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있을 때 얘깁니다.
상가라바라고 하는 한 바라문이 정사를 찾아와서 부처님께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어떤 때에는 대단히 맑은 정신이 되어 여태까지 배웠던 것은 물론 아직 배운 적이 없었던 것 까지도 쉽게 설명해 낼 수 있는데, 때로는 왠지 머릿속이 혼미해져서 평소에 배운 것조차도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관절 어떤 이유일까요.”
이렇게 부처님께 여쭈었어요. 우리도 그렇죠.
어떤 때는 머리가 명료해서 배운 건 물론이고, 안 배운 것 까지도 머리에 착착착착 떠올라서 자기 자신이 생각해도 좀 똑똑해 보일 때가 있고,
어떤 때는 그 동안에 아는 것 까지도 도무지 떠오르지도 않고 정신이 흐릿하고, 멍청해져서 자기가 바보인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단 말이오.
‘왜 그렇습니까?’ 이렇게 부처님께 여쭈었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릇에 담긴 물을 가지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바라문이여, 여기에 물이 가득 담긴 그릇이 있습니다.
만일 그 물에 붉거나 푸른 물이 들어있다면 사람들이 거기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려 해도 그대로 비추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이 갖가지 탐욕에 물들어 있을 때는 마음이 맑지 못함으로 어느 것도 있는 그대로 비치지 않습니다./
물에 얼굴을 비추면 그대로 비추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물에 붉은 물이나 푸른 물감이 들어 있어서 그런 상태로 얼굴을 비추면 얼굴이 비치지 않는다.
그것처럼 우리들 마음속에 탐욕이 물들어 있을 때는 마음이 맑지 못하다. 이런 얘기에요.
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물이 열을 받아서 끓고 있다면 어떻겠는가?
(끓는 물에 얼굴을 비추면 얼굴이 비칩니까? 안 비칩니까? 안 비치죠.)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이 노여움에 휩싸여 있을 때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화가 났을 때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다.
전자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고,
후자는 화가 나서 눈에 뵈는 게 없다. 이런 얘기죠.
/또한 만약에 그 물위에 이끼가 떠 있고, 풀이 가려져 있다면 어떻겠는가?
거기에 아무리 얼굴을 비추어 보고자 해도 있는 그대로 얼굴이 비치지 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이 어리석음이나 의심으로 가려져 있으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이번에는 물에 이끼가 끼어 있거나 물풀이 자라고 있다면 얼굴이 비치지 않는다.
그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속에 어리석음이 가득 차 있다면 우리들의 정신이 명료하지 못하다. 이런 얘기죠.
/그런데 바라문이여,
그에 반해 물이 어떤 물감에 흐려져 있지도 않고, 물이 끓지도 않고, 물에 이끼나 풀이 떠 있지도 않다면 어떤가?
그러면 거기에 얼굴이 깨끗이 잘 비칠 것이다./
그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에
탐욕이 없고,
또 성냄이 없고,
그리고 어리석음이 없다면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정견에 대한 얘깁니다.
정견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을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거요.
그것은 꼭 눈으로 본다 라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니고,
귀로 듣는다 라고만 말하는 게 아니라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이런 모든 것들을 포함해서
사실을 사실 대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
이것을 정견이라 한다.
우리들 마음속에 탐진치 삼독이 가득 차 있으면
정견을 가질 수 없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 수가 없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가 없다.
그러니까 잘못 알아차리니까,
처음부터 어떤 사실 파악에 오류가 생기니까,
그 오류에 기초해서 사고를 하니까,
그 사고 판단마저 잘못되게 되죠.
그러니까 그에 따른 말이나 행동이 잘못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른 생활태도가 잘못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을 할 때는 제일 중요한 게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차리는 것,
사실을 사실대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두고 우리는 어떤 판단은 또 잘못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사실을 알아차리는 그 자체에 오류가 생겨버리면,
나머지는 연쇄적으로 다 잘못되어 버린다.
