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도: 무심과 평상심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상태를 의미하며, 복을 구하는 사람도 중도로 가야 함을 설명합니다 [14:13].
- 센리큐와 다도: 센리큐의 다도를 무심의 입장에서 평상심을 실천하는 삶의 예시로 제시합니다 [32:27].
- 와비사비: 센리큐가 자신의 다도를 와비(무심)와 사비(평상심)라고 부른 것을 설명합니다 [38:34].
/미혹하여 문명일 때는 고통의 12연기가 펼쳐지지만
깨달아서 밝아지면 팔정도가 펼쳐진다./
이 말도 이해되죠?
무명이 명이 되는 게 정견이다.
정견이 되면 정사유, 정어, 정업 이런 식으로 쭉
정명, 정정진, 정정 이렇게 쭉 팔정도가 펼쳐진다.
팔정도를 줄이면 계정혜라고 해요.
계_ 모든 행동이 저절로 자연스러워지는 것
정_ 항상 나가대정이라고 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 선정 속에 사는 삶
혜_ 지혜, 항상 지혜를 쓰는 삶
그래서 공부인은, 적어도 바른 법을 만난 사람이라면
자기의 목표가 미래에 있지 않다, 이거예요.
항상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 미래에 있지 않다.
미래의 어떤 완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열반조차도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열반이 뭐냐?” 이러면 오히려 생사로 변해버린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본질 속에서 이렇게 현상이 펼쳐지고 있어요.
맞아요?
본질 속에서 현상이 펼쳐지고 있어요.
그러면 본질은 본래 청정하고, 나가대정 상태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탈이 없어요, 본질 자체에는.
근데 우리는 본질 자체에 집착하면
다시 법신이 변사가 돼 버리니까
그거에 집착하면 안 돼.
결국에는 이 현상에서 잘살자는 거예요, 오케이?
그러면 현상에서 잘 살면
현상을 잘 사는 방법이
무심, 평상심이다, 이거예요.
그전에는 유심, 특별심이에요, 비교하면.
우리가 이 공부를 만나기 전에는 유심이고
이상을 가지고 막 실천하려고 애쓰는 마음이 있는 상태, 유심이고
그것이 특별심을 계속 추구하는
일상에서, 현상에서 특별한 걸 추구하게 되는.
유심과 특별심으로 살았다면
공부가 되면 본질을 발견하면
본질은 무심이에요.
무심은 생각이 없는 거예요. 분별심이 없는 거예요.
‘분별심이 없다’가 무심이에요.
무심의 정의_ 분별심이 없는 상태
그게 무심이에요.
무심에서는 분별심이 없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대응하는 지혜가 생겨.
유심으로 프리즘이 직선이 왜곡되잖아요.
유심은 왜곡되는데, 무심은 왜곡이 안 돼.
그래서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그대로 보면 지혜가 나오게 돼 있어요, 지혜와 자비가.
본질은 완벽하기 때문에 손댈 필요가 없어.
근데 그렇게 되면 내 마음이 비어요.
분별심이 없어서 마음이 텅 비어져 버려.
그럼 무심 상태에서 이 현상을 보고 살아가는 것이 평상심의 지혜다.
이 말은 이해되잖아요.
자 그러면 저절로 지혜가 생긴다, 이 말 이해돼요?
지혜가 생기고
그리고 “이 현상에서 어떻게 살아야겠구나” 하는 그 길이 보여요.
그럼, 그것이 저절로 복혜(福慧)
복혜의 양족존 그래요.
부처님을 양 두 군데가 모두 다 양족, 만족하신 분이다.
하나는 현상에서의 복
그리고 본질에서의 지혜
현상과 본질이
현상에서의 복과 그리고 본질에서의 지혜
이것이 완벽하게 구족되는 분이다.
저 같은 경우는 나이 마흔 전후에 존재가 불만족스러웠어요.
존재 자체가 불만족스러웠어.
