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 왕사성 중림정사에 있을 때 얘깁니다.
한 바라문이 중림정사를 방문했어요.
그리고는 부처님께 막 화를 내면서 욕설을 퍼부었어요. 사연이 무엇인가 알아봤더니 같은 바라문 종족의 젊은이가 부처님의 제자가 된 거요. 출가를 한 거요.
요즘 식으로 해석하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주 착실한 기독교 신자나 그렇지 않으면 목사님이 어느 날 불교신자가 되거나 출가해서 스님이 된 거요.
그러니 그 사람이 찾아와서 ‘왜 우리들의 아들을 뺏어갔는가?’ 이렇게 해서 항의하고 욕설을 한 거요.
그 사람의 이름, 그 바라문의 이름을 경전에 기록에는 아수린다카라고 기록이 되어 있어요.
한문으로 고치면 아수라의 왕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성냈을 때, 화를 냈을 때 그 모습이 뭐와 같다는 얘기요? 아수라와 같다.
그래서 아수라의 왕이다. 이런 아마 별명이 붙은 것 같아.
그래서 인간이 화가 났을 때의 그 모습은 마치 이 우주의 깡패인 아수라와 같다.
이 아수라는 아주 힘이 셉니다. 인간에 비해서 수백 수천 수만 배가 된다. 그래서 아수라는 신에 속합니다.
능력면에서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만한 그런 큰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이 아수라는 자기 생각이 옳다는 게 너무너무 강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보거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 못마땅하기 때문에 보자마자, 말을 듣자마자 화부터 내며, 폭력을 행사하는 거요. 그래서 만나기만 하면 난장판이 됩니다.
‘아수라들이 벌린 난장판’ 이것을 아수라장, 아수라장이 그래서 나온 말이오. 아수라들의 싸움터 같다. 전쟁터 같다. 줄이면 수라장. 왠 수라장이냐? 이러죠. 수라 또는 아수라 라는 말에서 나온 거요.
그때 부처님께서는 침묵을 지키셨어요. 그 사람이 욕설을 하는데도 부처님께서는 아무런 말씀을 안 하셨어. 그러자 그 바라문이 하는 얘기가
“사문이여, 그대는 졌도다. 사문이여 내가 이긴 것이다.”
이렇게 얘기했어.
자기가 와서 욕을 하는데 부처님이 한마디도 못하시는 거요. 그러니까 자기가 생각할 때 누가 이긴 거다? 내가 이긴 거다.
‘너 봐라, 내 말에 대구도 한마디 못하지 않나. 이 바보 같은 놈아.
그러니 이번 싸움은 내가 이긴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께 큰 소리를 쳤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 바라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욕과 비방을 늘어놓고서 우둔한자는 내가 이겼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는 올바른 인내를 아는 이의 것이다.
성내는 자에게 되받아 성내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성내는 자에게 되받아 성내지 않는 자는 2가지 승리를 얻는다.
다른 사람의 노여움을 알고, 정념으로 스스로를 진정시키는 자는 스스로에게 이김과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도 이기는 것이다.”
상대가 화를 낸다고 나도 덩달아 성내는 사람은 승리자가 아니다. 패배자다.
상대의 작전에 말려들었다. 상대에게 끄달리니 상대에게 진거고, 자기가 자기 분을 못 이기니 자기 자신에게도 진 거니, 이거는 2가지 패배자에 속한다.
상대가 내 앞에 와서 화를 내면서
나에게 화를 복 돋워도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흥분하지 않으면
상대에게 끄달리지 않기 때문에 상대를 이긴 것이고,
또한 내가 내 자신에게 이긴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세상에는 4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1. 상대를 보고 상대가 가만히 있는데 내가 화를 벌컥 내는 사람이오. 내가 시비를 일삼는 사람이다. 내 생각으로 분별심을 일으켜서 상대를 보고 화를 내죠.
여러분도 그런 경우가 있죠. 상대가 하는 일이 못마땅해서 내가 화가 나는 거요.
상대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나, 해 놓은 일을 보면 내가 화가 나는 거요.
상대가 화를 내서 내가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상대는 가만있는데 내가 화를 내는 거요.
이것이 제일 어리석은 자요.
여러분들은 이 경우는 없겠죠? 그런데 저는 이런 경우가 많은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제일 하수인가 봐요.
2. 상대가 가만히 있는데 내가 화를 내거나 어떤 말을 듣고 모습을 보고 이렇게는 화가 안나.
그런데 상대가 나한테 화를 먼저 내. 그럴 때는 나도 화가 나.
“왜 화가 나느냐?” 물으면,
“너가 화를 냈지 않았냐? 네가 먼저 화를 냈지 않았냐? 너가 나에게 화를 내는데 내가 어찌 가만히 있으란 말이냐.”
이렇게 화를 내는 상대에게 되받아서 화를 내는 자, 두 번째 사람이오.
3. 상대가 화를 내는데, 화가 나지마는 참는 사람이오.