그래서 수행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견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이죠.
어떤 법의 이치를 알아차리는 것,
내가 그것을 행하고 못 행하고,
이것을 떠나서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차리는 눈이 있어야 됩니다.
안목이 있어야 된다.
이것을 팔정도에서는 정견이라고 말하고,
수행에 있어서는 견도다 이렇게 말해요. 견도.
그러니까 수행자는 최소한도 견도가 열려야 한다.
견도는 증득해야 한다.
견도가 열리지 않으면 공부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오류 속에서 우리가 하는 공부는 그냥 헤맴이지, 그건 공부가 아니다.
수많은 노력이 다 헛되다. 이런 얘기에요.
물론 이렇게 견도가 열렸다고 해서 공부가 끝난 건 아닙니다.
이것은 공부를 하는 게 하나의 출발이다.
알아차림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오랜 습기, 습관, 까르마, 이런 것이 있기 때문에 자꾸 무의식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습관대로 행동을 하게 되고, 말하게 되고, 습관대로 마음이 움직인다.
그러기 때문에 오류를 범할 때는 금방 다시 오류를 범함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된다.
이때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차린다’ 하는 이 말 속에는 ‘오류를 오류로 알아차리는 것’ 이것도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차리는 거죠.
잘못했을 때 잘못한 줄을 알아차리는 것
틀렸을 때는 틀린 줄을 알아차리는 것
자기가 모르는 것은 모르는 줄 알아차리는 것
화가 났을 때는 화가 난 줄을 금방 알아차리는 거죠.
이 알아차림이 역력해야 된다.
그런데 대부분 우리들은 알아차림 없습니다.
틀려놓고도 틀린 줄을 모르고 계속하고,
잘못해놓고도 잘못한 줄 모르고 잘했다 그러고,
모르는 사람이 아는 줄 착각하고 배우지도 않고
이렇게 될 때 많은 혼란이 오고 고통이 생겨나게 된다.
이렇게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차리는 것, 법의 이치를 확연히 알아차리는 것, 이 견도가 열렸다고 하더라도 실제 언행, 마음의 흐름, 여기에서는 역시 오류가 일어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류가 일어나면 오류가 생긴 줄을 알고, 다시 시작해야 되겠죠.
여기에 반복된 훈련이 필요하다.
이런 반복된 훈련의 과정,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수도라고 말한다.
수도를 한다. 도를 닦는다 라고 하는 것은
그냥 공부한다고 도를 닦는다 안 그래요.
견도가 얻어진 다음부터를 수도라고 한다.
견도는 법의 이치를 확연히 알아차린 거고
그것이 몸과 마음에서 경험되는 데는 자주 오류를 범하게 된다.
알았는데도 그렇게 안 된다 이 말이오.
그래서 거기에는 연습이 필요하다.
연습이라는 말은 완전하지 못하다. 이런 얘기에요.
이 연습의 과정이 수도다.
그래서 이 견도가 열린 것을
소승에서는 성문4과 중에 수다원과를 증득했다. 이렇게 말해요.
이것을 수다원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 당시에 불자들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깨달았다. 마음의 문이 열렸다. 이렇게 말하는 건 대부분 다 수다원과를 증득했다는 뜻입니다.
‘완전한 열반에 이르렀다.’ 이 말이 아니고, 법의 이치를 확연히 알았다.
어리석은 주리반특이 도저히 이치를 깨치지 못하다가
부처님께서 ‘티끌을 털고 때를 닦아라’ 라는 게송을 주면서 청소를 하라고 했는데, 청소를 하다가 그 이치를 깨쳤다.
그러면 이 사람은 완전한 열반에 이르렀나? 그게 아니에요.
바로 수다원과를 증득했다. 견도가 열렸다.
아들이 죽었다고 아들을 살려달라고 울고불고 하던 여인에게 부처님이
“여인이여, 사람이 죽지 않는 집에 가서 겨자씨 한 움큼을 얻어 오너라.”