근데 무심과 평상심에 합쳐서 중도라고 하는데 중도에 통달하면
본질은 본질대로 만족하고
현상은 현상대로, 이 모양 이대로 만족해서
그래서 복이 쌓여가.
그렇게 되면, 내 마음에서 불만족이 없으면
투덜대지 않겠죠.
그러면 그 식이, 나의 정보가
투덜대지 않고 매사에 “감사합니다” 하는 식으로
매사에 새롭고, 만족스럽고, 저절로 감사합니다가 생기겠죠.
식이 그렇게 좋은 것으로 채워지면
명색이
희한한 거예요.
“감사합니다” 하면 감사할 일이 자꾸 생겨
“이놈의 세상” 그러면 자꾸 “이놈의 세상”이라고 욕할 일이 자꾸 생겨.
이게 하나의 이 원리예요.
그러니까 나의 식이
돼지 눈에서 부처 눈으로 바뀌면
있는 이대로 불세계가, 불국토가
이대로 펼쳐지는 거예요.
그래서 복(福)이라는 한자의 뜻이 이게 하늘이에요.
하늘에서 빛이 쏟아져, 보일 시(示), 하늘이 자기를 보여줘.
하늘에서는 빛이 은총이 쫙 쏟아지고
인간은 땅에서는 재물이 쌓여(畐), 재물이 쭉 쌓여 올라가,
내 마음이 하늘에
하늘이 본질이죠.
여러분 실제로 본질은 이 모든 걸 지금 주고 있지 않나요?
공짜로
완전히 무주상, 준다고 하는 그런 상을 내지도 않고
완전히 거저,
또 무연, 인연이 따로 있다. 없다...
나한테 친한 사람만 주고, 안 친한 사람한테는 안 주고 이런 게 아니라
완벽하게 본질은
모든 사람한테 평등하게 이 모든 걸 다 주고 있잖아요.
시를 하고 있어요, 보여주고 있어요.
본질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베풀고 있어.
그 모든 걸 베푸는 것 중에 핵심이 생명이에요.
그럼 생명이 뭐냐?
시간이에요.
그러니까 지금도 이 순간에도 새로운 생명이
이 찰나 간에 현재로 이렇게 드러나고 있어.
시간이 주어지고 있어.
그래서 시간을 프레젠트라고 해요.
현재를 프레젠트, 선물이라고
같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계속 본질은 우리에게 프리젠트 해 주고 있어
현재를 선물해 주고 있어요.
이거를 지금 눈이 어두운 사람은 아침에 눈 뜨면서
오늘도 괴롭게 시작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눈 뜨자마자
모든 것이 새롭게 주어지는 선물같이 느껴져서
어떻게 쓸까, 설레는 사람.
그 사람한테는 계속 좋은 일이, 계속 복이 계속 쌓이고
불평한 사람은 계속 불평할 일이 계속 쌓이고
이게 하나의 법칙인 거예요, 원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내 눈을 바꾸는 게 중요하다.
돼지 눈에는 계속 돼지 세상이 펼쳐지게 되어 있고
부처 눈에는 모든 게 다 부처의 불국토가 되는 거죠.
어떤 것이 지금 있는 이대로 이것이
눈앞에 있는 이것이.
하여튼 그 본질과 현상에서 모두가 다 구족하게 되는 그 원리가
무심과 평상심의 중도를 터득하고 실천하는 데 달려 있다.
복을 구하는 사람도
중도로 가야 돼요.
중도로 안 가고 복을 구한다, 이러면
원리 원리에 어긋나지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복을 구하는 것도 중요해요.
솔직히 이야기해서 우리가 현장에서의 복도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야 나도 좋고, 남도 도와줄 수 있는 힘이 생기잖아요.
/우리 참선하는 선의 향상일로(向上一路)
즉 본질로 향하는 길이/
본질조차도 놓아야지
정말로 본질을 현상 속에서 구현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향상일로라고 해요.
