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어제는 아름다운 몸매를 뽐내는 사람. 그래서 교만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사람. 그리고 또 이성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괴로워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부처님께서는 이 몸이 부정함을 깨우쳐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했다.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이 반대되는 얘기도 있다는 거요.
오늘은 몸을 함부로 하는 사람에 대해서 부처님께서 주신 교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늙은 비구 즉, 나이 많은 비구스님 가운데 마하로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스님은 워낙 사람이 둔해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그 법문을 당시에는 노래로 불러서 게송으로 기억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부처님의 말씀을 문자로 기록해서 보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죠?
그러니까 한번 듣고 기억하지 못하면 다시는 그 법문을 알 수가 없단 말이오.
요즘에 책에 되어 있으니까 책으로 다시 보면 되고, 테이프로 되어 있으니까 다시 들으면 되지마는 당시에는 그런 문자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을 다 기억에 의존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기억을 하려니까 이렇게 저처럼 길게 얘기한 것은 다 기억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길게 말씀하시고 나서, 부처님은 반드시 그것을 요약해서 게송으로 만드셨어요. 기억하기 쉽게.
그러니까 이렇게 법문을 하는 것은 이해하기 쉽도록,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하시고, 그것을 딱 요약해서 기억에서 복습할 수 있도록 게송으로 만들어서 읊었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이 끝나면 대중들은 부처님께서 요약정리해준 그 게송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기억을 딱 하게 되는 거요.
그래서 지금도 남방불교에서는 경전을 다 암송하는 사람이 있어요.
부처님의 말씀인 경, 그리고 부처님의 실천지침인 율, 그리고 고승들의 경률에 대한 해석이나 요약서인 논, 이걸 합해서 경,률,론 3장이라고 그럽니다.
이 경.률.론 3장을 다 암송하는 사람을 삼장법사라고 그래요.
그 경.률.론 3장에 대해서 해박하면 삼장법사라 그러지만, 원래 옛날에는 경.륜.론 3장에 통달해 있다 하는 것은 이것을 다 암송하는 거요.
그러니까 문자가 없으면 인간의 기억력은 비상해집니다. 이 문자가 있으면 기억력이 감퇴하죠. 즉, 훈련을 받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이 비구는 기억력이 너무너무 없는 사람, 둔한 사람이라서, 이 게송을 백개 천개는 고사하고 한 개도 외울 수가 없는 거요.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수행자로서는 좌절감이 생길 거 아닙니까. 나같이 둔한 사람은 살아서 뭐하냐? 이거야.
그래서 보통 비구스님들은 공양을 받으면 즉, 걸식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공양접대를 받게 되면 반드시 법문을 한 자리 해줘야 됩니다. 그럴 때 길게 법문하는 게 아니라 부처님께서 설하신 게송을 그 공양을 올린 사람에게 답으로 법보시를 한단 말이오. 이렇게 주고받는데, 재보시를 받고 법보시를 하게 되는데. 이 비구는 게송 한 자리를 못 외우게 되니까, 공양을 받고도 해줄 수가 없는 거요.
그러니까 늘 대중들이 어디 가게 되면 나이는 들어도 상석에 앉을 수가 없는 거요. 저 말단에 앉아야 돼.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좀 바보취급을 받는 거요.
그래서 그 자신에 대해서 너무너무 실망을 해서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 이렇게 해서 나뭇가지에다가 밧줄을 매고는 목을 걸고 죽으려고 했어요.
‘이것을 부처님께서 신통으로 보시고’ 이렇게 되어 있는데. 부처님께서 아시고 이 비구를 불러서 나무랐습니다.
이 몸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지 이 몸을 그렇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이 비구가 자기 하소연을 하는 거요. 내가 이렇게 둔해서 살면 뭐하느냐는 거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이 비구에서 과거생의 얘기를 해줍니다.
자네는 과거부처님 시대에 태어나서 500제자를 두고 있을 만큼 그런 아주 지혜가 있고 총명한 그런 대중의 스승이었다는 거요.
그런데 자기의 지혜에 도취되어 너무너무 교만해서 사람들이 물으면 그것도 모르냐고 이렇게 비판만 하고 잘 안 가르쳐줬다는 거요.
