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기후현상이라는 게 정말 그 피해있는 밑에 살다보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데, “하늘에 구멍이 뚫렸나?” 그러잖아요. 폭우가 쏟아지면. 그런데 그 구름 밖에 있는 곳에서는 아주 날씨가 맑지 않습니까? 이런 걸 보고도 우리가 배울 게 있다는 거예요.
그 구름 밑에 있는 사람은 하늘이 무너진 것 같고, 종말이 온 것 같고,
구름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 문제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구름 안에 있다. 구름 밑에 있다는 것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비유한다면
자기에 사로잡혀 있으면, 자기 생각에 빠져 있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웃사람이 볼 때는 어때요? 아무 문제도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자기 사로잡힘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기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면
사실은 괴로울 것이 없다.
한 생각을 놓아버리면,
괴로울 일이 없다.
이런 옛 선인들의 말이 진실이구나.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가끔 우리도 폭우가 쏟아지는 그래서 정말 세상이 다 떠내려가는 게 아닌가, 노아의 홍수 같은 그런 느낌이 들 때라도 비행기를 타고 그 구름위에 올라가보면 태양은 찬란히 빛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도 그 구름 밑에 사는 사람에게는 지구의 종말 같지만, 사실은 그 구름대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세상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거요.
그런데 자기 경험을 가지고 지나치게
‘세상은 이렇다.’ ‘세상은 저렇다.’ 라고 말하면
그것이 편견이 되기가 쉽다.
여러분들도 여러분들 남편이나 아내, 직장 동료나 상사, 아랫사람. 또는 밖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어떤 사람과 어떤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장면을 보고 그 사람이 이렇다. 그 사람은 저렇다. 이렇게 단정 짓는 것도 매우 위험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즉,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각에서 다른 사람과의 그 사람의 만남을 볼 때 그 사람은 또 내가 조금 전에 봤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볼 수도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사물을 한 측면,
특정한 시점에서 한 측면만 보고
그것이 그 사물의 전체모습이다.
하면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거요.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듣고
내가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류가 된다.
그러면 사물을 전체적으로 보려면 어떠냐?
앞만 보지 말고 뒷면도 봐야 된다.
왼쪽만 보지 말고 오른쪽도 봐야 된다.
위만 보지 말고 아래도 봐야 된다.
그래야 사물의 전모를 본다.
이 사물의 전부를 보는 것을
통찰력이라고 그래요. 통찰력.
이 통찰력을 지혜라 이렇게 부릅니다.
지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매우 필요합니다. 그런데 지식은 자칫 잘못하면 편견이 되기가 쉽다. 그래서 우리가 이 편견이 되기 쉬운 지식을 뭐라고 그래요? 단편적 지식이라고 그러죠. 어떤 한 측면만의 진실이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단편적 지식에 너무 치우치면
지혜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어리석다. 무지하다.
이런 평가를 받게 되죠.
결과는 괴로움이 생긴다.
화가 생긴다. 가슴이 답답해진다.
미움이 생긴다. 원망이 생긴다.
이런 정신적으로 굉장히 부정적인 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통찰력이 생기면,
즉 지혜가 생기면 어떠냐?
괴로움이 사라진다.
분노가 사라진다.
답답함이 사라진다.
미움이 사라진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이렇게 말했어요.
진리라는 것은
어떤 특정한 것을 주장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진리라고 하는 것은 사물의 전모를 보는 게 진리다.
불교만 아는 게 진리가 아니고,
기독교만 아는 게 진리가 아니라,
불교도 알고, 기독교도 알고, 무슬림도 알고,
종교도 알고, 과학도 알고,
개인도 알고, 사회도 알고,
이것이 우리가 사물의 전모를 아는 거다.
이 사물의 전모를 알아서
즉, 통찰력이 생겨야
여러분들에게 지혜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따고, 대학 교수라고 하더라도 지식에 편중되어 있으면 지혜가 없는 사람이 되고, 비록 시골에서 무학으로 농사만 짓고 살아도 지식은 부족할지 몰라도 지혜 있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옛 사람 중에도 지혜 있는 사람이 있고, 오늘 현대에 많은 지식을 쌓은 사람 가운데에서도 지혜가 없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현대인이 옛사람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 할 수가 없는 이유는
이 행복은 지혜가 있어야
괴로움이 사라지고 행복도가 높아집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많은 지식을 갖고 있지마는 주로 편중되어있다.
그러니까 어떤 한 측면, 한 부분, 한 과목, 고것만 알지
사물의 전모를 모르기 때문에.
그래서 현대인들은 자기주장이 아주 강한 거요.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자기가 경험, 자기 전공,
이것을 갖고 고집하는 것이 매우 세다.
그러니까 홍수피해가 난 지역에 살던 사람은 순간적으로 “하늘에 구멍이 뚫렸나?” “종말이 다가왔나?” 이런 생각을 하기가 쉽다. 그 경험에 사로잡히면. 또 구름밖에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거 미친놈들”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경험에 노무 사로잡혀도
편견이 된다.
그 다음에 경험 없이
지식만 갖고 얘기 하는 것도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경험을 했어요. 결혼도 해봤고, 자식도 낳아 봤고, 장사도 해 봤고, 직장생활도 해 봤고.
