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32. 세상을 살아가는 가르침

Buddhastudy 2018. 10. 10. 20:36


안녕하세요. 오늘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되느냐? 여기에 대해서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다 이 세상을 버리고 출가해라. 이렇게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래서 이 세상은 하잘 것 없고 보잘 것 없는 일이다. 그저 버릴 대상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출가를 하든지, 아니면 이 세상에 살 때는 불교적인 어떤 가치, 이런 것들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출가하는 것은 불교적 가치지만 세상에 살 때는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이런 거에 대한 지침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다. 이 말이오.

 

부처님 당시에 한 부잣집에 외동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외아들이기 때문에 너무 애지중지 키워서 이 아이가 한마디로 버릇이 없어졌어요. 부모말도 잘 안 듣고, 제 맘대로 하고. 그래서 부모는 아들이 걱정이 되어서 좋은 스승을 모셔서 아들 공부하도록 이렇게 돌봐줬는데도 이 아이는 스승이 가르친 것을 배우지도 않고, 한마디로 말해서 예습도 안하고, 복습도 안하고, 수업도 제대로 안 듣고 이렇게 말썽을 피우면서 세월이 흘러도 아무것도 배운 게 없어진 거요.

 

그래서 부모는 이 아이가 공부에는 소질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아예 살림을 내줬어요. 요즘으로 말하면 사업을 차려줬다. 이런 얘기에요. ‘너는 공부에 소질이 없으니까 그러면 사업이나 한번 해봐라.’ 이래서 부모가 사업장을 차려준 거요.

 

그런데 이 아들은 그 사업마저도 제대로 안 하는 거요. 게을러빠져서 도무지 일은 하지 않고, 거기다가 방탕해서 술 먹고 노래하고 춤추고 이렇게 해서 얼마 안 가서 차려준 살림을 다 날려버렸어요.

 

이렇게 해놓고는 자기의 잘못은 뉘우치고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부모를 원망하는 거요.

부모가 나를 잘못 낳아서, 부모가 나를 잘못 키워서 나는 하는 일 마다 되는 것도 없다.’ 이렇게 불평불만하고, 나아가서는 조상까지 원망하는 거요.

우리 조상이 과거생에 뭐 잘못한 게 있는데, 그 과보를 내가 받아서 내가 지금 이 생에 이 고생이라고. 이렇게 해서 도리어 인생을 비관하고, 자포자기 하고, 이렇게 되는 거요.

 

그러다가 이 젊은이가 이렇게 살 바에야 차리라 출가해서 스님이 되어서 부처님 밑에 가서 수행하는 게 낫겠다. 부처님한테 복을 빌면 좋은 일이라도 안 생기겠냐. 이렇게 생각한 거요. 그러니까 이 사람은 어리석어서 부처님의 법 같은 것은 알지를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버리고 출가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걸 보고 이 사람도 세상에 실패하니까 세상을 떠나버리자. 죽어버릴 수는 없고, 그죠? 산목숨을 끊을 수가 없으니까.

 

이렇게 해서 세상을 떠나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야 되겠다. 이렇게 부처님께 찾아갔습니다. 

부처님이 왜 출가했냐?” 하고 물어봤어요. 출가하러 온 사람에게 왜 출가하려고 그러냐?” 이유를 물어봤더니 출가하려고 하는 이유가

세상에서 온갖 것이 다 실패하고, 되는 것도 없고, 그래서 세상을 원망하면서 오히려 세상을 하직하고 와서 부처님 밑에서 공부하면서 복을 빌면 큰 복을 받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해서 왔다는 거요.

 

왜 그러냐하면 자기가 보니까 세상에서 똑똑한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 이런 사람도 많은 재산도 버리고, 왕위도 버리고, 아름다움도 버리고, 똑똑함도 버리고 출가하는 거 보니까 얼마나 좋은 게 있길래 저렇게 하나? 나는 실패했으니까 당연히 저기 가서 큰 복을 받아야 되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부처님한테 찾아온 거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행실이 청정해야 된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깨끗해야 된다. 너처럼 그렇게 행실이 청정하지 못하고 악행을 일삼고 그러면서 머리 깎고 스님이 되어서 공부한다 한들 아무런 얻는 바가 없다.

그러니 너는 집으로 돌아가거라.

