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제자가 부처님께 와서 이런 질문을 했어요.
“부처님이시여,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지 못한 사람들도 樂受를 받고 苦受를 받고, 비苦비樂受를 받습니다.”
즉, 樂受라는 것은 즐거운 느낌, 苦受라는 것은 괴로운 느낌.
비苦비樂受라는 것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는 느낌.
이걸 보통 우리는 쉬운 말로는 쾌, 불쾌,
즉 쾌한 느낌, 불쾌한 느낌, 쾌하지도 불쾌하지도 않는 느낌, 이렇게 말하기도 하죠.
부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사람도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기도하고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기도 하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 말이오.
“그런데 부처님이시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수행하는 제자들도 또한 즐거운 느낌을 받기도 하고, 괴로운 느낌을 받기도 하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면 가르침을 받은 사람과 가르침을 받지 못한 사람하고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즉 수행자가 아닌 사람도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는 상태에 들기도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수행정진하고 있는 수행자들도 때로는 즐겁기도 하고, 때로는 괴롭기도 하고, 때로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상태에 이른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따르는 사람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지 못한 사람이나
차이가 어디 있느냐? 이 말이오.
아주 예리한 질문이죠.
나 같으면 이렇게 너무 어렵게 질문하면 대답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저는 이렇게 물으면 뭐라고 그럴까?
“아따 네가 많이 알구나. 잘하는 네가 알아봐라.” 이렇게 도망을 가야 될 텐데,
부처님은 일체지라고 그러죠. 일체를 다 아시는 분, 그러니까 이런 질문에 끄떡도 없으세요.
“부처님이시여, 우리들의 법은 세존을 근본으로 하고, 세존을 주안점으로 합니다.
원컨대 그것을 우리들에게 설해주소서.”
이렇게 간절하게 부처님께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주기로 원했던 거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구들이여, 보통사람들은 고수를 받으면 비탄에 빠져 슬퍼하다가 점점 혼미에지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은 괴로움이 일어나면 그 괴로움에 못이겨서 나중에 비탄에 빠지고, 슬퍼하다가 점점 정신이 혼미해진다. 너무너무 괴로워지면 말이오.
“그것은 마치 화살을 맞고 나서 그 위에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과 흡사하다.”
화살 한 대 맞고 아픈데 거기다 다른 화살이 와서 맞았던 자리 한 대 더 맞으면 더 아프겠죠. 그죠.
“그에 반해 이미 가르침을 들은 사람은
고수를 받아도 헛되이 비탄에 빠져 슬퍼해 하며 혼미해지지 않는다.”
수행자는 즐겁지 않는 느낌, 괴로운 느낌, 불쾌한 느낌이 일어나도
거기에 사로잡혀서 그것을 싫어하고, 혐오하고 또 그로 인해서 슬퍼하고, 비탄에 빠지지 않는다.
“그것은 나는 두 번째 화살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수행자와 수행자 아닌 사람의 차이는
수행자 아닌 사람은 화살 한 대 맞고 피하지 못하고 두 번째 화살을 또 맞는 것과 같은데,
수행자는 설령 방심해서 첫 번째 화살을 맞았다 하더라도 두 번째 화살은 안 맞는다는 거요.
이것이 그 유명한 설법,
‘첫 번째 화살은 맞을지언정 두 번째 화살은 맞지 말라.’
이런 얘기에요.
그러면 첫 번째 화살도 안 맞으면 좋겠죠.
첫 번째 화살도 안 맞으려면
업장이 소멸되어야 됩니다.
즉, 무학도에 이르러야 돼. 아라한과를 증득해야 돼.
번뇌가 없는 자에 이른다. 이 말이오.
그런데 우리는 과거생으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어리석음에 뿌리를 두고 행한 것들로 인해서
몸과 마음에 습관이 배어 있어. 까르마, 업보를 짊어지고 있다. 이 말이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이 몸과 마음이 반응을 합니다.
쉽게 예를 든다면 담배에 중독된 습관이 있는 사람은 담배연기가 코끝을 스치면 기분이 좋습니까? 기분이 나쁩니까?
