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최근 연애에 대한 책을 읽고 궁금한 것이 생겨서 질문 드리게 됐습니다.
제가 예전에 혜민스님 책 읽고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읽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거리가 필요합니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걸 계속 생각하고 있었고
또 가까운 사람일수록 예의를 잘 갖추고 잘 대하라는 그런 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근데 이렇게 하니까, 제가 받을 상처를 두려워하면서 관계에 우위에 서려고 하고
영원히 사랑받으려 하며 계산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거 같고 친구도 점점 줄어드는 거 같습니다.
저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그리고 법륜스님의 사랑받으려 하지 말고 사랑하라는 글을 읽게 됐었고, 이게 저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데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계산적인 관계이면서 요즘 남녀 간의 밀당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까운 사람일수록 예의를 지키라는 게 저의 가족인 부모님이랑 동생들 그리고 동성 친구들한테도 적용을 해야 되는 건지 좀 헷갈립니다.
그리고 만약에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한 사람을 만나서 연인이 되고 결혼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게 인간 욕망이라면 그게 잘못된 게 아니라면 왜 세상 사람들은 양다리 불륜이라고 하고, 동성 결혼을 반대하는지 궁금합니다.//
요점이 뭐요? 양다리 걸치는 불륜이 왜 생기느냐? 이걸 묻는 거요, 동성결혼이 나쁘다고 하는데 이게 나쁘냐? 이걸 묻는 거요, 자기 지금 무슨 고민을 묻는 거요.
자기가 해보면 되잖아. 엄마하고 사이에서 밀당을 해보니까 이게 나한테 편한지 좋은지, 아빠하고 밀당을 해보니까 내가 행복한지, 동생하고 밀당을 해보니까 내가 행복한지, 자기가 직접해보고 남의 말 듣지 말고, 다른 사람이 경전에는 어떻게 써놨으면 “오, 진짜인가?” 한번 해보고, 안 맞으면 “에이, 부처님 말이 다 안 맞는 거야. 내가 해보니 아니잖아.” 해보니 맞으면 “오, 맞네.” 이러면 되지.
그런데 그걸 해보면 되지. 자기 지금 얘기 들어보니 밀당을 해보니까 더 불편하다는 거 아니야. 그럼 안하면 되지 뭘 그래? 하하하.
인간의 심리라는 게 어떠냐? 너무 가까이 가면 약간 좀 귀찮죠. 좋은 사람은 처음에 좋지만, 오래가까이 있는 사람. 누군가 나를 좋아할 때, 외로울 때 누가 나를 좋아해주면 엄청나게 좋지만, 좋다고 계속 옆에서 맴돌면 귀찮아요. 안 귀찮아요? 귀찮아져. 그래서 떨어졌으면 좋겠다, 그러는데, 떨어져버리고 좀 있으면 또 외로워.
외로워서 또 있었으면 좋겠다 이래요. 그래서 사람이 만났다가 헤어졌다. 만났다가 헤어졌다가 이런단 말이오. 그런데 이게 다 뭐냐? 왜 이런 문제가 생기냐? 자기 욕구대로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런 거요.
그러니까 이게 완전히 상대가
전지전능해야 되는 거요.
내가 가까이 있으면 좋겠다하면 착 옆에 붙어 있다가
좀 귀찮다면 착 멀리 갔다가,
보고 싶으면 착 옆에 나타나고.
이러면 얼마나 좋겠어.
그런데 상대가 욕구가 없으면
나의 욕구에 따라 맞춰주니까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그래서 보살은 자아라는 건, 내 욕구라는 게 없기 때문에 중생이 원하는 대로 거기에 천백억화신으로 나툰다. 그래서 중생의 요구에 수순한다. 이런단 말이오.
가까이 오라 그러면 갔다가 가라고 그러면 가고, 오라하면 오고, 이런단 말이오. 왜? 보살은 할 일이 없어. 할 일이라는 건 자기가 뭐 해야 되겠다. 이게 없다 이 말이오. 내가 뭐 해야 되겠다. 이게 없으니까, 아무 할 일 없기 때문에 가자하면 가다가, 가다가 가라하면 도로 오면 되고, 그러니까 아무 할 일이 없어.
그래서 중생의 요구에 수순한다. 이런 말도 있고, 그러려면 천백 억까지로 몸을 나투어야 되는 거요. 그래서 천백억화신이다. 그러니까 물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그릇 따라 그 모양을 나투듯이, 이렇게 표현을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중생은 자기 요구가 있어. 끊임없이 이래라, 저래라, 이랬으면 저랬으면 이런 요구가 있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우리는 지금 힘든 거요. 나만 요구가 있으면 괜찮은데, 이 세상 다 보디사트바고 부처고, 나 혼자면 중생이면 살만해.
그런데 주위에 있는 사람이 대부분이 다 누구다? 중생이야. 그러니까 자기도 자기 욕구대로 해달라는 거요. 나는 가라 하는데 자기는 있고 싶다. 이러는 거요. 나는 오너라 하는데 자기는 가기 싫다. 이러는 거요. 그래서 이게 안 맞는 거요. 그래서 갈등이 생기는 거 아니오.