 

이렇게 도리어 집으로 돌려보내버렸어요. 그러니까 출가하겠다고 찾아왔는데 출가하는 이유를 가만히 들으시더니 너는 집으로 돌아감이 좋겠다.” 그럼 집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기에 대해서 부처님이 말씀을 해주셨어요.

 

첫째, 부모에게 효도를 해라.

너를 낳아주고, 너를 키워주고, 너를 가르쳐 준 부모를 고맙게 생각하고, 공경하고, 은혜를 갚아라. 이렇게 얘기 했어요.

 

두 번째, 스승에게 잘 배워라.

그래서 스승을 공경해라.

 

세 번째, 너의 직업, 생업에 충실해라.

만약에 장사를 한다면 값싼 물건을 사오고, 소비자에게 좋은 값으로 주고, 품질에 대해서 보장을 해주고, 그래서 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용을 얻어야 된다. 생업에 종사할 때는.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어야 된다.

 

네 번째, 세상을 살아가려면 예의가 있어야 된다.

윗사람에 대해서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나, 여자에 대해서나, 남자에 대해서나 예의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세상에 살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 그 사람 정직하다.’ ‘그 사람 참 훌륭하다.’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다.’

이렇게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그런 사람이 되어야 되겠다라고 흠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저런 사람하고 같이 지냈으면 좋겠다.’ ‘친구하고 싶다.’

이런 사람이 먼저 되라.

 

그러니 세상살이도 못해서 쉽게 얘기하면 부부간에 못 살아서 싸우고, 집 나가고, 이혼을 하고, 사업하다 실패하거나, 연애하다 실패하거나 이렇게 세상을 실패를 해서 세상을 더럽다 하고, 세상을 원망을 하고, 이렇게 들어오면 그것은 출가해서 공부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는 거요.

 

그러니 먼저 돌아가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을 공경하고, 생업에 충실하고, 예의범절을 갖추고 살아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존경받는 사람이 먼저 되라는 거요.

그러면서 부처님께서 이렇게 게송을 읊으셨어요.

 

글을 읽지 않음은 말의 때이고

부지런하지 않는 몸은 집안의 때이며

단정하지 않으면 몸의 때이고

방일함은 일의 때이니라.

 

그러니까 글을 읽지 않고 즉,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은 말, 이 말에 허물이 있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부지런하지 않는 몸은 집안의 때다. 그리고 단정하지 않는 것은 몸의 때이고, 방일함은 즉, 게으름은 일의 때다.

 

인색하면 보시의 때이고

착하지 않으면 행실의 때이니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나쁜 법은 언제나 때가 된다.

 

때 중에 가장 큰 때는

어리석음보다 심한 것은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제일 큰 허물, 때는 

몸에 붙은 그런 때가 아니고 어리석음의 때가 가장 크다.

 

공부하는 사람은 마땅히 이것을 버려야 하나니 비구들은 부디 그 때를 없애라.

그러니까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지혜를 증득해야 한다. 이런 얘기가 되겠죠.

이렇게 해서 말을 청정히 하고, 몸을 깨끗이 하고, 부지런하고, 예의범절을 갖추고, 정직하고, 이런 사람이 먼저 되라는 거요.

 

그래서 이 젊은이는 크게 뉘우치고 깨닫고 그렇게 하고는 집으로 돌아왔어요.

이렇게 돌아와서는 부처님 가르침대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스승을 공경하고, 생업에 충실하고, 예의범절을 갖추고 이렇게 사니까 개과천선한 거 아니오. 완전히 사람이 바뀌어 버렸어. 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그 사람을 비난하던 사람이 결국은 칭찬을 하게 되고,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던 사람들이 오히려 흠모를 하게 되고, 이렇게 해서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 그때 이 사람이 부처님을 찾아간 거요. 그리고는 출가하기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쾌히 승락을 하셨다.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는 법을 일러주고 이 비구는 단박에 부처님 말씀을 듣고 깨쳐서 아라한도를 증득했다.

 

그러니 이 세상에 실패해서, 세상을 원망하고,

한을 가지고 눈물을 머금으면서

이렇게 절에 들어와서 법을 공부하겠다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얘깁니다.

꼭 세상에 성공한 뒤에 와야 되느냐? 그런 뜻은 아니에요.