우리 공부는 향상일로를 걸어야 돼요.
자기도 모르게 집착하니까.
본질을 깨달아도 또 거기에 집착하니까.
끝없이 놓아야 돼요. 끝없이 놓는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모든 위대한 예술적 영감은
무심에서 나온다는 것을
실제 동서양의 수많은 고전작품들이 증명해 주고 있다./
따라서 예술적 영감이 평상심이에요.
상황 이해되죠?
우리는 무심으로서만 살 수는 없어요.
몸을 가지고 이 현상을 살아가니까
영감 자체가 평상심이라는 거죠.
다시 말하면 우리 공부는 뭐예요?
눈에 보이는 것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진실을 체험하는 거잖아요.
드리고 싶은 말씀이 뭐냐 하면
무심은 그 사람이 무심의 경지를 다른 사람은 모르잖아요.
물론 그 사람이 되게 편안해
무심인 사람은 되게 편안해서
그 옆에 가면 그냥 같이 편안해지니까 그런 효과는 있어요.
근데 구체적으로 이 현실에서
무심이라고 하는 그거를 드러내는 것
깨달음의 사회화, 대중화, 그 실천의 문제
그 문제가 이 지금 문제의식이에요.
그러니까 중도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이 깨달음으로 머물면 안 되고
지금 ‘산은 산이 아니다’라고 하는 이 법신의 경지에서 머무르면 안 되고
완전히 다시 보통 사람으로 돌아 나와서
개체로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의 문제
여기가 한번 터야 돼요.
그러려면 이 사회에 도움이 돼야 되잖아요, 이 공부가.
일요일 날 문화 활동을 여기서 해요.
그래서 최근에 <리큐에게 물어라>고 하는
리큐가 누구냐면
센 리큐라고 하는 사람은 일본 다도의 완성자예요.
그러니까 도가 평상심이 되는 것이
차를 통해서 도가 드러나면 다 ‘도’가 돼요.
붓글씨를 통해서 드러나면 ‘서도’가 되고
일본같이 검의 문화가 있는 데는 검이 도가 되면 ‘검도’가 되고
활쏘기가 도가 되면 ‘궁도’가 되고,
그러니까 일본은 교토는
모든 것을 도로 통일한 그 문화를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선불교 하는 사람들이
타산지석으로
한번 그 일본 교토 문화가
완전히 선불교를 평상심을 표현해 놓은 거예요.
한마디로 말해서.
그래서 <리큐에게 물어라> 해서
리큐 때 단순한 다가 다 도가 되거든요.
우리 한국으로 치면 서예 그러잖아요.
우리한테는 서예, 기예라고, 예술이라고요.
근데 일본에는 서도라고요.
그러니까 그 차이가
교토는 우리는
유교를 기반으로 조선시대를 기반으로 해서 서도라고 안 하고 ‘서예’라고 한다고
그런데 일본은 이 선불교를 기반으로 문화가 형성됐기 때문에 ‘도’라고 불러요.
그래서 다도를 확립한 사람이 센 리큐라는 사람이고
그 영화는 센 리큐의 일생을 한번 쭉 한 거예요.
그걸 보면서 제가 느낀 게 뭐냐 하면
우리의 이 깨달음 공부가
현실에서 드러날 때
센 리큐 이 시대에는 문제의식이 전국시대예요.
그래서 일본 역사상 가장 혼란했던 100년.
전국시대가 무슨 말이냐 하면
일본이 수백 개의 지방으로 나뉘어서 서로 전쟁했던 시대예요.
통일이 되지 못하고
각자가 나름대로 지방의 영주들이 각자가 독립해서
중앙이 무너지고
그런 바람에
모든 영주들이 서로 원수가 돼서 싸우던
그걸 100년 동안 했어요.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오냐 하면
서로 영주끼리 서로 땅땅 먹기를 하다가
부모를 잃은 거예요.