이렇게 말했을 때 그 여인은 ‘겨자씨 한 움큼이 아들을 살리는 비상약이 될 거다.’ 이렇게 생각했지마는 사위성 전체를 다녀도 결국은 겨자씨를 얻지 못했다. 사람이 죽지 않는 집은 한 집도 없었다.
그때 그 여인은 쓰로 경험한 거요. 이치를 깨친 거요.
태어난 자는 다 죽는다는 것. 그것이 오늘이냐 내일이냐, 1년이냐, 2년이냐는 약간의 시간 차이만 있지, 생겨난 것은 다 사라지게 마련이다.
즉, 무상의 이치를 깨달은 거요.
이럴 때 이것은 수다원과를 증득했다 그래요.
그의 모든 번뇌가 다 사라졌다는 게 아니라, 법의 이치를 깨쳤다.
이렇게 법의 이치를 깨치게 되면, 그 다음 부터는 공부가 잘 되나갑니다.
그 전에는 헤매다가 법의 이치를 깨치고 난 뒤부터는 인제 자기가 틀렸을 때 틀린 줄 알고, 모르면 모르는 줄 알고, 잘못을 했을 때는 뉘우칠 줄 알고,
공부가 자기 점검이 되는 거요.
혼자서 연습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말이오.
그 전에는 동서남북을 구분 못하기 때문에 이게 공부가 되는지, 안되는지 이런 수준이라면
이제는 이치는 깨쳤는데 실천이 안 되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점검이 가능해 진다.
이렇게 공부를 해 나아간다.
이 공부하는 과정을 수도라고 하고
성문4과에서는 이것을 다시 2단계로 나누어서
사다함과 아나함이라고 말한다.
아직도 실수를 한 번 더 새로이 해야 될 단계, 그것은 사다함이고, 아나함이라고 그러면 이번 이 실수로 이제 끝이다. 다시는 오류를 범할 필요가 없다. 이 단계까지 가면 아나함이다.
이러한 수도의 과정을 거쳐서 오류가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오류가 없는 경지, 이건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 이제 연습 안 해도 된다. 이제는 능수능란하게 대처할 수가 있어진다. 이것을 무학도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래서 수행에 3도가 있는데
첫째가 견도 -> 두 번째가 수도 ->세 번째가 무학도
이것을 소승수행에서 소승에서 성인의 지위에 들었다.
즉, 승보가 되려면 성인의 지위에 들어야 승보라고 하지, 성인의 지위에 들지 않으면 승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인의 지위에 들었다 하는 것은 언제부터냐? 수다원과를 증득해야 됩니다.
그래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이렇게 말하죠.
그러니까 이 아라한과를 증득한 것은 곧 무학도다. 이런 얘기에요.
선으로 말하면 법의 이치를 깨쳤다 할 때는 이것을 초견성이라고 그럽니다. 초견성 했다. 이래요. 초견성 했다고 해서 그가 완전하게 깨쳤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이 견성을 하면 그 다음에 모든 경우에 어떤 때나 어떤 장소에서도 그것이 여일하게 되느냐, 안 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을 연습하는 기간, 이것을 보림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옛 수행자들은, 깨치기는 하루 만에 깨치고, 즉 말 떨어지자마자 언하에도 깨치고, 하루만에도 깨치고, 3일 안에도 깨치고, 한 달 안에도 깨치고, 100일 안에도 깨치고, 3년 안에도 깨치고, 3년 넘어가면 좀 곤란해.
그러면 나머지 기간은 뭐냐? 보림 기간이오.
오늘 우리들은 공부를 좀 잘못하고 있기 때문에
정법에 의지해서 바르게 공부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법의 이치를 깨닫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거요.
공부를 오래해도 3년, 5년, 10년 해도 법의 이치를 잘 몰라.
그러니까 헤매고 있는 거요.
이름만 불자고. 이름만 수행자이지. 헤매고 있단 말이오.