상대가 나에게 화를 낼 때, 내가 되받아서 화를 내면 내가 상대에게 끌려가는 거고, 내가 손해다.
그래서 화가 나지마는 화를 내지 않는 거요. 화를 참는다. 이 말이오. 현명한 사람이죠.
그러나 이렇게 참는 사람은 언젠가는 터지죠.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한 번도 두 번도 아니고” 이렇게 해서 결국은 터집니다.
터지면 참았던 사람의 화는 불같습니다. 폭탄처럼 폭발하죠.
마치 무거운 솥뚜껑이 증기를 눌렀다가 어느 순간에 폭발해서 튕겨나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착한 사람이 무섭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왜 무서울까? 착한 사람은 잘 참거든요. 참다가 참다가 터지면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언론지상에 나타나는데 아내가 남편을 칼로 찔렀다든지, 이렇게 날 때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아, 그 여자 분이 참 독한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가서 조사를 해보면 하나같이 착한 여자 분들이오.
착하기 때문에 참는 거요.
참다가 참다가 터져버릴 때는
눈에 뵈는 게 없어지는 거요.
그래서 옛말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 이런 말이 있었죠? 그때 여자는 육신의 여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때의 여자라는 것은 약자라는 뜻이에요. 약자는 힘 있는 자에게 억눌리기 때문에 참게 됩니다. 그러다 그 억누름이 지나치게 되면 폭발하게 된다는 거요. 그래서 사회적으로 말하면 약자는 폭동을 일으키죠.
크게 보면 그것도 다 어리석음이지마는 개인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에요. 이런 말은 여자들은 독하다. 이런 말로 해석을 하는 것은 사회적인 형편을 모르는 사람들이오. 신체적으로 여자이기 때문에 오는 문제가 아니라, 봉건시대에 여성이 권리가 없고 남성으로부터 억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한마디로 말하면 사회적인 약자였기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죠.
참음이 지나칠 때 이렇게 폭발하게 되는 거요. 그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에요.
그래서 착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일정한 범위가 넘어가면 무서운 사람이 되는 거요. 그래서 이런 말이 있어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 이런 표현도 있죠. 이것은 참기 때문에 그래요.
수행자는 참아서는 안 됩니다.
‘그럼 참지 말고 화를 벌컥 내고 싸워야 됩니까?’ 아니에요.
수행자는 참을 것이 없어야 한다.
참는 것을 인욕이라 하고
참을 것이 없어서 참는 것을 인욕바라밀이라고 그래요.
참을 것이 없다.
참을 것이 없기 때문에 오래 참는 거요.
참을 것이 있는 사람은 참는데 한도가 있는 거요.
참을 것이 없는 것을 그래서 괴롭지가 않은 거요.
그래서 이것을 인욕바라밀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참을 것이 없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내가 옳다, 상대가 그르다.’ 라고 하는 분별이 끊어져야 합니다.
내가 옳다 하는 것은 내 관점, 내 생각일 뿐이오.
그런 분별이 그런 생각이 일어났을 뿐이지,
이것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에요.
‘내가 옳다’라는 것을 버리게 되면 화가 일어나지 않게 된다.
화가 일어나지 않으니까 화를 참을 것이 없는 거요.
그러면 ‘내가 옳다’라는 생각을 버리게 되면,
또는 상대를 이해하게 되면,
상대가 화를 낼 때, ‘저 사람 입장에서는 저 사람의 살아온 삶의 배경이나 처지나 조건에서 보면 그럴만하겠다.’
그건 그 사람의 행위가 잘했다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이해되어지면, 그것이 인정되어지면 내가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럴 만 하겠다.’
이렇게 이해되어질 때는 화가 안 일어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잘 참는 것 같아요.
“야, 저 사람이 저런 수모를 겪고도 어떻게 참을까, 인욕보살이다.”
그런데 본인은 정작 참는 게 아니에요.
이해하고, 인정하고, 더 나아가서는 불쌍히 여기고, 연민하는 거죠.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자신에게 화내는 상대편을 보면서 빙긋이 웃을 수도 있었고,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뭔가 항의를 할 때, 엄마가 관점이 다를 수도 있죠.
우리 아이가 말을 잘 못했는데, “어, 쟤가 말을 제법 잘한다.” 뭐 이렇게 관점이 다를 수가 있지 않습니까?
“쟤가 배가 고팠구나.” ‘왜 엄마 늦게 왔어.’ 이런 말을 들을 때 늦게 왔다고 비난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때가 넘기도록 오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고파서, 배고픈 심정에서 나온 말이 그런 식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을 엄마가 알게 되면
“그래그래 엄마가 좀 늦었다. 배고팠지, 밥 빨리 차려줄게.”
이렇게 대응 되는 엄마는 매우 많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이해하기 때문에.
그런데 아이는 엄마를 잘 이해를 못해요. 엄마가 아무리 힘든 고생을 하고 와도 아이는 엄마가
‘우리 엄마가 이런 일로 늦었구나.’ 이렇게 이해되지 않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린아이고,
이해하는 사람은 어른이에요.
