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수도권에 직장을 잡아 방을 구하려다 보니
돈을 많이 모아놓을 걸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껄떡거림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방법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아들이 20살 넘은 성인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도 되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느냐.
제가 전 세계적으로
전쟁이 나서 피난민이 생기거나
자연재해가 나서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잖아요.
그런 사람을 내가 다 도우려 한다, 다 도와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이고 전에 돈 많은 사람이 와서 스님 만나자 할 때
만나주고, 위로 좀 해주고, 보시나 많이 받을 걸”
“전에 누가 어떻게 후원한다 했는데
욕심으로 하는 것 같아서 받지 않았는데 그때 받을걸”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거예요.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겨서
사람이 많이 모여야 되는데
그래서 집이 필요하거나 건물을 빌리거나 해야 되는데
돈이 필요하다 보면
“아이고 부자들한테 그냥 조금 잘 대해주고 보시를 받을 걸”
이런 생각을 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수행자라고 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가진 돈에서 보시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하는 것이
남을 돕는 거지
내가 할 수 없는 거를 하겠다고 하면
그것이 욕심이다.
돈이 욕심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걸 하겠다는 것
그것이 욕심이다/
이치에 맞지가 않다.
우리 아들이 5살짜리인데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돈이 없어서 치료를 제대로 못한다.
“아이고 돈을 좀 벌걸”
그건 그래도 이치에 맞는 얘기다.
그런데 아들이 이미 20세가 넘었고, 취직을 했고
그런데 그 아들 집까지 마련 못 해줬어.
그것도 수도권에
지금 수도권의 집이 얼마나 비쌉니까?
전세든, 월세든.
그걸 마련을 시골에 살면서 해주려고 해서 돈이 부족하다고
“돈을 더 벌어 놓을 걸”하는 거는
그 자체가 어리석은 생각, 잘못된 생각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인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까
천민 아이들이 취직하기가 쉽지 않고
제일 천민 아이들이 취직하는데 혜택도 있고, 좋은 자리가 공무원입니다.
철도 공무원이나 경찰공무원이나 군인이나
인도는 직업군인이니까.
그러면 이 시골에서 자라도 애들이 신체가 튼튼하니까
시험을 쳐서 합격을 하면
한 집안이 산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면 그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도록, 그다음에 시험을 치도록, 공부하는 것까지는 다 도와줄 수가 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시험에 걸렸다고 해서
경찰 공무원이 되거나 철도 공무원이 되는 건 아니다.
반드시 인도는 거기에 몇십만 원, 몇백만 원
뒷돈이 들어가야 합격하게 된다.
즉 채용이 된다, 이런 얘기예요.
그러니까 일정한 선에 들어가는 거는 실력이지만은
그다음에 채용이 되는 거는 그 돈이 지불이 돼야 된다.
승진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일정한 선에 오르지 못하면 돈이 있어도 안 되고
일정한 선에 오르면
그다음에 돈을 주면 된다, 이런 얘기예요.
아예 1등을 해버리면
돈을 안 줘도 된다는 거예요.
이건 제가 거기 있으면서도 여러 번 경험을 했거든요.
지사가 와서 학교에 전기를 넣어주겠다.
그래서 참 고맙게 생각했죠.
근데 1년이 지나도 안 넣어줘.
그래 지사한테 찾아갔어.
“아직도 전기가 안 들어왔다.”
“어 그래? 그 시장이 왜 그러지?” 이러면서
내가 있는 자리에서 전화해서 전기 빨리 넣어줘라.
그러고도 1년이 지나서 안 들어와요.
그러니까 나중에 담당 공무원이 뒷돈을 달라고 그랬어.
내가 뒷돈을 주고 할 바야.
20년 전에 했지, 뭐 때문에 지금까지 안 했겠냐?