그 과보로 이 생에 둔한 사람이 되어서 500명 수행자의 말단에 서게 되었다.
이런 얘기는 여러분들이
베풀지 않아도 과보로 나중에 가난해지지마는
이 법을 아는 자가 법을 베풀지 않아도
나중에 법을 들을 귀, 법을 이해하는 머리를 잃게 된다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전법을 많이 하는 것은
사람이 지혜로워지는 과보를 받을 수가 있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런 얘기를 부처님께서 해주시면서 이 몸을 잘 간수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읊으신 게송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만일 제 몸을 사랑하거든 삼가고 단속하여 제 몸을 지키고
법 깨닫기를 바라는 사람은 바른 법을 배우되 게을리 하지 말라.
먼저 제 몸을 제일로 삼아 언제나 스스로 힘써 배우고
남을 가르쳐 이롭게 하되 게을리 하지 않으면 지혜 얻으리.
먼저 제 자신 바로잡기를 배우고 그런 다음에 남을 바로잡아야 한다.
내 몸을 길들여 지혜에 들어가면 반드시 세상의 경지에 이르리라.
제 몸도 이롭게 하지 못하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랴.
마음을 길들이고 몸을 바로잡으면 어떤 소원도 이루게 되리.
원래 자신이 지은 업이기에 나중에 제 자신이 과보 받나니
악을 행하여 제 자신을 부수는 것.
금강석이 구슬을 부수는 것 같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정말로 법을 아끼고 사랑하는 자라면 제 몸도 아끼고 사랑한다.
왜? 이 몸이 있어야 수행 정진할 수가 있기 때문에.
남을 돕고자 하면서 제 몸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남을 도울 수도 없다.
먼저 제 몸을 잘 보살피는 것이 기초가 된다.
그러니까 신체장애가 있다고 비탄해서 이 몸을 버려도 안 되고,
경제가 곤궁하다고 해서 자살을 해도 안 되고,
몸에 병이 있다고 비탄해 빠져서 이 몸을 버려도 안 되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고 비탄에 빠져서 이 몸을 함부로 버려도 안 된다.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죽여서도도 안 된다는 불살생 계율은
자기 몸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
즉, 살생과 자살은
같이 살생으로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신자는
절대로 자살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다른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을 두들겨 패거나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제 몸을 죽여서는 안 된다.
즉, 자살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제 몸을 함부로 학대해서도 안 된다.
즉, 이 몸은 집착해서도 안 되고
이 몸을 학대해서도 안 된다.
이게 중도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이 몸을 학대하는 것보다는 이 몸에 집착하는 게 더 강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몸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되요.
10명 중에 9명은 몸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수행을 해야 되고, 그 다음에 10명 중에 한 명 정도는 몸에 대해서 비탄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다.
‘키가 작다. 얼굴이 못났나. 눈이나 어디에 장애가 있다. 몸이 약하다. 병이 있다.’
이런 식으로 몸에 대해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다.
또 ‘머리가 둔하다.’ 하는 이런 문제까지 포함했어.
그래서 이 몸을 함부로 하는 사람이 있다. 이 몸을 그냥 버리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바른 견해가 아니다.
그런데서 우리는 이 부처님 말씀을 정말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님의 말씀은 대부분이 다
이 몸에 집착하지 마라. 아름다움에도 집착하지 말고,
이런 얘기만 들으니까 불교는
이 몸을 아주 나쁘게 생각한다. 몸을 그냥 더럽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만 가르치는 줄 잘못알고 있다.
이것은 이 몸에 집착하기 때문에 그렇게 가르친 거다.
그러나 동시에 이렇게 오늘날처럼 우리 사회에서 자살이 많이 늘고, 이런데서 살생을 함부로 하고 이런데서 생명의 귀중함, 자기 몸에 귀중함을 일깨우는 이런 좋은 법문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죽여서도 안 되지마는,
또 거의 죽은 생명을 산소 호흡기를 꽂아놓고, 링거를 꽂아놓고 식물인간 상태로 오래 지속하는 것, 이것도 반생명적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생겨난 것은 다 사라지게 마련인 것을
그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아서 제 욕심대로 이렇게 하는 것도 반생명적이다.
