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 일입니다.
한 마을에 촌장이 부처님을 방문하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저는 제가 사는 동네에서 평판이 좋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난폭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유순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는데 어떤 사람을 유순한 사람이라 하고, 어떤 사람을 난폭자라고 부릅니까?”
이렇게 부처님께 여쭈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말이나 행동은 생각 안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좋은 소리 듣고 싶어 하죠.
다른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나를 존경하고, 이런 말 듣고 싶잖아요.
그런데 세상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으니까, 자기가 한 행위는 돌아보지 않고 억울하고 분하단 말이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제가 좀 좋은 소리 들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문제로 부처님께 여쭈어 본거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속에 탐욕을 갖고 있으면 과한 욕심을 갖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그렇습니까? 너무 과다한 욕심을 부리는 그런 사람 보면 화가 나죠.
지나친 욕심을 내는 사람을 보면 말이오.
그래서 마음속에 탐욕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사람의 노여움을 사게 된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화내고 짜증내는 걸 보면, 그 노여움을 보면, 나 또한 그 사람에게 노여워하게 된다. 성내게 된다.
이 사람을 난폭자라고 부른다.
마음속에 미움을 갖고 있으면, 증오심을 갖고 있으면, 다른 사람을 화나게 만든다.
그 사람이 나에게 화를 내고 짜증을 내면, 나 또한 그 사람에게 화를 내고 짜증을 내게 된다.
이 사람을 난폭자라고 부른다.
마음속에 어리석음을 갖고 있으면, 즉 어리석은 사람은,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을 화나게 만든다는 거요.
그 사람이 화내는 걸 보면 이 어리석은 자 또한 화를 내게 된다.
이 사람을 난폭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마음속에 탐욕이 없고, 마음속에 미움도 없고, 마음속에 어리석음도 없으면,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노여워하거나 화내고 짜증내는 게 없다.
그러기 때문에 나를 보고 노여워하거나 화내고 짜증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성내는 일이 없다.
이런 사람을 유순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리들의 교훈은 결국은 마음속에 탐진치 삼독이 있는 사람이 난폭자가.
어떤 사람이 난폭자입니까?
마음속에 탐진치 3독이 있는 사람이 난폭자다.
어떤 사람이 유순한 사람입니까?
마음속에 탐진치 3독이 없는 사람이 유순한 사람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런 얘기가 되겠죠.
욕심이 지나치면 욕심이 과하면 눈에 뵈는 게 없죠.
욕심에 눈이 어두워, 이런 말이 있죠.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게 없다. 이러지 않습니까.
어리석은 자는 눈감은 자와 같은 사람이죠.
그러니까 욕심이 많거나 분노, 성내는 이런 진심을 가진 사람이나 치심, 어리석음을 가지게 되면 마치 눈 어두운 사람이 아무것도 뵈는 게 없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처럼, 이 인생길을 헤매고 괴로워하는 거죠. 그래서 고통에 빠지게 된다.
자기는 잘한다고 했는데 결과는 나빠지는 거요.
이것을 경전에서는 물고기가 낚싯밥을 무는 것과 같다.
그 물고기는 살려고 한 행위인데, 기뻐서 한 일인데 결과적으로는 죽게 되고 괴로워진다.
쥐가 쥐약을 먹는 것과 같다.
쥐는 살길을 찾아 웬일인가 할 정도로 복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과는 죽게 되고, 큰 재앙을 만들게 되었다.
쥐가 쥐약을 먹고 괴로워서 몸부림칠 때 이때 쥐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안 믿었더니 하나님이 나에게 벌을 주는 거구나.’
둘째 경우는 내가 사주팔자를 잘못타고 났구나.
세 번째는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과보를 받는구나.
네 번째는 내가 쥐약인 줄 몰랐구나.
어느 쪽입니까?
전생에 죄가 많아서 쥐약 먹었어요?
하나님한테 벌 받아서 쥐약 먹었어요?
