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5)

[법륜스님의 하루] 어떻게 하면 괴롭지 않게 살 수 있을까요? (2025.03.18.)

Buddhastudy 2025. 3. 24. 19:51

 

 

괴로움은 왜 생길까요?

괴로움의 원인을 규명해 보면 무지(無智)입니다.

이 말은 무지에서 벗어나면 괴로움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럼 우리는 왜 무지해서 괴롭게 사는 걸까요?

괴롭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말이죠.

 

오늘 강의 주제는

어떤 관점을 갖고 세상을 살면 괴롭지 않게 살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어떻게 알고 있나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우리는 이 세계를 단독자의 집합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 대강당에 200명이 있다면

우리 사회는 200명의 사람이 모인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200명은 각각의 독립적인 개체이고

단독자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이 사회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정신세계에서는 사람마다 실체를 가진 자아, 즉 아트만(Atman)이 있어서

육신은 늙고 병들어 죽지만 영혼은 영원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질세계에서는 세상 만물을 구성하는 근본 알맹이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것을 원자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생명 세계에서는 모든 생명에는

종자라는 근본 알맹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이렇게 각각의 실체를 가진 단독자의 집합이

이 세계라고 알고 있습니다.

 

 

--천하 만물은 서로 연관 맺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관념의 장벽을 깨뜨리고 세상을 봤습니다.

깨달음이란 관념의 장벽을 깨뜨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에 씐 게 벗겨져서 깨달음의 눈으로 보니

이 세상은 개별 존재의 집합이 아니라 전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공간적으로도 연결되어 있고, 시간적으로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 개의 구슬을 바구니에 담아 놓으면

구슬 하나하나가 다 개별적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구슬을 연결한 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구슬 중에 한 개를 집어 들었더니

나머지 구슬도 쭉 딸려 올라왔어요.

보이는 것과 다르게 모든 구슬이 연결되어 있었던 거예요.

이것이 연기입니다.

 

또한 하나의 구슬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나머지 구슬이 다 비쳐서 보입니다.

하나 속에 전부가 다 들어 있는 모습이에요.

과학에 비유해서 설명하면,

하나의 원자 속에 우주가 들어있고,

그 원자가 모여서 우주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 속에 전체가 들어있다는 연기를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라고 합니다.

끝없이 겹쳐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실제의 세계는 연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연기적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기존의 시각과 달리 보입니다.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모습이 기존의 시각에서는 약육강식으로 보였다면,

연기적 관점에서 보면 서로 어우러져서 생명 현상을 유지해 가는 모습인 거예요.

 

만약 내 몸의 눈, , , 입 등이 다 제각각 개별 존재라면

기관들끼리 서로 경쟁이 치열했을 거예요.

식탁 위에 과일이 있다면, 발견은 누가 했습니까?

눈이 했습니다.

그 과일을 가지러 간 것은 발입니다.

발이 열심히 갔지만 과일을 잡은 것은 손입니다.

정작 먹기는 누가 먹나요?

입이 먹습니다.

그럼 각 기관들이 전부 기분이 나쁘잖아요.

각각의 기관이 전부 열심히 일했는데, 먹기는 엉뚱한 입이 먹으니까요.

 

그런데 각각의 기관들이

서로 연결된 하나의 몸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각각의 기관들은 그저 역할 분담을 했을 뿐이에요.

발견은 눈이 하고, 가기는 다리가 가고, 따기는 손이 따고,

먹기는 입이 먹고, 소화는 위와 장이 하고,

저장은 간이 하고, 공급은 혈액이 한 겁니다.

이러한 자연 생태계 현상을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이라는 시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연기된 생명 현상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입으로 먹은 과일은 에너지원이 되어

각 기관으로 분배가 됩니다.

그런데 어느 기관에 분배가 제대로 안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몸 전체가 죽어버리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도 분배가 공평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분배가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역할 분담이 아니라 착취라고 할 수 있어요.

그렇게 되면 사회 전체가 붕괴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를 연기적 관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연기법을 아는 자, 곧 여래를 본다

 

불교의 세계관은 연기적 세계관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세상을 개별 존재의 집합으로 보는 시각이 대다수입니다.

연기적 세계관으로 보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연기적 세계관을

일상에서 경험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경험으로 느끼기에는

이 세상이 개별 존재의 집합으로 느껴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교마저도 역사 속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시각으로 돌아가 버린 거예요.

 

윤회한다는 것은

결국 개별적인 자아가 있어야 한다는 거잖아요.

개별적인 자아가 있다고 하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아설에 어긋나니까

불성이라는 이름으로 아트만의 역할을 대신 한다든지 해서

계속 또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서 대체를 하는 겁니다.

 

복을 받고 싶은데 복을 받으려면

기존의 가르침에서 무언가 바뀌어야만 하잖아요.

무언가를 바꾸어서 말이 되게끔 논리를 만드는 겁니다.

명백하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조차

그 테두리만 놔두고 속을 조금씩 바꾸다 보니

오늘날 불교가 이렇게 변질이 된 거예요.

 

부처님은 인간의 존재는 아트만이 아닌 오온(五蘊)의 집합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자가 단독자가 아닌 소립자의 결합이듯이

인간 존재는 다섯 가지 오온의 결합이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즉 아설(我設)이 아닌 무아설(無我設)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온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가 개별 존재라고 생각하면

이것은 다시 아설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아설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오온 각각은 불변한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온이 공하다면

오온을 구성하는 각각도 다 공하다는 뜻입니다.

, 오온에 실체가 있다고 인정하면

불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는 표현 다음에

수상행식(受想行識)도 그러하다고 하여

수상행식 역부여시(受想行識 亦復如是)’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처음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라 배웠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용이 변질되어 아설로 돌아가 버리니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비판을 제기한 것이 반야심경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발견한 실제의 세상은 연기되어 있었습니다.

연기되어 있으니 영원한 것도 없고, 단독적인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무상과 무아입니다.

연기법을 알면 여래를 본다는 말은

연기법을 깨달으면 곧 괴로움이 없어진다는 뜻입니다.

 

즉 무상과 무아를 깨달으면

괴로움이 없는 열반적정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 가르침을 요약한 삼법인(三法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