흡~ 하면 기분이 그냥 싹 좋아져.
기분 좋음, 이게 樂受에요.
이건 ‘내가 기분 좋아야 된다.’ 라고 의지로 일으키는 겁니까? 아닙니다.
저절로 일어납니다. 몸이 거기에 반응을 해버린다.
마치 한국 사람이 된장찌개 끓이는 냄새를 맡으면 그냥 군침이 도는 거요.
이거는 의도를 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저절로 일어나는 거요.
이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저절로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을 12연기하고 견주어서 말한다면
이미 내 몸과 마음에 배어 있는 이 업식, 종자에요. 이 업식이 있고,
이 업식이 있기 때문에 냄새라든지 모양이라든지 무엇인가가 자극을 주면 여기로부터 싹이 트는 거요.
이것을 名色, 六入, 觸이라고 그래요.
명색, 육입, 촉을 거쳐서 명색이 육입과 만나면 바로 이 식이, 식은 씨앗과 같은 거요. 이 식으로부터 싹이 터버려.
밭에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봄이 되어서 비가 오면 날씨가 따뜻해지면 나중에 싹이 거기 터요. 싹이 텄다는 것은 무슨 얘기에요? 보이지는 않았지마는 거기에 씨앗이 있었다는 걸 말하죠.
이 씨앗과 같은 게 뭐라고?
식이에요. 업식.
싹이 트는 이 싹과 같은 게 뭐라고?
이게 受수에요.
이렇게 受수는 저절로 일어나는 거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거요.
그런데 우리는 어떠냐? 각자의 업식에 따라서 똑같은 상황에서 수가
고수가 일어는 사람이 있고 낙수가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좋은 느낌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고 나쁜 느낌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똑같은 냄새를 맡아도 한국 사람은 좋은 느낌이 일어나는데 외국 사람은 구역질이 난다. 거부반응이 일어난다. 그럼 이것은 고수요.
왜 똑같은 상황에 이렇게 느낌이 서로 다른가?
그것은 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똑같은 밭에 날씨가 따뜻해지고, 비가 오니까, 싹이 터 올라오는데, 이게 잎이 서로 달라. 왜 그럴까요? 씨앗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수라고 하는 것은
업식으로부터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식이 있다 하더라도, 즉 씨앗이 있다 하더라도 날씨가 춥거나 건조해서 습기가 없거나 하면 싹이 안 트죠. 그죠?
그런 것처럼 우리들에게 업식이 있다 하더라도 이게 경계에 부딪히지 않으면 싹이 안 트는 거요. 그래서 없는 줄 알아.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이 씨앗이 어떤 때는 사춘기 때 트기도 하고, 어떤 때는 결혼하면 트기도 하고,
그래서 “저게 어디 가서 저런 성질이 나오나?” 이렇게 의아해 할 때가 있단 말이오.
그럼 이러한 느낌이 일어나면 그 느낌에서 낙수에 대해서는 좋은 느낌은 유지하고 싶어요? 버리고 싶어요? 유지하고 싶지.
그것을 유지하고 싶은, 좋은 느낌을 갖고 싶은 게 뭐냐? 愛에요. 애. 渴愛라고 갈애.
나쁜 느낌은 갖고 싶어요? 버리고 싶어요? 버리고 싶지. 싫어한다. 이 말이오. 그게 뭐냐? 혐오라는 거요.
그러면 갈애나 혐오나 다 한마디로 말하면 어디에 속하느냐? 애에 속하는 거요. 애.
12연기에서는 한마디로 애라고 그래요. 그 愛는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거 다 愛애라고 그래.
좋아하거나 싫어하게 되면 다음에 뭐가 일어납니까? 행위가 일어납니다.
좋아하면 거기에 집착을 하게 돼. 그것이 取요. 취.
집착으로 마음과 말과 행위가 일어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새로운 업을 짓게 돼.
그래서 또 흔적이 습관이 남아. 이것을 有다. 이래요. 또 열매를 맺었다. 이런 얘기에요.