그런데 여러분들이 갖는 그 문제는
자기 경험에 너무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제가 앞만 보고 얘기하는 것을 “뒤도 좀 보세요.” 위만 보고 얘기하는 것을 “아래도 좀 보세요.” 왼편만 보고 얘기하는 걸 “오른편도 좀 보세요.” 이러니까 또 여자가 물었을 때 “남자입장도 좀 생각해 보세요.” 그랬다고 남자라고 남자 편든다고 난리고. “아내입장 좀 생각해 보세요.” 그랬더니 또 남자들이 댓글에 난리오.
“중이 결혼을 안 해봐 놓으니 그따위 소리하지. 직장생활 하는 데 언제 들어와 애를 돌본단 말이냐? 갈라서는 게 낫지.” 이러면서 또 난리요.
그러니까 왼쪽을 보는 사람에게 나도 왼쪽을 보고 “아, 그러네요.” 이게 공감이에요. “그러나 오른쪽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게 눈을 뜨게 하는 얘기인데,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에게 그런 소리 하면 욕 얻어먹어요.
스님이니까 그래도 그런 소리하면 “혹시나 스님은 뭐가 있나?” 싶어서 왜 우리하고 다르잖아요. 머리도 깎았다고 옷도 이상하게 입고. 그러니까 이래서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어요. “좋은 점은 뭐가 있나?” 싶어서 일단은 귀를 기울이는 거고, 나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 맘에 안 들면 “자기가 뭘 아는데?” 이래요.
경상도에서 할머니가 질문을 하면서 하는 얘기가, “아이고 스님이 장가도 안가보고 애도 안 키워봤는데 무슨 시건이 있겠노?” 이래요. 시건이 무슨 말인지 알아요? 그러니까 무슨 지혜가 있겠나. 이런 얘기요. 순 우리말로 “꽤. 슬기. 지혜. 이런 게 있겠느냐?” 그것을 경상도 말로 시건이라고 그래요. “스님이 뭔 시건이 있겠노? 지가 뭐 해보지도 않은 게.” 이렇게도 얘기해요.
이제 그런 것들이 여러분들이 “아, 스님이 저것을 어떻게 아나?” 하는데, 구름 밑에도 가서 비도 맞아보고, 구름위에 올라가서 해가 쨍쨍 거리는 것도 봐야 된다. 비를 막 맞고 홍수가 나서 집이 떠내려 갈 때도 “지구 종말이다.” 그러지 말고, “저 구름위에는 지금 태양이 쨍쨍 내리쪼인다.” 이것을 알아야 되고, 오늘 여기 우리가 햇볕이 쨍쨍하더라도 저 구름 밑에 사람들은 지금 매우 큰 고통에 처해 있다. 이것을 알아야 되는 거요.
그런데 한나라 안에서도 우리가 저 남부 지방에서 일어난 것을 여기 있으면서 경험 안하니 모르잖아요. 하물며 우리가 지금 서로 감정이 적대적이 되어 있는 남북 간에는 더더욱 더 심하겠죠. 그런데 그것이 또 사람이에요. 사람은 늘 자기 생각이 옳다 하는데 사로잡혀서 살게 된다.
여러분과 저와의 대화는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 게 아니라, 이렇게만 본 것을 저렇게도 볼 수 있다. 하는 것을. “안중근 의사는 애국자다.” 이거 한국 사람관점에서 그러는데, 일본 사람들은 뭐라고 그래요? 일본 사람이 볼 때는 “자기나라 수상을 테러했다.” 이렇게 보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어느 것이 옳고 그르고가 아니라
이렇게 관점에 따라 똑같은 것도 달리 보인다.
그러니까 객관적 사실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죽였다. 암살했다. 하는 것이 객관적이라면, 그것이 압박받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애국적 행동이 되고, 위험을 무릅쓴 애국적 행동이 되고, 지배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테러가 된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오늘 중동에서 일어난 사건도 미국의 입장에서, 지배하는 입장에서 볼 때는 테러가 되지만, 압박받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순교라고 말하잖아. 그죠? 순교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전에는 우리가 주로 약자의 편에서 사물을 봤는데, 요즘 우리가 언제 부턴가 강자의 편에서 사물을 보는 눈이 보편화 되어 있어요. 어떤 이유인지. 모든 사물을 강자 편에서 자꾸 봐요. 그러니 우리가 약자 편에서만 보면 피해의식에 너무 사로잡히고, 강자 편에서만 사물을 보면 도대체 세상민심을 몰라요.
오늘날 우리나라 정치 지도자들이 세상민심을 모르죠.
여러분들이 지금 얼마나 사는 게 힘든지
저 사람들은 전혀 몰라요.
모르니까 지금 저러고 난리를 피우고 저러지.
“아는 데 저렇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아는데 저렇다.” 그러면 안 돼요. 그런데 저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은 아니오.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 몰라요. 그러니까 어리석은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있지만,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좀 곤란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자기가 착할지는 몰라도
어리석을 수는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착한 게 곧 옳은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착하다는 생각 때문에
자기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가 아주 쉽다.
그래서 이게 착하기는 착한데 인생이 괴로워요.
원망이 많고. 피해의식이 많고.
“나는 착하고 열심히 했는데, 왜 내 인생은 이런가?”
그런데 이 괴로움이라는 것은
어리석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거든요.
그래서 오늘 여러분과의 대화는 특별한 대화가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왼쪽에서 보고 “이거에요.” 하고 괴로워하면 내가 “오른쪽에서 한번 봐요.” 이런 역할을 내가 해 주는 것뿐이다. 이런 얘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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