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는 누구나 깨달음을 통해서 윤회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가르치신 것으로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근데 여기서 깨달음이란 도대체 어떠한 개념의 것인지
그리고 깨달음을 얻게 되면
어떻게 해서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윤회의 고통이라는 게 뭐냐?’ 하는 걸
먼저 알아야 돼요.
인도에서는, 전통적인 인도의 힌두 사상에서는
사람이 태어나고 또 죽고
또 다시 태어나고 또 죽고
다시 태어나고 또 죽고
즉 생이 계속 돌고 돈다
이걸 윤회라 그래요.
그래서 좋은 일 좀 하면 좋은 데 태어나고
나쁜 짓 하면 다시 지옥이나 환경이 나쁜 데 태어나고
또 그 죄를 다 하면 또 좋은 데 태어나고
복을 다 까먹으면 또 나쁜 데 태어나고
이렇게 돌고 도는 인생.
그러니까 좋은 데 태어나든 나쁜 데 태어나든
그것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좋은데 태어나든 나쁜 데 태어나든, 크게 보면
결국 이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것이 인생의 가장 큰 고통이다.
이런 가르침이에요.
그럼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브라만 신을 믿고
거기에 자기 지난 생에 지은 과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렇게 하면
윤회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자기 계급 자기의 직분에 충실하고
이러면 벗어날 수 있다
이런 데서 힌두 신앙이 생겨나거든요.
힌두라는 것은
한 가지 어떤 누군가가 창시한 게 아니라
여러 민간 신앙들이 같이 결합된 거기 때문에
부자를 지내면 업이 녹는다든지
강가강에 모욕하면 업이 소멸된다든지
여러 다신교니까, 여러 이제 그런 가르침이 있다는 거죠.
그리고 좀 철학적으로 이거를 연구한 게 우파니사드 철학인데
하늘에는 브라만에는 신이 있다.
창조신이 있는데
그 신은 항상 하신다, 항상 한다.
그러고 그 신은 즐거움이다.
그 신은 진정한 나다.
그것은 성스러움이다.
이 네 가지를 상락아정이라 그래요.
항상하고, 즐거움이고
그것이 진정한 나고, 그것이 성스럽다 하는
네 가지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런 얘기예요.
그런데 나에게도 아트만이라는 게 있다.
신의 분신인 아트만이라는 게 있고
이 아트만을 내가 제대로 발견하게 되면
신과 똑같이 된다.
나도 상락아정이 된다.
이래서 브라만과 아트만이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해탈한다.
윤회에서 벗어난다.
어쨌든 제가 정확하게 그걸 길게 설명하지만
대충 이런 철학관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런 믿음의 브라만 사상과
그런 철학을 어릴 때 청년 때 다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일을 보면
그런 믿음이 이 세상의 인간의 고통이 해결이 안 돼요.
사람이 믿고 뿌자를 지내고 이러면
고통에서 벗어난다는데
당시에 막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고, 빈부 격차는 심하고, 계급 차별은 심하고
성차별은 심하고 이러는데
그렇게 사람들이 기도하고 제사를 지내고 하는데도
왜 저 인간의 수많은 무참한 학살, 질병, 굶어 죽음, 차별, 학대
저런 게 왜 해결이 안 될까?
이런 늘 의문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또 수많은 깨달은 자들이 있어도
이런 인간의 고통이 해결이 안 되는
그런 데서 “왜 인간은 괴로울까?” 이런 것을 탐구했다는 거죠.
만약에 내가 먹을 게 없고 입을 게 없고, 잘 곳이 없고, 부족한 게 많으면
나도 “하느님 부처님 나 좀 도와주세요” 이렇게 되겠는데
그는 왕자로 태어났고 먹고 자고 있고 생활하는데
아무 불편이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렇다고 세상 사람이 볼 때는
“저 사람 무슨 괴로울 일이 있나?” 할 만큼 부러운 존재지만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고뇌가 적다고 말할 수 없는
많은 고뇌를 가지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어디 가서 빌기보다는
“왜 괴로울까 사람은? 왜 이런 고통을 겪고 살까?”
이런 걸 자꾸 탐구하고 연구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됐다.
그렇게 자꾸 탐구하고 연구하다 보니까
기존에 있는 브라만 사상에서는 모순이 많았는데
그 가르침하고 이 모순이 많았는데
그 당시에 신흥 사상가들이라고 하는 출가 사문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의 얘기는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부처님도 전통 사상에서 벗어나서
신흥 사상가의 대열에 합류를 했다.
자기가 처음부터 깨달아서 ‘이 길이 진리다’
이렇게 주장하신 분이 아니고
본인도 그들의 따라가 그 길을 가서
그래서 왕위를 버리고 출가를 하고
가족을 버리고 출가를 해서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정진을 했다.
이 말이에요, 6년이나.