이쪽에서는 아버지가 죽고, 이쪽에서는 어머니가 죽고
이쪽에 삼촌이 죽고, 이쪽에 또 누가 죽고 해서
완전히 원수지간이 돼버린.
100년간의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모든 영주들이 서로 간에 원수가 된 시대
그것의 절정기예요.
그 절정기의 전국시대를 통일하는 기틀, 처음으로 통일하는 기운을 만든 사람이
오다 노부나가라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오다 노부나가의 후원을 받는 다인이었어요, 센 리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라고 하는 사람이
통일할 때까지
이런 격변기의 시대를 살다 간 이 센 리큐가
이 센 리큐는 참선한 사람이에요.
다시 말하면 무심의 입장에서 평상심을 그때마다 쓰고 살아가는 삶
이게 지금 중도의 삶이다.
이거를 이 센 리큐가 터득하고
그리고 자기 깨달음을 드러내는 그 공간은
초가집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초가집, 그게 센 리큐의 다도의 핵심이에요.
그럼 왜 초가집을 지었는가?
다다미 두 장짜리예요. 실내 공간이 초가집이고
그 실내 공간이 다다미 2장,
다다미 2장이면 되게 좁죠. 집이 얼마나 작아요
근데 일부러 그런 곳에서 차를 마셨다는 거예요.
다도를 했다.
왜냐?
그 당시의 시대 정신은 원한을 푸는 거예요.
그러면 센 리큐가 다도를 할 때 목적이
원한을 쥔 두 영주를 초청을 하는 거예요.
근데 거기 보면 문이 요만해요, 높이가.
요만해서 기어 들어가야 돼.
왕이건 천민이건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기어 들어가야 돼.
그리고 들어가면서 이 칼이 막혀요.
그래서 칼은 밖에다 놓아야 돼.
그러면 보세요.
다다미 두 장짜리에 초청하는 센 리큐가 있고
그리고 다이묘 영주 두 사람이
문이 두 군데예요.
다 낮아.
밖에 칼은 걸어놓고 들어와서, 딱 들어와서 보니까 원수네.
생각해 보세요.
철천지원수, 우리 어머니 죽인 원수
이쪽에서는 우리 어머니 죽이고, 이쪽에는 우리 아버지 죽였고
그 원수를 딱 만나는 거예요.
그러면 원한은 있는데 가까이 앉았다.
그 차는 나온다.
나눠 마셔야 한다.
말은 못한다.
여러분 상황을 보세요.
한 두세 시간을 차 마시고 간식먹고, 차 마시고 간식 먹고
우리로 치면 차곡차곡 하니까
한국인들은 차곡하니까
차 마시다가 국주도 한잔
차곡차곡을 한 3시간 한다.
근데 말은 못한다.
근데 뜻밖에도 원수가 앞에 앉아 있다.
칼은 없다.
그러면 제가 말하는 아이스가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해보면 알지만
아이스라고 하는 것은
요즘 젊은이들 말로 하면
갑분싸_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는 거.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대화가 뚝 끊겼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다.
생각 입장에서는 막 튀어 나가야 되는데
생각이 대화로 막 나가야 되는데
이걸 갑자기 끊어졌다.
그럼 생각은 안에서 요동을 친다. 그 에너지가 느껴지잖아요.
그럼 그걸 젊은이들이 아이스라고 불러요.
갑분싸가 되어서.
보세요.
두 사람이 초대를 받아서 근사한 자리에
하여튼 아주 중요한 당대의 가장 최고 문화라고 하는
다도 자리에 초대를 받아서 갔는데
들어가니까 원수를 딱 만났다.
그러면 갑분싸가 되죠.
일반인들이 대화 끊어지는 거 하고는 게임이 안 될 정도로
안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겠죠.
끓어오르는데 말은 할 수도 없고, 칼도 놓고 들어왔고
공간은 지금 60cm밖에 안 되고.
그 상태에서 처음에는 막 온갖 감정이 요동칠 거 아니에요, 이해되나요?