 

연애를 하다 실패를 했다하더라도

그 연애의 무상함을 이별의 그 깊은 이치를 깨치게 되면

도를 증득하는 지름길이 되고,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했을 때 재물의 무상을 깨우치게 되면

그것이 오히려 도에 이르는 길이 된다.

높은 지위에 있다가 떨어져서 그 지위가 허망함을 깨닫게 되면

이건 도에 들어오는 길이 된다.

 

그러니까 여인이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아들을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을 때, 부처님이 아들을 살려줘서 그 여인의 슬픔을 없앤 게 아니다.

태어난 것은 다 죽게 마련이라는

이 법의 이치를 깨닫게 해서

그 여인을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는 거요.

 

그러니까 어떤 이유로 불법에 들어오든지 그것은 자유다.

그걸 탓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법을 전하는 사람은

그 고를 없애는 길은 욕망의 충족이 아니고

그 어리석음이 그 욕망 자체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줘서

해탈케 해줘야 되는 거요.

 

그런데 이런 갖가지 세상의 재앙이 도리어 수행의 길로 가는 좋은 인도자가 되기도 하지마는 이런 것에 좌절하고 절망해서 세상을 미워하고 그러면서 하직하고 절에 들어오게 되면 수행에 장애가 된다는 거요. 수행에 도움이 안 되고.

 

이렇게 세상에 한을 갖고 있으면 어떻게 되느냐? 아름다운 여인이나 멋있는 남자하고 연애에 실패한 사람은 그 여인보다 그 남자보다 더 멋있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면 결국은 이성적인 애욕에 빠지게 되고, 돈벌이에 실패해서 들어온 사람은 더 큰 돈을 벌 기회가 있게 되면 출가한 승려로서 돈에 집착하게 되고, 지위에 대한 좌절과 절망을 갖고 들어온 사람은 승려가 된 뒤에도 높은 지위를 탐하게 되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출가한 뒤에는

오직 법을 구하고, 자기의 번뇌를 여의고,

이 좋은 법을 세상에 널리 전해서 고통 받는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그런 원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고,

 

이 젊은이처럼 이렇게 출가하게 되면 결국은 출가한 스님이 된 뒤에도

먹는 것 갖고 시비하고, 자는 것 갖고 시비하고, 입는 옷 갖고 집착하고, 절집 안에 들어와서도 재물에 집착하고, 지위에 집착하고, 명예에 집착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어떤 자리에 가도 앞자리에 앉았냐? 안 앉았냐? 앞자리에 나를 앉혀줬느냐? 안 앉혀줬느냐? 자기를 칭찬했느냐? 안 했느냐?

뭐 이런 것으로 늘 말썽이 되는 거요.

 

우리는 여기서 높은 자리 낮은 자리를 따지려고 들어온 게 아니에요. 그래서 부처님이 높은 자리에 앉지마라. 이런 계율도 있지 않습니까.

 

이런 세속적인 것들, 비록 출가했다고 모양은 이루어져 있지마는

이런 세속적인 것들이 없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출가할 때 이 진실한 인간이 된 뒤에 해야 된다는 거요.

 

그러니까 수행자가 되기 전에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되요.

 

그런데 오늘 날 가끔은 보통사람 수준도 안 되는 출가자들도 있지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런 것에 실망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그걸 보고 또 스님들은 다 저렇다.’ 이렇게 생각해도 안 된다. 이 말이오. 부처님 당시에도 이렇게 이런 사람들이 출가를 하겠다는 사람이 있었잖아요. 부처님은 지혜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을 고쳐서, 이런 사람을 배척한 게 아니고, 이런 사람을 고쳐서 훌륭한 수행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런 사람을 고쳐서 출가를 허락하고 수행자가 되게 하는 게 아니고, 이런 사람을 그냥 받아들이기 때문에

, 인물 잘 생겼느냐, 대학 좋은데 나왔느냐, 이런 세속적인 기준을 갖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리고 어떻게 진실하게 마음을 깨우쳤느냐를 중심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여러 말썽들이 생겨나게 된다.