그런데서 우리가 제행무상,
생겨난 것은 반드시 흩어지고 사라진다는 이 원리를 알아야 된다.
봄에 새잎이 돋고 여름에 무성한 나뭇잎도 가을이면 단풍이 들고 겨울이면 떨어져 낙엽이 됩니다.
그렇게 낙엽이 되는 것은 끝이 아니고
그것이 거름이 되고, 나무는 또 봄에 새로운 잎을 돋고 더 자라게 된다.
그런데 봄이 되어도 그 낙엽이 떨어지지 않고 나뭇가지에 붙어 있다면 얼마나 흉측합니까.
그러니 이 몸이 늙고 병들어 흩어질 때가 되었는데도
그것을 강제로 그냥 형상을 유지시킨다면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생명의 원리에 도리어 어긋난다.
그렇다고 해서 살아있는 생명을 또한 함부로 외부적인 힘으로 죽여서는 안 된다.
죽어가는 생명을 억지로 붙들어놔도 안 되지마는
살아있는 생명을 또한 해쳐서도 안 된다.
통증이 좀 있다고 “아이고 못살겠다. 이러니 죽는 게 낫겠다.”
가난하다고“ 이렇게 사는 게 죽는 게 낫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다 반생명적이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로 받은 이 몸을
인연이 되어 화합해서 생성된 이 몸을
우리는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됩니다.
이 몸이 있어야 우리는 수행도 하고 교화도 하고,
이 몸이 있어야 보시도 하고, 온갖 복을 짓고 중생을 교화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몸에 집착해서 수행을 게을리 하고, 이 몸에 집착해서 보시를 행하지 않고, 이 몸에 집착해서 전법을 행하지 않는다면
그럴 때는 몸에 집착을 버리는 공부를 해야 하고,
이 몸에 집착해서 몸을 함부로 할 때는
몸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공부를 해야 된다.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이 늙은 비구는 크게 깨달은바가 있어서 그 자리에서 깊은 선정에 들었다고 합니다. 즉, 좌절과 절망 속에 있던 사람이 그것이 잘못된 줄을 깨치고, 바른 길에 접어들어서 정진을 해서 바로 깨달음을 얻었다.
이렇게 해서 지혜의 눈이 열리자, 부처님께서 이 늙은 비구에게 말하기를 내일 왕이 초대하는 그 식사에 참가할 때는 자네가 맨 윗자리에 앉으라는 거요. 그리고 식사가 끝나면 설법을 하라는 거요. 그럼 맨 윗자리라는 것은 대표로 설법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왕의 식사를 초대받고 사람들이 쭉~ 갔어. 500비구가. 그런데 이 둔한 늙은 비구가 가자마자 맨 윗자리를 떡 차지하고는 앉았어. 그러니까 나머지 500비구가 기가 차는 거요.
“저 바보가 저 윗자리에 앉으니까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설법을 해야 되는 자리인데.” 다 마음이 편치 않고 근심걱정 끼가 얼굴에 다 설여 있는 거요. 오늘의 이 식사가 즐거운 식사가 못되고, 다 조마조마한 그런 상태로 밥을 먹었다는 거요.
그래서 끝나고 상수 자리에 앉은 비구가 왕을 위해서 설법을 할 자리인데, 어떻게 설법할까 궁금해 하고 있는데, 이 비구가 왕을 위해서 설법을 하는데, 감로의 법을 설하는 거요.
그래서 이 500비구들이 너무너무 자기들이 잘못 생각을 했다. 그래서 깊이 뉘우치고 이 늙은 비구의 설법을 듣고 그 500제자들마저도 다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니까 과거 생에 그렇게 500비구의 스승자리에 있었지마는 그 교만, 자기 똑똑함에 도취되어 교만하게 행동하고, 법을 설하지 않고 어리석은 자를 없신여기고, 그런 과보로 둔해져서 이렇게 수모를 겪다가 부처님 법을 만나서 크게 뉘우치고 깨달아서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이런 얘기겠지요.
