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없구나’라는 것도 일어난 분별이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없어
그러니까 컵이 없어
불교에서 말하는 거는
내가 없다
있다라는 데서 없다라는 어떤 규정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사실 불교에서 없을 무를 많이 쓰는 이유는
우리가 유라고 여기기 때문에 무를 쓰는 거거든요.
왜냐하면 그거에 집착돼 있기 때문에
그 집착을 풀어내기 위해서
무, 부정하는 언어를 쓰는데
그걸 방편어라고 해요.
근데 보통 사람들, 분별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무아, 구경무아가 불교야”라고 딱 규정지어버리는데
이런 사람은 뭐냐?
이것 역시 분별이라는 거를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마지막까지 우리 공부에 장애가 되는 건
이런 식의 관념이거든요. 생각.
‘있지 않다’라는 의미에서 무를 얘기하는 것이지
무를 규정하는 게 불교가 아니라는 거예요.
있지 않음이야 그냥, 있지 않음.
있지 않음이 곧 없음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없음에 대한 규정이 아닌 거예요.
있다는 그 망상을 부수는 거예요.
있다는 망상을 부수는 것이지
우리는 분별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어떻게 돼?
‘있지 않다’라고 하면 ‘없다’라고 또 규정이 지어버리거든요.
그게 불교에서 말한 양변
있다는 변에서 거기에 빠져 있다가
없다는 변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근데 불교는 뭐냐?
있다라는 것도 분별이고 없다라는 것도 분별이라는 거예요.
그 분별이 지금 있다 없다
이렇게 일어나고 있는 거라 .
있다 하든 없다 하든.
아무것도 규정되지 않은 여기에서
지금 있다, 없다, 컵이다, 컵이 아니다.
그래서 양변에서 벗어나는 것을
불이라고 하거든요. 불이.
있다 없다
있지 않아,
무아라고 하니까 ‘무아구나’ 이렇게 잡으면 안 돼.
무아라는 것도 분별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있다’와 ‘내가 없다’가 사실은 똑같은 분별인 거예요.
그래서 ‘내가 없다’ ‘내가 있다’
진짜 불교에서 가르키고자 하는 건
“있다 없다 이러고 있잖아 니가 지금
분별을 하고 있잖아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 분별을 하고 있잖아요.”
말하자면 모든 분별의 가능태라고 해야 되나요?
근데 뭐라곤 할 수 없어요.
근데 자기 경험을 돌아보면
있다 없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자꾸 자기가 이 자유로운 공간에서
온갖 분별을 하고 있는데
중생은 뭐냐?
모양 따라 그냥 ‘있다’에 갇혀버리는 거예요.
있다에 갇혀버리는 거야.
그냥 있는 줄 알아버리는 거예요.
그게 바로 존재화시키고 있다라는 거죠, 분별이.
그러면 공부가 좀 된 사람은 어떻게 해요?
‘없어’ 그런다고
또 없는 데 갇혀버리는 거야.
공에 갇혀버린다고.
근데 진정한 불교는요, 어떤 규정이 아니에요
그 분별 이전 여기에서
있다 없다,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산다 죽는다
그 모든 이 현상 세계를 다 드러내고 있는 것이
진정한 우리가 그 깨달아야 될 자기의 본래면목이거든요.
그게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이 평등성, 이 일여한 데서 모든 분별을 쓰고 있다라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지
있는 것에서 벗어나서
없는 거, 무아에 갇히는 게 불교 아니다.
그래서 불교는 뭐냐?
무아도 아니고 유아도 아니에요. 사실은.
근데 금강경은
그런 면에서 보면은
사실 가르침의 언어라는 거는 그럴 수밖에 없어요.
언어가 현상이기 때문에.
금강경도
이거는 진짜 금강경이 아니라
구경 무아
구경에는 무아도 없는 게 진짜 구경인 것이죠.
끝내, 내 없음이라는 그런 규정조차도 없는 게
진정한 구경인 것이죠.
그래서 이 지점에서 선이 나오는 거예요. 선이.
그러니까 교와 선이 갈리는 지점이 이거예요.
유마경에서도
교와 선이 만나는 지점이 뭐냐면
유마의 침묵이거든요.
다 문수까지 다 말해도
말할 수 없고, 입을 열어서 할 수 없다
다 얘기를 해.
근데 그건 언어잖아요.
근데 유마는
“당신은 불이법이 뭡니까?” 그러니까
침묵하는 거야.
근데 여기서 잘못 알아버리면 어떻게 해?
‘침묵이 바로 도구나’라고 알아버리면
그게 바로 현상에 떨어진 것이에요.
진짜 유마의 침묵은 뭐냐?
이거예요.
있다도 아니고 없다도 아니야.
근데 있다도 하고 있고 없다도 하고 있는 이거라.
그게 진정한 유마의 침묵이고
그걸 깨달아야지 진짜 불교를 깨닫는 거예요.
그게 바로 자기 자신의 본래면목이거든요.
이게 드러나지 않고는 그건 불교라고 할 수가 없어요.
이걸 깨치지 않고는.
깨닫지 않고는.
그게 뭐냐?
지금 있다 없다, 컵이다.
아니면 나다
아니면 컵도 아니다, 나도 아니다 하고 있는
이 한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
이 바탕이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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