그래서 이게 식부터 유까지 하나의 행위가 과거의 결과물인 식이 원인이 되어서 경계에 부딪히면서 새로운 행위가 일어나서 열매가 맺어지는 과정, 이것을 12연기에서 뭐라고 한다?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러면 과거에 왜 이런 씨앗이 형성 되었냐?
왜 나에게 이런 씨앗이 있느냐?
이 씨앗이 출발점 아니오. 식이.
그거는 과거에 꽃피고 열매 맺어서 이런 씨가 있는 거요.
땅속에 씨가 저절로 있는 게 아니죠. 그 전에 열매 맺은 것들이 떨어져서 있는 거요.
왜 열매를 맺었냐? 꽃핀 적이 있고
왜 꽃이 피었냐? 자랐기 때문에
왜 자랐냐? 싹이 텄기 때문에
왜 싹이 텄냐? 씨앗이 있기 때문에
왜 씨앗이 있었냐?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이렇게 자꾸 돌아간단 말이오.
그 과거에 그 모든 것을 딱 요약해서 두 개 단위로 나눠버린 게 뭐다? 무명, 행이에요.
그러니까 맨 출발은
잘못 생각해서 어리석어서 의도가 일어난 거요.
어리석음에 의해서. 무명.
그래서 행위가 있고, 또 결과가 있고, 그것이 씨앗이 되어 또 있고, 이렇게 지속되어 온 거요.
과거에 수 없는 수백 수천 수억만 번의 그 되풀이 된 것을 요약해서 뭐라고 한다? 무명, 행 그래요.
무명 행으로 인해서 식이 있는 거요.
이 식이 과거의 결과물인 동시에 현재의 출발점입니다.
이것이 현재에 반응을 해서 일어난 결과물이 유에요.
이 유는 현재의 결과물이지만 미래의 뭐가 됩니까? 출발점이 되죠.
이 유가 열매지마는 곧 뭐다? 씨앗이오. 이 씨앗으로부터 다시 싹이 트는 게 생이요.
그래서 또 되풀이 되는 거요.
그것을 한마디로 뭐라고 한다? 생. 노. 사. 이렇게 부르는 거요.
그러니까 합해서 이게 몇 개가 됩니까? 12개가 되죠? 그래서 이것을 12연기다.
여기는 과거에 원인으로 인해서 현재의 결과가 있고
현재의 원인으로 인해서 미래의 결과가 있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가 겹쳐있고,
현재와 미래가 겹쳐 있는 거요.
그래서 이게 윤회한다 =되풀이 된다.
그러면 이것을 어디에서 끊어야 되느냐?
바로 현재에서 끊어야 돼.
현재 어디서 끊느냐?
과거에 결과물인 동시에 현재에 출발이 되는 그 핵심 키가 受수에요. 受수.
씨앗이 있어서 싹이 튼 게 受수죠.
싹이 텄으니까 자라서 꽃피고 열매 맺는 거란 말이오.
바로 싹이 틀 때 탁 뽑아버리는 거요.
씨앗은 이미 땅바닥에 있으니까 고르기가 어렵잖아.
그런데 그러지 않고 그걸 내버려 둬서 꽃피고 열매 맺게 되면
수없는 씨앗을 또 뿌리게 되는 거요.
그래서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초점, 키는 어디냐? 受수에요.
수를 알아차려야 돼.
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놓쳐버리면 금방 애로 옮겨버려요.
애가 일어나면 어떠냐? 이미 행동으로 가려고 그래.
그걸 안 그러고 참으면 어떠냐? 참아도 고가 생겨.
그래도 참는 게 좋아.
피우고 싶지마는, ‘피우고 싶다’ 이 말은 애에요. 피우고 싶지마는 안 피우는 거요. 그게 계율이에요.
그래서 수행은 계율을 청정히 지켜야 되는 거요.
(*계율: 하고 싶지만 하지 않는 것)
그런데 피우고 싶은데 안 피우면 그것도 苦고, 언젠간 또 어기게 되죠.
그래서 바로 이 受수가 일어날 때 알아차림이 있어야 돼. 깨어 있어야 돼.