태어나는 생년월일시가 나빠서 쥐약을 먹었어요?
쥐약인 줄 모르고 먹었어요? 쥐약인 줄 모르고 먹었다.
모르고 먹었다. 이게 무지에요.
모든 고의 원인은
무지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지로부터 오는 이 고통을 사주팔자 타령을 하거나 전생 타령을 하거나 하느님 타령을 하는 거요.
그래서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아이고, 내 팔자야.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두 부부가 갈등을 일으켜서 같이 못살겠다. 이혼해야 되겠다. 이런 정도에 이르렀어.
왜 그럴까?
우리 두 부부는 전생에 철천지원수라서 그렇다.
우리 둘은 궁합이 안 맞아서 그렇다.
교회에 안 다니기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사서 그렇다.
아니에요. 자기 생각에 빠져서. 어리석기 때문에 그렇다.
사주팔자가 나빠서, 생년월일시가 나빠서 그러면 다시 태어날 수가 없잖아.
전생은 다시 돌이킬 수가 없잖아.
신의 노여움을 산 거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잖아.
그러나 내가 어리석어서 저지른 것은
내가 깨우치면 된단 말이오.
그래서 이 수행은 사주팔자를 고치는 거고, 전생까지도 좋게 하는 거고, 신의 축복을 받는 길로 가는 거요.
그래서 이 좋은 법, 이 좋은 법만 기쁨, 이런 말이 나오는 거요.
해결 불가능한 것을 가능토록 하기 때문에, 이것이야 말로 기적이다. 이 말이오.
이러한 탐진치 3독은 우리를 고통 속에 빠뜨립니다.
바로 이 고통 속에서 우리가 허우적거리고 살아가는데, 이걸 두고 하늘을 원망하고, 전생을 원망하고, 생년월일시를 원망하고, 그런다고 해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에요.
이 고통은 바로 탐진치 3독으로부터 원인이 되어 생겨난 결과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첫 번째가 뭐요? 여래십대발원문 중에 첫 번째가 뭐요? 願我永離三惡道(원아영리삼악도)
부처님이시여, 저는 이 삼악도의 고통, 지옥과 아귀와 축생이라고 하는 이 삼악도의 고통, 이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고 싶습니다. 이 모든 사람이 원하는 바에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느냐.
바로 이 고통의 원인이 탐진치 삼독이에요.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고통에 빠뜨리는 이 탐욕과 진애와 우치란 말이오. 탐진치란 말이오.
그러니 이 탐진치 삼독을 하루 속히 끊어버리겠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가 뭐요? 願我速斷貪嗔痴(원아속단탐진치)
이 탐진치 3독을 소멸시키겠다.
그럼 어떻게 해야 탐진치 3독을 소멸시키느냐.
바로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하고
수행자 그룹인 공동체 승가에 귀의할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願我常聞佛法僧(원아상문불법승)이에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는 이 길은 해탈로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에 수행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저 지옥에 떨어질지라도 부처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다면, 나는 지옥에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다.
왜? 이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해탈할 수 있기 때문에.
육도윤회 고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문을 들을 수 없다면, 나는 저 천상의 낙이라고 하더라도 받지 않겠다.
부처님의 법문을 들을 수 없다면, 천상에 보내준다 하더라도 나는 그곳에 가지 않겠다.
왜? 그것은 윤회고 안에 있는 얘기이기 때문에.
그것은 해탈의 길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의 법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하면 천상에 나느냐?
그러면 천상에 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고,
주지 않는 남의 물건은 뺏거나 훔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오히려 도와주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 오히려 즐겁게 해주고,
거짓말이나 욕설은 행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고, 자비롭게 말을 하겠다.
이게 좋은 곳으로 나는 길 아닙니까.
그런데 천상에 날 인연은 짓지 않고, 천상에 나기만을 바라니 될 수 없는 일이다.