 

물론 이것은 꼭 오늘의 교단의 잘못이다. 이렇게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업이다. 개인의 업을 넘어선 우리들의 동업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바로 이조 500년 동안 불교가 탄압을 받으면서 불교가 세상 사람으로부터 천하게 규정을 받고, 천하게 여김을 받고, 그래서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세상을 떠나 깊은 산속에 숨어야 됩니다. 길거리에 승려가 다니면 침을 뱉고, 욕을 하고, 짐승취급을 하기 때문에. 그런 속에서 위축이 되고, 그런 속에서 움츠려들고, 이렇게 하다보니까 세상을 하직하는 게 마치 출가수행인 것처럼 잘못 알게 되었다.

 

출가수행은 세상을 하직하는 게 있기는 있어야 됩니다.

뭐로부터 하직이어야 됩니까?

욕심으로부터 하직해야 됩니다. 탐욕을 하직해야 된다.또 어떤 것을 하직해야 됩니까?

내 주장이 옳다라고 하는 이것으로부터 하직을 해야 됩니다.

교만으로부터 하직을 해야 돼.

비굴로부터 하직을 해야 돼.

어리석음을 하직해야 돼.

명예와 권력 이런 것과는 하직을 해야 돼.

그런 것은 완전히 버려야 돼.

 

그런데 이런 걸 하직하는 게 아니고,

그저 세상을 원망하고 세상을 더럽다고 여기고,

세상을 외면하는 식으로 하직을 하기 때문에

욕하면서도 마음속에서는 그리움이 있는 거요.

돈을 비난하면서도 돈 갖기를 원하고,

지위를 비난하면서도 지위를 얻기를 원하고,

이런 이중적인 심리현상이 오늘의 혼란을 불러오게 된다.

 

그러니 우리 불자들이 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알아야 된다. 세상에 살 때는 어떻게 살아야 된다고? 세상의 모범이 되도록 살아야 됩니다.

불자는 세상에 모범이 되도록 살아야 된다.

 

그러면 출가수행은 이 세상을 뛰어넘는 거요.

이 세상을 더럽다 여기는 게 아니고,

이 세상의 길로서는 해탈열반에 이르지 못한다. 완전한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천상을 뛰어넘어서 해탈이 있다.

윤회고를 벗어나는 거란 말이오.

 

그런데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사시는 분들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남을 돕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인간관계의 갈등이라든지,

이런 세상사로 머리가 아프고 괴롭고 죽겠다.

이런 거는 불자라면 뛰어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몸을 두고 있어도 불법에 귀의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 괴롭게 살면 안 됩니다.

 

그래서 몸을 세상에 둬도

유마거사 같은 분도 있고, 수닷타 장가 같은 분도 있고, 베사카 부인 같은 사람도 있었던 거요.

그러나 또 이 세상을 뛰어넘어서 출가수행의 길에 이른다면

우리는 교화를 하는, 또는 더 불법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 신라시대 스님들만 하더라도 왕을 가르치고, 나라의 스승이 되고, 사회를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가도록 하는데, 지도자적인 역할을 많이 했지 않습니까?

우리가 원광법사가 세속오계를 갖고 화랑들을 당시의 젊은이들을 지도하고, 자장율사나 원효대사나 의상스님 같은 분들이 다 나라가 어려울 때, 나라를 바르게 이끄는데 역할을 했다.

 

 

부처님은 이런 경우도 있었어요. 소먹이는 아이가 소치는 아이요. 천민이라는 얘기죠. 남의 집 소를 쳐주는 아이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너무너무 기뻤어. 그래서 출가하겠다고 왔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넌 뭐하는 아이냐?”

저는 소치는 아이입니다.”

그러면 소를 주인집에 돌려주고 오너라.”

 

그러니까 이 아이가

소는요, 놔두면 저절로 지가 알아서 주인집에 찾아갑니다. 그러니까 저는 바로 가겠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허락을 하지 않으셨어요.

저 소를 몰고 가서 주인에게 정확히 인수인계 해주고 오너라.”

 

또 반대도 있습니다. 법을 듣고 깨달아서

집에 가서 마누라에게 출가한다고 허락받고 오겠습니다.”

이럴 때는 부처님이 뭐라고 그럴까?

집으로 돌아감이 좋도다.” 이렇게 말해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내면에 아직도 뭔가 집착이 있었을 때는 그걸 즉시 놓게 합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어떤 신용의 문제는 자신의 사명을 다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이걸 꼭 우리가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