고수를 고수로 알고, 낙수를 낙수로 알고, 비고비락수를 비고비락수로 알아차리는 거요.
그것이 다만 受임을.
고수는 그 자체도 괴로움이죠.
그걸 비탄해하면 더 큰 괴로움을 가져오죠.
낙수는 거기에 집착을 하게 되죠.
집착을 하게 되면 다음 단계에 괴로움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니까 고수도 괴로움을 가져오고
낙수도 괴로움을 가져오기 때문에
고든 낙이든 다 苦고가 된다.
이걸 꿰뚫어 알아야 인생은 苦고다. 이걸 아는 거요.
인생에는 고와 낙이 있는 데
고만 고가 아니라 낙도 고다.
이걸 꿰뚫어 알아야 되는 거요.
그래서 受수는 그것이 낙수도 고수든 그것은 苦고다.
그래서 觀受是苦관수시고. 이런 말이 나오는 거요.
(*사념처: 관신부정, 관수시고, 관심무상, 관법무아
관신부정(觀身不淨) : 몸은 깨끗하지 못하다,
관수시고(觀受是苦) : 느낌은 괴로움이다
관심무상(觀心無常) : 마음은 항상하지 않고 계속 변한다
관법무아(觀法無我) : 존재는 실체가 없이 인연을 따라 형성된다)
약간 교리적인 설명을 해서 부처님이 이렇게 교리적인 설명은 안하셨을 거예요. 그죠.
내가 부처님 법문을 해석한다는 게 도로 더 어렵게 만들어 버렸어.
이것은 제가 오늘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바로 우리는 고수를 받습니다.
그런데 가르침을 듣지 못한 사람은
고수를 받고, 비탄해 빠지고, 슬퍼해서 더 큰 괴로움을 받는다. 이 말이오.
또 낙수를 받으면 거기에 집착을 해서 다시 괴로움을 받는 거요.
이게 어리석은 자가 가는 길이다.
법을 만나지 못한 자가 가는 길이다.
그런데 법을 아는 자는 어떠냐?
고수가 일어날 때 그것을 고수인 줄 알고
거기에 빠져들지 않는 거요.
그래서 비탄에 빠지거나 슬프거나 그러지 않아. 고수를 그냥 고수로,
그것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무상임을 확연히 아는 거요.
그러니까 고수라고 해서 싫어함을 일으키지 않는 거요.
낙수라고 해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거요.
다만 수를 수로만 바라보는 거요.
초심자는 이건 어렵습니다.
고수가 일어나면 바로 혐오가 일어나고
낙수가 일어나면 바로 갈애로 가버려요.
거기는 순식간에 가버려요.
번갯불처럼 그냥 충동적으로 지나가버려.
그러기 때문에 아주 순간에 깨어있지 않으면 거기서 차단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순간에 깨어있으라는 거요.
제법을 있는 그대로 여여히 보라 하는 것은 바깥 세계를 얘기하기보다는 사실은
고를 고로, 낙을 낙으로,
그것이 무상함을 알아차리는 그 뜻이 더 강합니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내가 지은 인연으로 해서 그 과보로 고를 받지마는
그걸 또 인연으로 해서 또 고를 받을 원인을 짓지 않게 된다.
과거 거를 받는 것으로 끝나지 새로움은 짓지를 않게 되니까
제1의 화살은 맞을지언정
제2의 화살은 맞지 않는다. 이렇게 돼.
이게 법을 아는 자와 법을 모르는 자의 차이라는 거요.
여러분들도 이제 법을 알았으니까, 제1의 화살은 무의식적으로 받는다. 이 말이오.
나도 모르게 누가 쏴서 내가 화살을 맞아버렸어. 방어할 여유도 없었어.
그런데 일단 화살을 맞았다면 그때 정신을 바짝 차려서 두 번째 화살은 피해야 된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어서 첫 번째 화살을 맞고 아프다고 아우성치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두 번째 화살을 또 맞고
더더욱 괴로워 아우성치다가 세 번째 화살을 또 맞고
이런 식으로 윤회고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제1의 화살을 맞을지언정
제2의 화살은 맞지 말라 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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