어요.

 

무심할 때는 거의 이 시야가 확 열려 있는 상태예요.

그러다가 누가 부르고, 뭐 좀 해달라 그러면

딱 포커스를 쫙 맞추잖아요.

그러면 그게 평상심을 쓰는 거예요, 평상심으로.

쓰고 난 다음에 계속 포커스를 맞출 필요는 없잖아요.

그럼 다시 또 확 열어둬.

열었다가 탁 좁혀서 일을 처리하고, 또 열고 하는

그런 느낌이 있어요.

 

무심과 평상심에 나의 의식의 상태가

무심일 때는 거의 확 열려 있어서, 거의 뭐 완전히 열려 있죠.

호연지기처럼.

호연지기는 산꼭대기에 올라간 그런 기분이잖아요.

산꼭대기 올라가면 굉장히 확 열리죠.

그렇게 있다가 뭔가 집중해서 해야 할 때

그때는 딱 집중해서 하고

그때는 굉장히 집중도가 높아져요.

그럴 때는.

 

지금 우리가 자기 의식을 쓰는 건데

그 의식의 효율을 높이는 작업.

그러려면 평소에는 무심으로 열어놓고

막상 일을 닥치면 전광석화처럼 산다.

전광은 뭐예요?

돌을 돌에다가 탁 던지면 불이 반짝 나죠.

그게 전광, 번갯불, 전기 빛

전광석화_ 돌과 돌이 부딪혔을 때 나는 불꽃

 

번갯불이나 돌의 불꽃처럼 이 마음을 착 쓰고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싹 거둬들여서 닫아놓고

이것이 도다, 이거예요, 이게 도다.

 

도인은 어떻게 사는가?

무심과 평상심으로 산다.

무심의 시간이 훨씬 더 많겠죠. 이해되죠?

무심의 상태를 한 번 체득을 해야 된다.

 

하여튼 하여튼 불교는 이거예요.

무심을 공이라고도 해요.

그래서 아무튼 저 같은 경우는

불교를 처음 만났을 때 법회를 갔는데 반야심경을 외우더라고요.

책을 주잖아요.

초심자가 절에 가면

옆에 어느 보살님이 무슨 법요집 해서 주잖아요.

 

반야심경을 딱 보는데 이라는 말이 소화가 안 돼서...

불교는 공이구나

불교를 만났을 때 제일 먼저 만난 말이 이란 말이었어요.

근데 공이 다예요.

공이 본질을 말하고

무심을 공이라고 해요.

그리고 무아를 또 공이라고 해요.

 

초기불교 하시는 분들은 무아를 강조하거든요.

근데 불성이 무아인데

자성, 혹은 불성, 본래면목 이런 말을 왜 쓰느냐?”

이런 질문이

초기불교 하는 분들은 대승불교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를 해요.

 

대승불교 입장에서는 무아를

-공이라고 하고

-불성이라고 하고

-자성이라고 하고

-본질이라고 하고

-본래면목이라고 하고 그런 거예요.

-나라는 것이 없는 상태.

 

나라는 것이 없는 상태가

나라는 관념이 없다고 해서

우리가 죽냐 이거예요.

그게 아니라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예요.

 

진짜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는 무아네요.

내 생명이 없다그 말이 아니고

라고 하는 그 인공의 조미료가 빠진 상태, 없는 상태.

가장 나의 자연스러운 상태.

 

여러분,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

제가 서귀포 앞바다에서 쉬리 언덕에서 한 30?

30분 이상 본 것 같아.

바다를 무념무상으로 가만히 보고 있었을 때

그때 나라는 것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없었어요.

근데 굉장히 편안했어.

 

그렇다고 내가 조는 것도 아니고, 넋이 빠진 것도, 멍때린 것도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정말로 편안하게

아무런 그런 잡념 없이, 가만히 이렇게 있었던 그 상태.

그게 우리들의 자연스러운 상태예요.

 

이거를 빨리 그 상태가 깨어나서

그 상태가 주도하는 삶.