그러니까 내 요구를 좀 내려놓을수록 내가 갈등이 좀 적어지는 거요. 내 요구를 내려놓으면 내려놓을수록 적어지는 거요. 그러니까 안 내려져서 문제이지, 내려놔지기만 하면 그게 더 나한테 도움이 된다. 이거야.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과 대화도 그거 아니오. 내가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은 것을 딱 가지고 와서 여기서 두 시간 강의하면 여기 두 시간 앉아있을 사람 몇 명이 있을까? 아무리 좋은 얘기를 해도 다 가버려. 딱 거기에 맞는 사람만 앉아있어.
그런데 자기 얘기 들어주고, 거기 얘기 해주니까, 눈이 똥그래서 이러고 앉아 있잖아. 그러니까 이것도 일종의 부처님의 대기설법이라는 건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는 거요. 그러니까 뭘 얘기해야 되겠다. 이게 없어야 돼.
그런데 자기의 요구를 다 들어준다. 이게 아니야. 얘기를 듣고 모순을 지적해주지, “너 틀렸다 맞다.” 이런 얘기는 안 한단 말이야. 저기 여자분 종아리는 내가 만지고 싶다. 그럼 만져야 되나? 안 만져야 되나? “만지지 마라.” 부처님이 이런 말씀이 없어.
만지고 싶으면 만져도 되는데, 뭐가 따른다? 과보가 따라. 성추행 범으로 감옥 가서 한 1년 살아야 돼. 그리고 엄청난 명예손실이 와. 그럴 때 감옥에 살면서도
“아이고, 그래도 한번 만져봤다. 기분이다.”
이러면 괜찮아. 그 사람이 나쁘든 좋든 나는 괜찮아.
그런데 대다수 99%는 감옥 가서 있어보면
“아, 조금만 참을 걸, 하고 싶어도 조금만 참을 걸.” 이런 생각이 들 거 아니오.
그러니까 이 조금 참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해서 에요? 나를 위해서 에요? 나를 위해서야. 그러니까 그걸 만지고 감옥 가서 1년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 자기가 자기한테 손해 끼치는 사람이고, 그 욕구에 따라갔더니 내가 손해를 봤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럴 때 욕구에 따라가서 손해나니까, 물으니까
“손해날 짓 하지마라.” 이러는데,
“만지고 싶은데 어떻게 안 만지요? 스님은 안 만지고 싶어요? 인간이 안 만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어요?” 이런 얘기를 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만지고 싶으면 그럼 만져라.
그래서 저는 “살기 싫다” 그러면 “살지 마라.” 이러지.
그럼 또 “애는요?”
“애는 고아원에 갖다 줘라.”
“어떻게 갖다 줘요?”
“그럼 살아라.” 하하하.
그게 뭐가 어려운 일이오.
“만지고 싶다면 만져라. 그런데 대신 과보, 인연을 지을 때만 네가 보지, 조금 있으면 과보가 따라서 감옥 간다, 1년.”
“싫은데요.”
“만지고 싶어도 만지지 마라.”
“만지고 싶은데 어떻게 안 만져요.”
“그냥 안 만진다.”
왜? 손해나니까. 손해나니까.
뜨거운 거 이거 어떻게 놔요?
어떻게 놓기는? 그냥 놓지. 뜨거우면.
이걸 방하착이라고 그래.
손해이기 때문에 그냥 놓는 거요.
거기 무슨 이유가 있어.
‘어떻게?’ 이 말은 만지고 싶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놔라’ 이 말은 ‘만지고 싶은 생각을 놔라.’ 이어야 되는데,
‘어떻게?’ 그러니까 ‘그냥.’ 이 말이오.
‘어떻게’ 하면 ‘아, 방법을 찾고’가 아니에요.
‘놓기 싫다.’ 이게 핵심이에요.
“아침에 일어나고 싶은데 안 일어나지는데요.”
“그럼 뭐가 문제니?”
“예. 몸이 문제에요.”
몸은 공 해. 문제가 없어.
그러니까 “일어나야 되는데, 일어나야 되는데. 일어나야 되는데.” 한 10번쯤 해봐요.
이 본질이 뭐요?
일어나기 싫다 아니요.
‘일어나고 싶은데 못 일어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개가 흙덩이를 쫓는 것과 같고
‘아, 일어나기 싫어하구나.’ 이렇게 탁 본질을 꿰뚫어야
사자는 사람을 쫓는다.
사람이 흙덩이를 집어 던지면 개는 흙덩이를 쫓아가요.
사자는 흙덩이를 던지는 사람을 확 덮쳐버려. 그럼 단박에 끊나버려.
‘일어나기 싫구나.’
이 본질을 꿰뚫어야 된단 말이오.
일어나기 싫으면 자면 돼.
그럼 과보를 받는다.
과보를 받아들이면 되요.
아이고, 과보. 오늘 직장 잘린다.
그러면 일어나기 싫어도 어떻게 해야 된다? 일어나야 된다.
어떻게 일어난다? 벌떡! 하하하.
그런데 이 교리니, 뭐니, 복잡하게 만들어서 그때 어떻게 일어나느냐고 말에 말에 꼬리를 물면 복잡해지는 거요. 30년을 공부해도 공부가 끝이 안 나는 거요. 책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선에서 그런 거 필요 없다. 그게 지식이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래서 불립문자 얘기가 나오는 거요.
공부하기 싫은 사람이 들으면,
“아이고 공부 안 해도 되네.” 또 이래서 무식쟁이를 만들어요.
그래서 결론이 났어요? 얘기 듣다가? 스님이 웃고 얘기하다 보니 자기 문제가 해결이 됐어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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