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5)

[법륜스님의 하루] 베풀고 나면 왜 섭섭한 마음이 생기는 걸까요? (2025.03.20.)

Buddhastudy 2025. 3. 25. 20:08

 

 

우리는 누군가에게 베풀 때

자기도 모르게 상을 짓기가 쉽습니다.

내가 너를 도왔다고 생각하는 것을

상을 짓는다.’ 하고 표현한 겁니다.

상을 짓게 되면

상대에게 기대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기대하는 마음 없이 보시해야 할까요?

금강경에 의하면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이 헤아릴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다.’ 하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에서 여러분들이 좀 혼란스러울 수 있어요.

왜냐하면 보시를 할 때는

중생을 구제했다.’, ‘복을 지었다.’ 이런 상을 짓지 말라고 해 놓고선

상을 짓지 않는 것이야말로

더 큰 복을 짓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도대체 복을 받는다는 것인지 안 받는다는 것인지 헷갈릴 겁니다.

 

금강경을 읽는 사람들이 이 부분에서 많이 오해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글자에 집착해서

금강경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에요.

여기서 핵심은

복이 더 크다는 것이 아니라

상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하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상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하라는 것이 핵심이에요.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중생들은

돌려받을 기대를 하지 않고 보시하면 복을 더 많이 받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복을 더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자꾸 집착합니다.

 

물론 보시할 때 겉으로 생색내는 것보다는

생색내지 않는 것이 더 낫긴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생색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으로라도 기대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보시하는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행하면 더 낫다는 거예요.

 

 

--사랑이 미움의 씨앗이 되는 이유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보시를 할 때는

항상 기대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아닌 것 같아도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래도 내가 너를 도왔다.’ 이런 마음이 밑바닥에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상대가 고맙다고 말하든가

아니면 아는 척이라도 해주기를 바라게 돼요.

상대가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괜히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아예 상대에게 베풀지 않으면 이런 마음도 안 생기겠죠.

 

그런데 공연히 베풀어서 이런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는 상대를 사랑했지만

나중에는 미워하게 되는 겁니다.

사랑을 안 하면 미움도 안 일어나요.

 

내가 상대에게 아무것도 베풀지 않고, 단지 바라기만 한다면

내 바람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무척 낮습니다.

이 경우 바람대로 되지 않았을 때

마음에 큰 고통이 생깁니다.

 

반면 내가 무언가를 베풀면서 상대에게 바란다면

내 바람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져요.

그러나 확률이 올라갈 뿐이지 이것도

100% 이루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이 경우에 괴로움의 씨앗은 아직 남아 있는 거예요.

 

어쩌면 기대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고통이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누군가를 좋아해서 도와주고 난 다음에

후회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왜 그럴까요?

처음에는 좋은 마음을 내서 도왔지만,

돕고 나서는

내가 이렇게 도왔으니, 네가 이 정도는 해줘야지.’ 하는

생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찌꺼기가 남아 있으면

이것이 다시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겁니다.

이 찌꺼기까지 버려야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이해하기 쉽게 수학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학교 다닐 때 경우의 수라고 배웠죠?

경우의 수란 1회의 시행에서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의 가짓수를 의미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도울 때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총 네 가지예요.

먼저 상대를 도우면서 내가 가질 수 있는 마음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기대하는 마음을 갖고 도울 수도 있고

기대하지 않고 도울 수도 있어요.

이때 도움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고맙다고 인사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내가 갖는 마음이 두 가지이고,

상대의 반응이 두 가지입니다.

2 곱하기 2를 하면 경우의 수는 4가 나옵니다.

 

내가 상대에게 기대할 때는

기대한 대로 상대가 감사해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아무런 인사도 없으면 기분이 나빠요.

반면 내가 상대에게 아무런 기대를 안 할 때는

아무런 인사가 없어도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예상치 못하게 감사하다고 인사하면 기뻐집니다.

기대를 하면 그 결과가 제로이거나 마이너스인데

기대를 안 하면 그 결과가 제로이거나 플러스가 되는 거예요.

그럼 현실적으로 어느 쪽이 더 유리해요?

 

내가 누군가를 도울 때

나의 노고를 당신이 알아주세요.’ 한다고 해서 상대가 그걸 알고,

나의 노고를 당신이 몰라도 된다.’ 한다고 해서 상대가 모를까요?

상대는 내 마음과 관계없이

그저 자기 식대로 반응할 뿐입니다.

 

내 마음과 상대의 반응은 상관된 것이 아니라 전혀 별개인 거예요.

내가 기대한다고 해서 상대가 감사해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기대를 안 한다고 해서 상대가 감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대를 안 하면

손해 날 일 없이 이익 날 일만 있고

기대하면

이익 날 일은 없고 손해 날 일만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어느 쪽이 나은지 자명하지요?

 

그런데 머리로는 이걸 알아도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잘 안 됩니다.

기대를 안 하는 것이 분명 나은데도 마음은 자꾸 기대하게 돼요.

 

절에 가서 봉투에 이름을 안 쓰고 보시해도

마음속에서는 내가 보시했다.’ 이런 생각이 남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무언가를 했다.’ 하는 집착이에요.

내가 무언가를 했다.’ 하는 집착으로 인해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이것이 바로 고()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 기대와는 상관없이 상대는

내게 보답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첫째, 상대가 보답하는 경우,

내가 기대했을 때 얻는 기쁨과

기대하지 않았을 때 얻는 기쁨을 비교하면

기대하지 않았을 때 얻는 기쁨이 더 큽니다.

 

둘째, 상대가 보답하지 않는 경우,

내가 기대했을 때는 상대에 대한 미움이 생기는데

기대하지 않았을 때는 어떤 미움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기대하지 않았을 때 얻게 되는 복이

내가 기대했을 때 얻게 되는 복보다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설명하는 구절이 바로

불가사량(不可思量)’입니다.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공덕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