우리 공부의 목표가

그렇게 무심하게, 편안하게

-인간의 가장 편안한 상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

 

지금 이 순간 마이크도 약간 그렇고 제가 괜찮았는데

앉는 순간 목이 약간 잠겼거든요.

그러면 지금 이 순간 저는 목이 살짝 느껴져요.

약간 불편해. 느껴져요.

여러분, 자기 몸이 안 느껴질 때가 가장 컨디션이 좋은 상태다.

이해되세요?

자기 몸도 안 느껴지고

자기 마음도 안 느껴질 때가

가장 나의 컨디션이 좋은 상태다. 이해되세요?

그게 지금 무심, 무아 라고 표현할 수 있는 상태다.

이거예요.

 

그걸 한번 확실하게 체득을 하면, 그게 깨어나면

우리들의 본성이, 그 무아 상태가 깨어나면

그게 주도하는 삶을

저절로 본성이 인도하는 삶.

 

그 본성을 기독교에서는 성령이라고 해요.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성령이 인도하는 삶을 저절로 살게 된다.

그러려면 성령이 깨어 있는 그 상태를

내가 확인을 해서 성령이 깨어나야 되잖아요.

 

지금은 에고가 주도하는 삶이에요.

이걸 바꾸는 것이 지금 우리의 공부다.

지금 상황은 이해되죠?

 

제가 이런 말을 던져 놓으면

여러분이 하시면서

언젠가 그 상태에 오면 딱 계합이 돼요.

지금은 아직 그 상태에 안 왔기 때문에 계속 들어둘 수밖에 없어.

 

계속 듣다가, 듣다가, 듣다가

여러분께서 성숙해져서 그 상태에 오면

그게 탁 자기한테 일어나요.

 

공부의 과정이

거친 번뇌를 제거하고

그다음에 미세 번뇌를 제거하는 건데

거친 번뇌는 세간의 욕망이고

미세 번뇌는 진리에 대한 욕망이에요.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이게 진리다라고 붙잡게 된다.

근데 그 상태가 좀 익어 들어가면

이런 말을 듣고 탁 돌이킴이

, 내가 지금 진리에 대한, 집착을 하고 있네하고 돌아볼 때가 온다.

익어서 그때가 오기 때문에.

 

옛날에는 이런 말 잘 안 했죠?

이런 말 하는 이유는

한 분 두 분, 이 말귀 알아듣는

진리가 뭐라고 하는 것을 알아듣는 분들이 나오고 있어서

그런 분들 다음 공부는 이 진리를 놓는 거예요.

 

근데 어떻게 얻은 진리인데 이걸 어떻게 놓아?

그때가 이것도 단박에 못 놓아요.

세간에 대한 욕망도 강하지만, 진리에 대한 욕망도 강해요.

 

그래서 이런 말을 듣다가

, 정말 내가 그렇네하고 놓는 순간, 붕 뜨면서 안 떨어지고

그냥 그 자리가 극락으로 확 변해버리는

굉장히 맑은 세계로.

 

그러니까 되게 원오극근이나 대혜종고 이런 분들은

눈앞에 태양이 100개가 뜬 것처럼 밝다

이런 표현을 썼어요.

그러니까 가렸던 것들이 싹 걷히는 그런 느낌이 나요.

 

거칠게 쳐져 있는 커튼

커튼도 집에 보면 이중 커튼 아닌가요?

아예 빛이 안 들어오는 커튼이 있고, 또 얇은 커튼이 있잖아요.

커튼이 두 개다 이거예요.

두꺼운 커튼은 세간에 대한 욕망이라면

얇은 커튼은 출세간에 대한 욕망이에요.

양쪽을 다 내려놓는 것이 공부 과정이에요.

 

근데 하여튼 이런 말을 들어두면

듣다가 듣다가 세간에 대한 욕망을 좀 내려놓았을 때

자기도 모르게 또 출세간에 대한, 진리에 대한 집착이 있어요.

그것을 또 알아채서 내려놓는 날이 온다.

 

그때는 다 열리기 때문에

굉장히 좀 통쾌하고 맑다.

그래서 정말 산꼭대기에 푸른 하늘이 쫙 펼쳐져 있는 그런 느낌으로 살아간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