쥐가 쥐약을 먹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결국은 지옥에 떨어진다. 천상에 가고 싶은데 지옥에 떨어지니 얼마나 괴롭겠어.
그런데 보살은 어떠냐?
마땅히 천상에 갈 복을 지었다 하더라도, 저 지옥에 있는 중생들이 괴로워하니 내 그 고통을 받고 저 중생들 좀 편하게 해야 되겠다. 이렇게 원을 세운단 말이오.
어쩔 수 없이 가기 싫은데 지옥에 끌려간 게 아니고, 자발적으로 스스로 선택해서 간단 말이오.
중생은 이 세상에 오는 것이 인연의 과보로 업보로 오니까 중생이고
보살은 이 세상에 올 때 중생을 구제하러 자발적으로 오기 때문에 그게 보살이오.
보살은 인생의 주체가 자신이고
중생은 인생의 주체가 아니고 업에 끌려 다니는 속박된 사람이다.
똑같이 디스코장에 가서 춤추고 노래하고 노는데,
무대 위에 노는 사람은 돈 때문에 할 수 없이 돈 받고 거기 와서 흔들어주는 사람이고,
무대 밑에서 춤추는 사람은 자기돈 내고 와서 흔드는 사람이에요.
똑같이 놀아도
한 사람은 즐겁고,
한 사람은 지금 중노동하고 있는 거요.
남이 볼 땐 똑같은데.
하나는 즐기는 사람, 자발적으로 하는 사람, 돈 내고 하는 사람, 돈 내고 한다는 것은 보시한다. 이 말이오.
한 사람은 억지로 하는 사람. 돈 때문에 하는 사람, 돈 받고 하는 사람.
그래서 똑같은 행위를 해도
한 사람은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고
한 사람은 인생을 종속적으로 사는 거요.
그래서 베푸는 자는 보살이고
얻으려고 하는 자는 중생이에요.
여러분들은 보살이 되고 싶은데 중생이 되는 게 아니고
지금 중생이 되고 싶어서 원을 세운 사람들이에요.
베푼 것은 없이 그저 공짜만 많이 바라니, 중생이 되는 첩경의 길을 가는 사람이오.
남을 이해해주기는커녕 이해받기만을 원하니 그 중생이 되는 첩경의 길이다.
그래서 우리가 고통을 받는 것은
스스로 고통 받기 원했기 때문에 고통 받는 거요.
나는 안 원했는데요?
바로 어리석음이다. 무지다.
그러니 불법승 삼보에 의지해서, 부처님처럼 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부처님 법에 의지하는 것.
현실 속에서는 스승을 믿고 따라서 도반들과 더불어 정진하는 것.
그렇게 했을 때 바로 삼악도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해탈 열반의 길로 나아갈 수가 있다.
그럼 불법승 삼보에 의지한 자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해야 됩니까?
願我勤修戒定慧(원아근수계정혜)다.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선정을 닦고, 어리석음을 깨우쳐 지혜를 증득하게 될 때, 그때 우리가 해탈의 길을 갈 수가 있다.
그래서 수행자는 계정혜 삼악을 닦는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런데 오늘 불자들이 계율을 청정히 지키는 것을 게을리 합니다.
우리가 예불할 때마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데, 계의 향기로 공양을 올린단 말이오. 그래서 계향이라 그러잖아요. 전단향의 향기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게 아니고, 내가 청정한 계율을 지키는 그것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
정향, 내가 부처님께 전단향으로 공양을 올리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고요한 이것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
마찬가지로 일태무지를 깨뜨린 세상을 통찰 할 수 있는 그런 지혜의 향기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
이 계정혜 삼학을 닦아가는 이것이 부처님께 올리는 최고의 공양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하늘의 신들은 때가 아닌데도 사라수에게 꽃을 피워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고, 하늘에 꽃비를 내려 공양을 올렸고, 하늘의 신들이 풍악을 울려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 정말 굉장한 공양이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여, 이것은 제일의 공양이 아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제1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단 말이오.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한다는 게 뭐요?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증득하는 거다.