그런데 주로 이 우리의 괴로움은
원하는 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괴로우니까
“이것 좀 도와주세요” 하고 주로 비는
그래서 자기의 바람이 성취됐을 때 얻는 그 만족감으로 즐거움을 얻는데
이 신흥 사상가들의 주장은
이 바람이 욕망이 모든 인간의 고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욕망을 씨를 말려버려야 된다
이렇게 고행주의를 걸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부처님도 여러 얘기를 들어보니까
본인도 그게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극단적인 고행을
그들을 따라, 그들보다 더하게, 고행을 해본 거예요.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남이 볼 때는
전에 왕자일 때는
“야 저 사람이 무슨 괴로울 일이 있겠노? 저 사람은 뭐 아무 문제가 없겠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정작 본인이 괴로웠듯이
엄청나게 극단적 고행을 하니까
주위에 있는 수행자들이 다 감복을 했어요.
“우와 저 사람은 곧 깨닫겠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까지 할 수 있냐?”
그랬는데도 본인은 아무런 깨달음이 없었어요.
이것도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저것도 사람이 부러워할 정도로는 갔는데
그러나 깨닫지를 못한 거예요.
즉 깨닫는다는 건 특별한 게 아니라
길을 못 찾았다, 이런 얘기예요.
그래서 본인이 자기 인생을 살펴봤다.
“뭐가 잘못됐냐?” 이거야.
그러니까 세속에 있을 때는 욕망을 따라갔다 이거야.
욕망을 충족해서
그 만족감으로 즐거움을 얻는 쪽으로 갔다, 이거야.
출가해서는 욕망을 억제하는 거로 갔다 이거야.
그래서 그것도 극단적으로까지 가봤다.
이 정반대의 길을 갔는데
둘 다 아니야, 모르겠어, 어쨌든 끝이 없어.
그랬을 때 그가 새로 발견한 건 뭐냐 하면
두 개가 같은 거라는 거였어요.
욕망이라는 게 있으면
우리나라 욕구가 있잖아요.
욕구가 있으면
우리는 거기에 대응을 하는데
하나는 따라가는 대응을 하고
하나는 거부하는 대응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정반대로 대응을 했는데
대응했다는 점에서는 같은 거예요.
“아, 여기 문제가 있었구나.”
욕망이 있어 먹고 싶으면
따라가서 먹든지
욕망을 따라가서 먹든지
안 먹겠다고 참든지
담배가 피우고 싶으면 피우든지, 아니면 참든지
근데 이 두 개는 정반대의 길이지만은
욕구에 대응을 했다, 반응을 한 거예요, 반응을.
그래서 그는 여기서
“반응이라는 점에서는 양쪽이 다 똑같은 거다.”
그래서 여기에서 뭐가 나왔나?
“반응하지 않기”
즉 욕망이 일어날 때
욕망인 줄 알고 반응을 안 하는 거예요.
“그래 따라하겠다”도 아니고 “안 하겠다”도 아니고
“따라 하겠다” 그러면 과보가 나타나고
“안 하겠다” 그러면 참으니까 스트레스가 쌓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따라 하지도 않고, 참지도 않고
그냥 “아 욕망이 있구나.”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하구나”
그냥 이렇게 알아차릴 뿐이다.
그러니 따라가지 않으니 과보가 생기지 않고
참지 않으니 스트레스가 안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막 수행을 한다고
이를 악 다물고 엄청나게 긴장해서 수행을 했는데
긴장할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편안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그냥 다만 알아차릴 뿐이다.
이것을 중도라 그래. 중도.
이 새로운 길을 발견해서
이제 편안한 가운데 정진을 거듭해 나갔다.
그래서 이치를 안 거예요.
욕망이 일어나고
욕망이 충족되면 즐거움이 생기고,
욕망이 충족이 안 되면 괴로움이 생기고
충족이 되면 즐거움이 생기는데
다시 욕망이 커지고
그다음에 또 충족이 안 되면 또 괴로움이 생기고.
그러니까 고가 있으면 락이 있고
락이 있으면 고가 있다.
그러니까 인생은 고와 락이 늘 되풀이 된다.
“아 윤회라는 건
사람이 나고 죽고 나고 죽는 게 아니라
인생이라는 것은 고락이 되풀이되는 게 윤회다.”
그럼 이 고락이 되풀이되는 윤회로서 벗어나려면 어떠냐?
그 고락의 뿌리가 욕망인데
욕망에 반응을 안 해버리면
고도 안 일어나고 락도 안 일어나는 거야.
이것이 해탈이다 하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따라 정진해서
마침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경지
즉 두려움도 없고, 괴로움도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자기가 이르러서 보니까
이게 어려운 길이 아니었어요.
길을 몰라서 이래도 해보고 저래도 해보고 헤맸는데
이것은 쉬운 길이에요.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괴로워하면
얘기를 가만히 들어보고
몇 가지 질문을 하면서 사람들이
“어 이거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어 이거 내가 잘못 알았구나”
이렇게 자각을 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해 가는 거예요.
그게 깨달음이라는 어떤 신비주의인 게 아니에요.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달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걸 깨달았거나
몰랐던 걸 깨달았거나
이런 걸 깨달음이라 그래.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어디 가서 빌어서 누구로부터 뭘 얻어서
이 괴로움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나의 어리석음, 나의 무지를 깨치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러니까 누구나 다 가능하다.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재물의 고하와 지식의 고하와, 성별에 관계없이 다 가능하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
(말씀 감사합니다.