헤매고 있는 사람은 수행자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초견성을 해야 되는 거요. 그러면 초견성을 하고 난 뒤부터 본격적인 공부라고 할 수 있어.
그래서 어느 때나 어떤 곳에서나 그것이 여일하게 여여하게 되느냐, 그거 잘 안 돼요.
화가 나는 게 상대편 때문에 너 때문에 화가 난다고 하지만,
화가 일어나는 것은 상대편 때문이 아니에요.
바로 나로부터 일어나요.
이런 이치를 확연히 알아야 돼.
이치를 확연히 알면 화날 일이 없어.
화가 나는데 참는 게 아니고
화가 나지 않아야 돼.
그것을 이론적으로 아는 게 아니라
자기가 경험적으로 알아야 돼.
경험적으로 알아야 그게 지혜에요.
그것이 증오다. 이 말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에 부닥치게 되면 어떠냐?
순간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화가 일어난단 말이오.
그럴 때 금방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금방 놔 버려야 돼.
이렇게 자꾸 연습을 하면
즉, 실수, 그리고 다시 도전, 이런 것들이 일정하게 되면,
부처님처럼 나를 욕하는 사람을 보고 참는 게 아니고,
그냥 편안하게 침묵하거나 빙긋이 웃을 수 있는 그런 경지로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공부가 어느 정도 마쳐져야
그 다음에 남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가르침을 편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어요.
개당한다. 제자를 받고 가르친다. 이 말이오.
오늘 우리들은 이러한 불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
첫째는 법을 듣고 이해를 제대로 해야 돼. 이해만 갖고는 안 돼.
그것을 실제로 해보면서 몸으로 체험이 되어서 경험되어져야 돼. 몸과 마음에서 경험되어 진다. 그게 자기 거란 말이오.
이해하는 것은 아직 완전히 자기 것은 아니에요.
이렇게 경험되어져서 아는 것, 이것을 깨달아 안다. 이렇게 말해요.
무상을, 제행이 무상함을, 설명을 듣고 ‘그렇지, 다 변하지, 안 변하는 게 있나. 맞아맞아 다 변해’ 이것은 해오에 속한다.
무상함이 죽을 고비를 당하든지, 부모가 죽는 것을 보든지, 어떤 상황에서 무상함이 온전하게 몸에서 탁 경험되어져야 돼.
비파사나를 행하면 몸에서 일어나는 수를 느낌을 깊이 관할 때
우리는 그 느낌에 항상 집착되어서
락수에 대해서 좋은 느낌에 대해서는 집착을 하게 되고, 그래서 애욕을 불러일으키고
나쁜 느낌에 대해서는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혐오를 불러 일으키고,
이게 금방 끄달려 넘어가.
그런데 다만 느낌을 느낌으로만 볼 수 있어.
그게 있는 그대로 보죠.
느낌을 느낌으로 보는 것,
그리고 그 느낌은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거요.
어떤 느낌도,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것을 온전하게 체험하게 되면
느낌에 대해서 초연하게 된다.
느낌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느낌을 느낌으로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거요.
거기에 혐오를 일으키거나 거기에 애착을 일으키지 않게 되죠.
이렇게 경험되어져서 아는 것, 그것을 지혜라고 말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 정견이 매우 중요하다.
법의 이치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만 갖고 정견이 되는 게 아니고
그것이 몸과 마음에서 경험되어져서 확연하게 알아지는 것을 정견이라고 한다.
그것을 견도라고 한다. 그것을 초견성이라고 한다. 그것을 수다원과라고 한다.
그러나 완전하게 어떤 경우에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를 출발점으로 해서 더욱더 닦아가야 한다.
그러니 우리가 탐진치 3독을 없애게 될 때, 바로 이런 법의 이치를 깨닫게 되지,
탐진치 삼독에 얽매여 있으면
이 법의 이치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이 마치 물을 흐리게 하는 것처럼
존재의 참 모습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데 장애가 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난번 시간처럼 탐진치 3독을 없애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이 정견을 증득하도록 공부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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