이것이 부처님께 올리는 최고의 공양, 제1의 공양이 된다.
이렇게 계정혜 삼학을 닦아 나아갈 때, 그것을 물러서지 않고, 부지런히 닦아 나아갈 때, 그때 우리는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고,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한다 이 말이 깨달음에 이른다. 이 말이오.
그럼 거기서 끝나느냐? 아니다.
다시 이 세상에 오셔서 티끌처럼 많은 중생들을 다 구제하는데, 그 중생들, 그 처지에 맞게 갖가지 방편으로 그들을 교화한다.
이게 불교의 이상입니다.
깨달음을 얻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 아닙니다. 이건 8번째.
결국은 고통 받는 중생을 하나도 남김없이 구제하는 것. 그것이 궁극적인 불교의 이상이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이것을 몸소 보여주셨지 않습니까.
번뇌하시다가 출가하셔서 정진하셔서 마침내 위없는 깨달음을 얻고, 45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이렇게 어리석은 중생들을 다 그 형평과 처지에 맞게 온갖 방편으로 온갖 비유로 그들을 깨우쳐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하셨단 말이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니 이 촌장이, 이 촌장은 수행자로 온 게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에 평판을 좀 좋게 얻으러 온 거요. 돈도 있고 지위도 있는데 세상 사람이 욕을 하는 거요. 우리 역사 속에서 그런 사람들이 있죠.
대통령들 한번 보십시오. 지위도 높고, 돈도 많이 모았고, 그런데도 비난받는 사람 있죠. 외국에 가서 죽었어. 부하한테 또 총 맞아 죽기도 하고, 다음 사람한테 또 감옥가고, 또 감옥가고, 또 아들이 감옥가고, 또 아들이 감옥가고, 또 어디 갈지 지금 준비 중인지...
아무튼 역사를 보면 이런 비극적인 상황이에요.
그런데 이것이 좋다고 서로 하려고 머리가 깨지듯이 싸우지 않습니까? 이게 어리석음이지요.
그런데 이런데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평판을 좋게 듣고 싶단 말이오. 재물은 얻어졌는데, 한마디로 명예가 안 얻어진 거죠.
그래서 이걸 얻기 위해서 부처님께 와서 물었는데,
“야, 이놈아. 그건 도가 아니야. 그런 걸 물으려거든 집에 가.” 이렇게 말하지 않으셨어요. 저 같으면 아마 그랬을지도 몰라요.
“뭐 그런 걸 가지고 여기 와서 물어.”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그 난폭자와 유순한 그것을 난폭자라는 것은 탐진치 3독에 물들어 지옥고에 떨어지는 사람이고, 유순한 자는 돌이켜서 탐진치 3독을 버리고 계정혜 삼학을 닦아서 해탈 열반하는 사람으로 승격을 딱 시켜버렸단 말이오..
그렇게 해서 그도 해탈열반으로 나아갈 수 있는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재공해주신 거란 말이오.
부처님 제자 중에 출가해서 스님이 되겠다. 이렇게 찾아온 사람은 전체적으로 보면 아주 드뭅니다.
마하가섭 존자 같은 사람은 찾아올 때 수행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사람이오. 그 외에 사람들은 다 자기 인생이 괴롭다고 하소연하러 부처님 찾아왔다가
부처님 욕하고 해치려고 하고 이러다가 부처님 법문 듣고 뉘우쳐 깨우쳐서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오.
그러니 절집 안에 오는 사람들, 수준 낮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수준 높은 사람이 와야지.’ 그런 말 하면 안 돼요.
누가 와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좋은 법은 그들을 다 하나같이 붓다의 제자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이런 좋은 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불법이 위대하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 좋은 법을 만나서 여러분도 이렇게 붓다의 길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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