근데 지금까지 말씀하신 내용을 들어보니까
어떻게 보면은
‘모든 것을 내려놔야 된다’라는 식으로 들리는데
제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을까요?)
그걸 “내려놔야 된다”
그렇게 단정적으로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이걸 들었는데 뜨겁다
안 뜨거우려면 내려놔야 되겠죠.
즉 뜨겁다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내려놔야 되겠지.
근데 내가 이걸 들었는데 안 뜨거워.
그런데도 “이걸 내려놔라”
이런 말은 성립 안 하겠지.
이것이 뜨겁다면
내려놓으라고 말할 필요 없잖아요.
이게 뜨거우면
“아, 뜨거 ”하고 다 내려놓잖아요.
근데도 본인이
“아이 뜨고 아이 뜨고 아이 뜨고 어떻게 내려놔요?”
어떻게 내려놔요?
이건 무슨 말이에요?
갖고 싶다는 얘기 아니에요?
그럼 갖고 싶으면 손을 대든지
손을 대기 싫으면 어떻게 하든지
내려놓든지
이거 자기 선택이지.
“뭐든지 다 내려놔라”가 아니야.
“너가 갖고 싶으면 손을 대면 되지 뭐
대기 싫으면 너가 내려놔야지.
”내려놔야 된다“라는 건 없다는 거예요.
되기 싫으면 내려놓고
갖고 싶으면 손을 대고,
그러니까 내가 괴롭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된다는 거예요.
근데 그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면, 괴롭고 싶지 않으면
멈춰야 될 거 아니겠어요.
내가 여성의 종아리를 만지고 싶다
“만지면 안 된다, 된다” 이런 게 없어요.
이거 만지면
지금은 잠시 감각적으로 좋을지 모르지만
성추행범으로 감옥 간다.
“어 나는 감옥 가도 괜찮아, 만져보고 감옥 갈래.”
그러면 하면 가면 돼.
근데 잠시 그거 몇 초 감각이 좋다고 했다가
1년 감옥 사니까 후회가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다음부터는 만지고 싶어도 안 만져야 될 거 아니에요?
“근데 만지고 싶은데 어떻게 안 만져요?”
이런 얘기를 하면 안 되겠지.
“어떻게 내려놔요?”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방하착
뜨거우면 내려놔라.
그냥 내려놔라.
갖고 싶으면 들고 있으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자꾸 이 깨달음을
추상적으로, 신비주의적으로 자꾸 접근하기 때문에
죽어서 천당이 있다는 거나
깨달으면 뭐 어이 된다는 거나
똑같이 신비주의적으로 들리기 때문에 문제지
이것은 하나도 신비주의적인 게 아니다.
이건 바로 자기가 경험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얘기다.
뭘 믿으라는 얘기도 아니고
뭘 하라 마라도 아니다.
여기 음식이 맛있는 게 있어.
“아 냄새도 좋아”
딱 먹으려고 하는데
“어 거기 독 들었는데?”
이러면 자기는 어떻게 해야 되겠어?
그럼 수저 놔야 되겠지.
그런데 “진짜 들었을까? 조금 먹어보면 안 될까?
조금 먹어도 죽어요?”
이렇게 자꾸 얘기를 하는 거는
독 들었다는 걸 모른다는 얘기 아니에요.
그러니까 부처님은
“독이 들었으니까 먹지 마라”라고 가르친 분이 아니고
“거기 독 들었다”라는 말만 해 주시는 분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하든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는 거야.
먹고 죽든지
뭐 다 먹는 이유는 살려고 먹는데 굳이 먹고 죽을 이유가 없잖아.
그럼 아무리 냄새가 좋고, 빛깔이 좋아도
“독 들었다” 하면
“어” 하고 버리지 누가 그걸 먹어요?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은 자는
그 냄새와 향기에 취해서
독든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
관심 있으면 이번에 불교대학 할 때 한번 신청해서
한 5개월 해보면
“아, 이런 거구나”
그래서 들어보고 마음에 들면
해보고 경험이 되고
내가 체험할 수 있으면 하고
해보니까
“에이, 이거 뭐 안 돼” 이러면 그만두면 돼요.
여기는 뭐
“믿으면 돈 준다” “복 준다” “다음 생에 좋게 태어난다”
이 얘기는 없어요.
아니 뭐 자기가 좋은 일 해야
다음 생이 있으면 좋은 데 가지
나쁜 짓 해놓고, 다음 생에 좋은 데 간다면
그게 바보 같은 짓 아니에요?
그게 다 어리석은 짓이에요.
욕심 때문에
나쁜 짓을 해놓고 나쁜 과보는 안 받고
좋은 일은 하기 싫고 좋은 데는 가고 싶고
이런 잘못된 생각을 고쳐야
우리가 진리에 눈을 뜰 수 있지
잘못된 것을 가지고
자꾸 자기 합리화를 하면
어리석음에 계속 빠져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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