그런데 제3자가 딱 누르고 있어.
제3자가 태평하게 앉아서 차를 타면서
이 모든 분위기를 딱 주도하는데
거기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자기를, 이렇게 볼 거 아니에요.
그러다가 이게 요동치다가 요동치다가 아이스 상태가 익어지면
생각은 힘이 없어지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무심하게 가라앉는.
한 3시간 하면 가라앉는 거 이해되세요?
그 시간 동안에 쭉 가라앉아서
두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이심전심으로 뭔가가 풀려나가는
그런 경험을 한다, 이거예요.
그래서 다도는 영주끼리 한 거예요, 원래는.
일반인들이 한 게 아니고.
근데 그게 일반인들도 원수 많죠.
일반인들도 나중에 했지만
처음에는 목적이 타깃이 그거였다고요.
그렇게 해서 한 명 한 명 원수끼리 이렇게 붙여서
아이스 상태에서 견디게 만들기.
완전 참선 아닌가요?
완전히 이게 참전이에요.
그러면 결국에는 가라앉으면 무심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러면서 어느 소통이 벌어지고.
그러니까 그런 걸 통해서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그 작업을 했어요, 다인들이.
그러니까 참선한 사람들이 참선에서 안 끝나고
시대적인 소명을 자각하고
그걸 푸는 방법을
참선을 적용시킨 게 다도다. 이거예요.
지금 무신 평상심을 우리가 공부하면서
다도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탄생했기 때문에
“아, 이게 만만한 게 아니구나.”
우리들도 이 공부가 단순한 공부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자기를 바꾸고 주변을 바꿔 나가는
이런 실천의 세계로 넓어져야 되죠.
여러분 말없이 차만 마셔도
그래서 그거를 마지막으로 이 센 리큐가
와비사비라고 불렀어요.
자기의 다도를 와비사비라고 부르고
사람들이 이걸 기억 못할까 봐 줄여가지고 와사비라고 불렀어.
그래서 음식 이름을, 그 고추냉이를 ‘와사비’라고 부르는 것은
다인들이 만든 거예요.
이걸 기억시키려고.
얼마나 지금 철저히 해요.
그리고 와비사비가 뭐냐?
와비는 무심
사비는 평상심
무심, 평상심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초과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히데요시가 권력을 쥐면서
모든 돈을, 금을 끌어모은 거예요.
그래서 금으로 황금 다실을 짓고
모든 도구를 금으로 만들고
그렇게 해서 화려함을 추구하는 히데요시와
이 와비사비를 지키기 위해서 무심
그러니까 히데요시의 철학은 유심이고
유심의 극을 달리는 그런 권력자의 철학과 미학과
무심, 평상심을 지켜야 하는 이 센 리큐의 참선을 기본으로 하는
이 사람의 이 미학이 충돌해서
결국은 권력자가 자결시키죠, 센 리큐를.
그래서 지금 우리가 공부하는 무심, 평상심이라고 하는 이 가치가
실질적으로 이 센 리큐가 자기 목숨 걸고 지켜낸 가치고
그게 지금 일본인들한테는
하나의 기본적인 생활에 진선미가 하나 된
그런 양식으로 내려와서
다도는 그냥 차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옷 입는 거, 청소하는 거, 설거지하는 거, 음식 만드는 거
차를 끓여내는 거, 숯불을 다루는 거,
모든 것을 다 배운 것이라서
다도라고 하는 것은 그걸 통해서 결국에는 무심, 평상심을 배우는 거잖아요.
이 다도라는 것은 단순한 그런 게 아니라
이 정신문화를 바탕으로 까는 작업이었다.
하여튼 우리 공부하면서 타산지석이에요.
이렇게 실력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어떤 의미로 우리가 지금 참선 공부하는 게
그냥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실력 있는 국민이 되기 위한 아주 지름길이에요.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의 공부를 지금 함께 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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