그래서 우리말에 어린아이라는 말은 어리석다는 말과 일치하는 거요.
훈민정음에 ‘어린백성이’ 이 말은 ‘어리석은 백성이’ 이 말이란 말이오.
서양에서는 어린아이를 천사에 비유하지마는
동양에서는 어린 아이는 어리석음에 비유된다. 뭘 모른다.
이런 상징으로도 많이 쓰이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상대를 이해하게 될 때는
물끄러미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고,
오히려 이해되기 때문에 빙긋이 웃을 수도 있고,
오히려 위로의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자기 종족이, 자기 종교인이, 부처님의 제자가 된 거에 대해서 화가 나서 씩씩대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신 거요.
그런데 그 상대편은 부처님이 잘못해서 말이 딸리니까 자신에게 항복해서 그런 줄 알죠.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침묵을 지키신 거요.
이렇게 침묵을 지킨다는 것,
이것은 상대에게 끄달리지 않는다는 거요.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잘 컨트롤 하고 있다는 얘기요.
그래서 상대에게도 이기고 나에게도 이기는 자다.
2가지 승리를 행하는 자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러니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이 세상에는 4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상대가 화를 내지 않는데도 내가 먼저 화를 내는 사람
상대가 화를 내기 때문에 내가 덩달아 화를 내는 사람
상대가 화를 내지마는 나는 참는 사람
상대가 화를 내는데도 나는 빙긋이 웃는 사람, 침묵하는 사람
이것은 화가 나는데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아니고, 화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
화가 일어날 때 화가 일어나는 자신을 알아차려서 그냥 놔버리는 사람.
그래서 참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목표가 인욕보살이 되어야 된다.
인욕바라밀을 행해야 된다.
그런데 인욕 뒤에 바라밀이 붙은 걸 잘 몰라.
바라밀이라는 말은 바라밀다의 준말인데,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다. 저 언덕에 이르다. 이런 뜻이에요.
인욕을 함으로서 저 언덕에 이르렀다. 인욕을 통해서 모든 괴로움의 바다를 건넜다. 이런 뜻이에요.
그런데 참는 것은 괴로움이지. 그러니까 그것은 괴로움의 바다를 건넌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서 인욕과 인욕바라밀은 서로 다르다.
이 세상에서는 인욕을 인내를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인욕바라밀을 행해야 한다.
이 세상에는 원수를 용서하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용서할 것이 없어야 한다.
미워하지 않기 때문에 용서할 것도 없는 이것이 수행자의 길이다.
사람이 화를 낼 때 한번 보세요. 화가 나면 어떻게 됩니까?
얼굴 인상이 어그러지죠. 두 눈은 부릅뜨죠. 두 주먹은 불끈 쥐죠. 입은 벌어지죠. 화내는 사람의 얼굴을 한번 보세요. 제정신이 아니에요. 미친 상태!
그래서 우리말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게 없다.’ 어리석어진다. 이 말이에요.
누가 칼이나 총을 가지고 나를 죽인다고 하면 제정신일 때는 살려달라고 빌죠.
그런데 화가 나면 어떻게 됩니까? 도로 뒤에 있던 사람이 앞에 나서서, 옷을 더 껴입어야 되는데 입은 옷을 홀딱 벗어서 배를 드러내놓고
“그래, 찔러라. 찔러. 죽여라. 죽여.” 이렇게 나가잖아. 정상적이 아니에요.
이것은 미친 증상에 속하는 거요.
그래서 화가 나면
즉, 마음이 들끓어버리는 거요. 끓는 물처럼.
그래서 혼미해진다.
화가 나서 광분하는 것은 경계에 끄달리는 행위고,
자기가 자기 자신을 컨트롤 하지 못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두 가지 패배를 맛보는 자다.
이 바라문은 이 얘기를 듣고 크게 뉘우치고, 깨닫고, 출가를 해서 훌륭한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얘기도 있어요.
부처님에게 어떤 바라문이 욕설을 했어. 욕설을 해도 부처님이 아무 말 없이 길을 가니까 이 바라문이 흙덩이를 주워서 부처님에게 집어던졌어요. 그런데 마치 바람이 거슬러 불어서 그 흙먼지가 다 자기가 뒤집어썼어요. 그걸 보고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했어요.
“누군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욕설과 노여움을 퍼 부우며 청정한 사람을 해하려 할지라도 그 악은 그에게 다가간다. 바람을 던진 흙이 오히려 자신을 더럽히는 것과 같이.
바로 우리가 화내가 짜증내고 미워하는 것은
남을 해치지 이전에 자기 자신을 해친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어리석어서
스스로를 해치는 행위를 잘했다고, 이겼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은 패배자의 길입니다.
그러니 우리들 다 이 좋은 부처님 법문 듣고
오호, 내가 이겼다고 생각했더니 이게 패배자의 길이구나.
승리의 길로 나아가야 되겠다.
설령 상대가 화를 내더라도 침묵하거나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내가 2가지 승리를 얻는 게 된다.
이것을 우리가 다시 한 번 명심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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