그러니 이렇게 기다려서 지사가 와서 방문하고 해주겠다 할 때는
우리가 부정하지 않고도 할 수 있어서 하지 않았냐, 그랬더니
“제가 이 받는 돈이
그것이 다 모여서 그 사람들에게 다 가는 건데
그 말씀은 아무리 돈을 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데
‘해줘라’ 이 말은
어느 정도 성의 표시가 있으면 해라, 이런 뜻이에요.”
그러더라고 문화가 서로 다르다 보니까
처음에는 그게 잘 안 받아들여졌는데
오래 지나놓고 보면
‘나는 모든 조건이 갖춰졌다’ 이런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안 갖춰지면 아예 안 되고
모든 조건이 갖춰지는 중에는
그다음에 일부 돈을 주면 이제 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일을 해오면서 어려움이 있거든요.
지금도 그런 어려움에 봉착해 있고.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냐?
그 아이가 시험에 들도록까지 학습을 시키는 건 내가 할 일이고
그러나 그 뒷돈까지 대줘가며 취직시키는 거는
우리가 해야 되느냐, 이런 문제에요.
이렇게 해야 되느냐.
전기 같으면 안 넣고 촛불 켜고 살고
제너레이터 돌려서 돈이 덜 들도록 살면 되지만
이건 한 아이의 인생 문제니까
당연히 고민이 되죠.
그러나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에 들어간다.
그것까지 하겠다 그러면 일이 끝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를 정해놓고 하고
그 이상 못 하는 거는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런 관점에 서야 껄떡거리지 않고
남을 돕더라도 거기에 끄달리지 않고 일을 할 수가 있다.
극한 상황일 때는 해야 됩니다.
북한처럼 사람이 굶어 죽을 때는
절반을 떼는 한이 있더라도 그 사람들을 도와야 되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선에서
멈추는 걸 알아야 된다.
중국에서 북한 난민들 고통받는 사람 보면 눈물이 납니다.
그 사람들을 한국 데리고 오려면
중국에서 약간 법을 어겨야 됩니다.
가짜 여권을 만들든지, 뭘 해서 국경을 통과하든지.
그런데 그것이 마음의 안타까움이 있어서
처음에는 한두 번 그렇게 하더라도
과연 이 불법적 행위를 남의 나라에서 하는 게 맞느냐?
맞지가 않지 않느냐?
우리에게는 그것이 도덕적인 행위지만은
이런 데서 우리는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다 하지는 못한다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때로는 안타깝지만 멈춰야 하는 일도 있다
이런 얘기예요.
--
그러니까 자기가 개인이 사는 데는 욕심이 없는데
이제 아들 문제가 제기되니
욕심이 나잖아요.
그러니까 그거는 자기가
자기 할 일 밖의, 자기 능력 밖의 일에
지금 일시적으로 아들이라는 데 집착해서 관심을 갖기 때문에
그 껄떡거림이 생겨난 거다.
그래서 이 자식이라는 게
참 집착을 떼기가 옛날부터 어렵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러니 취직이 됐으니까
고시원에서 살든, 원룸에서 살든, 친구 집에서 살든 멀리 떨어져서
두 시간 통과를 하든
그건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에요.
그러니까 그거를 부모하고 지나치게 신경을 써서 아쉬움을 갖는다면
그러면 영원히 집착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다음엔 또 뭐가 생기고
그다음에 또 뭐가 생기고
취직했다.
그다음에 이제 결혼한다
그러면 집 사줘야 된다.
애 낳았다
그러면 애 사립학교 유치원 보내야 된다, 영어유치원 보내야 된다.
이러면 끝이 없습니다.
자기가 80이 돼도, 은퇴를 해도
계속 돈을 더 벌어가 버텨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된다면
눈 감을 때까지 이 얽매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다.
딱 20살까지 키웠으면
“나는 다 했다.”
이렇게 딱 손을 떼고
여유가 있으면 조금 도와준다.
관점을 이렇게 가져야지
그걸 안타까워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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