이런데서 우리가 과거 생까지 곁들여서 보면
바로 이런 지은 인연의 과보를 받았다. 라고 말할 수 있고,
우리가 이 생에서만 보면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도 깨닫게 되면 지혜로운 자가 된다.
기억력은 없다 하더라도 법의 이치를 깨치게 되면 이렇게 큰 스승이 될 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길일까?
여기 한 송이 꽃이 있는데, 그 꽃을 보고
“야, 이 꽃이 아름답다.” 이렇게 마음을 내면
꽃이 좋습니까? 내가 좋습니까?
내가 좋다.
꽃이 좋은 게 아니에요.
“꽃이 뭐 이렇게 생겼어” 이렇게 꽃을 싫어하는 마음을 내면 내가 괴로워진다.
내가 꽃을 보고 좋아하든 꽃을 보고 싫어하든 꽃은 꽃일 뿐이에요.
내가 꽃을 보고 좋아하면 내가 좋은 거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면 누구에게 과보가 따른다?
나에게 좋은 과보가 따라서 내가 행복해 지는 거요.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면
그 과보가 바로 나에게 돌아와서 내가 괴로워지는 거요.
그런데도 어리석은 사람은 이 도리를 알지 못하고
남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이 자기를 위하는 줄 알고,
남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손해나는 줄 잘못 알고 있다.
이렇게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사는데도
인생살이가 늘 괴로운 거요.
참으로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라.
그러면 그것이 바로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길이다.
남을 이해하게 되면 내 속이 후련합니다.
“저 사람 왜 저래? 도무지 이해 못하겠어.”
이렇게 남을 이해하지 못하면 내 가슴이 답답하게 된다.
그러니 참으로 자기를 행복하게 하려면
다른 사람을 이해하라는 거요.
남에게 베풀게 되면 내가 주인이 됩니다.
남으로부터 도움을 받게 되면 내가 속박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참으로 자유롭고자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의지처가 되어주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어리석어서
이것을 지금 거꾸로 하고 있다.
그래서 앉으나 서나
도움을 얻으려고 생각하고,
이해받으려고 생각하고,
사랑받으려고 생각하고,
그래서 이 중생은 고파병에 걸리는 거요.
사랑고파병, 애정결핍증이죠. 뭐든지 얻지 못해서 괴로워한다.
그러나 내가 남을 사랑하게 되면 내가 행복하고
내가 남을 도와주면 내가 주인이 되고
내가 남을 이해하게 되면 내가 행복해 진다. 내가 자유로워진다.
이것이 참으로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법이다.
술 먹고 취해서 길거리에서 쓰러져 있고, 전봇대 잡고 오줌을 누고 있고, 이렇게 하면 이것은 자기가 자기를 헤치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자기 몸도 하나 아끼고 사랑할 줄 모르면서 어떻게 남을 아끼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먼저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 됩니다.
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즉, 나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사랑하겠습니까?
그래서 나를 사랑할 줄 알 때 남을 사랑할 줄 안다.
자신이 소중할 모르는 데 어떻게 남을 소중한 줄 알겠어요.
그러니까 자기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자 만이 남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안다.
그런데서 우리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집착을 놓는 것이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법입니다.
집착하는 것이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법이 아니고
그것이 바로 자기를 괴롭히는 길이다.
그래서 집착을 놓으라고 말하는 거고.
자기를 함부로 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괴롭히는 길이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라고 하는 거요.
그러니까 몸을 함부로 하지 마라는 얘기나
몸에 너무 집착해서 애지중지 하지 말라는 얘기나
다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라는 얘기고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자만이 남도 아끼고 사랑할 수가 있다.
또 남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곧 자기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보살은 ‘자리이타’
나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상구보리 하화중생’
한편으로는 깨달음을 얻고 한편으로는 중생을 교화한다.
이 둘이 다른 게 아니다. 어떤 우선순위의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함께 가는 것이다.
그런데서 오늘은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시고, 우리 사회에서 다시는 자살하는 사람이 없고, 자기 몸에 비관하는 사람이 없는 그런 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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