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37개월 첫째 아이를 행복하게 키우고 있던 엄마
출산 중 의료 사고로 대학병원에 실려가 큰 수술을 했고 자궁을 적출
10달 품었던 제 아가는 처지를 받다가 사망
갓난 아기를 입양해서 같이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산모가 아기를 잃었으니까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네, 그래도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다, 이런 얘기에요.
이미 일어나버린 일은
지금 아무리 울고 불고 해도 되돌이킬 수가 없는 일이다.
되돌이킬 수 없기 때문에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된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
다시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즉 예비 조치를 취하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하나의 사고가 난 뒤에
그걸 갖고 자꾸 얘기해 봐야 큰 도움이 안 된다.
그걸 분석해서 다음에는 이런 사고가 안 일어나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되는데
우리는 사고가 일어나면
그 사고만 갖고 책임 공방을 하고 몇 달을 싸우다가
그런 사고를 또 당하고 또 당하고 되풀이한다.
그것이 바보 같은 짓이다. 이런 얘기예요.
다리가 한 번 붕괴되거나 건물이 한 번 붕괴되면
국가는 다리라든지 건물이나 이런 걸 지을 때
굉장히 특히 공공시설 같은 것은 감독을 잘 해서
무너지지 않도록 해야 된다
이런 얘기예요.
그다음에 지하차도나 지하도에 물이 차서
사람이 죽는 일이 생기면
집중호우는 갑자기 온 게 아니잖아요.
벌써 이미 다 예보가 됐잖아요. 그죠.
그러면 강이 범람하면 그 물이 흘러가면
어느 쪽 지하차도에 위험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서
이미 조금 과할 정도로
비가 오면 차를 막고, 차도를 막고, 우회시킨다든지
이런 예비 조치를 취해야 된다 이 말이에요.
근데 그냥 사건만 가지고 책임 공방을 하고
아무런 예비 조치를 취하지 않기 때문에
똑같은 일이 반복이 된다.
자긴 이미 그것이 불행이지만은
일어나 버렸다 이거야.
그것이 의료 사고인지 아닌지
그것이 철저하게 규명은 안 된 것 같네요. 얘기 들어보니까
의사의 과실로 생긴 건지
어쩔 수 없이 생긴 건지.
이번에 홍수 피해가 났다 하더라도
산사태는 그건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생긴 일이잖아요. 그죠.
그러면 대피하는 방법밖에 없는데
실수라면 ‘이건 대피를 제대로 안 했다’ 이렇게 볼 수 있고
두 번째는 이거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왜? 80평생을 살면서
아직 산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마을이었기 때문에
산사태가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이런 문제란 말이에요.
이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치더라도
지하차도 문제 같은 거는
이미 몇 번 겪은 문제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든지 주의를 했으면 방지할 수가 있었다, 이런 얘기예요.
그래서 지금 자기가 겪은 일이
의사의 또는 병원의 실수로 생긴 문제인지
안 그러면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그런 하나의
출산하다가 산모가 죽거나 아기가 죽거나 하는 거는
꼭 누구 실수 아니라도 옛날에도 많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지 않습니까?
역사 속에서도 아기를 낳다가
산모를 살리기 위해서 아기를 죽이는 경우도 있고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 산모가 죽는 경우도 있고
둘 다 살리려다가 둘 다 죽는 경우도 있고
둘 다 요행으로 사는 경우도 있고
여러 경우가 있단 말이야.
꼭 누가 실수를 안 해도
이런 일은 있을 수는 있다 이 말이야.
그게 마침 이 병원에 갔으니까 병원 책임인 것처럼
너무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면 자기가 이거를 규명하고 싶으면
합의를 보지 말고
병원을 원망해서가 아니라
어떤 실수로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
명백한 인위적 의료 사고였는지를 규명을 하는 걸 더 중요시해야지.
“싸우기 피곤하다. 뭐 어쨌다”
이런 것 자체가
자기가 사회적 정의감이 부족하다, 이렇게 볼 수가 있다.
이 말이야.
그럼 이미 이것도 지나가 버렸어
합의를 해서 이미 지나가 버렸는데
그걸 갖고 또 후회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지금 이미 다 합의를 해버렸다며요?
근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지금 그 생각하는 게.
그러니까 아기가 죽은 거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러면 이것을 규명을 해야 되겠다.
혹시 병원의 실수라면
이 병원에서 이런 실수가 없도록
사람들이 이 병원에 안 오든지
의사가 벌금을 물고 충분히 각성을 해서 안전 조치를 취하든지
하도록 해야 되겠다.
내가 보상을 못 받아도 좋다
이런 정의감을 갖고 대하든지 해야지
그것도 귀찮다고, 복잡하다고, 그냥 적절히 합의하고 넘어갔다 이거예요.
나는 넘어간 게 잘못이라는 게 아니에요.
문제는 넘어가 놓고
지금 그걸 갖고 문제 제기하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거예요.
맨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으로
인생을 살고 있다, 이런 얘기예요.
그리고 지금 죽다가 살아났는데
지금 몸을 추스르고 안정을 취하는 게 중요하지
지금 입양할 거냐? 말 거냐?
이것도 남이 들으면 웃을 일이다.
물론 아기를 잃어서 그걸 대체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거는 1년쯤 있다가, 2년쯤 있다가
건강을 회복한 뒤에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같이 흥분된 상태,
원망, 후회, 이런 게 있는 상태에서 어떤 결정을 내면
또 다음에 입양을 해서 애가 말을 안 듣거나 하면
또 후회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래서 지금은 입양은 논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일단 죽다 살았으니까
먼저 감사 기도부터 해야 된다.
병원을 원망하거나 누구를 원망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래도 안 죽고 살았다.
아이고 자칫 잘못했으면 죽을 뻔 했는데 안 죽고 살았다.
그래서 자기가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해야 된다.
그러고 자기 다니는 교회에 다만 10만 원이라도 헌금을 하고
“감사합니다. 죽을 뻔했는데 보살핌으로 살았습니다”.
절에 다니면 부처님께 다만 얼마라도 보시하고
“아이고 새 생명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어리석게 안 살고 지혜롭게 살겠습니다.”
또 종교가 없으면 조상님께
“아이고 조상님의 은덕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렇게 살았습니다.”
안 그러면 가족들에게
아이고 가족들이 얼마나 마음 졸였겠어요.
남편이나 부모나
그러니 “그들의 정성으로 내가 안 죽고 살아났다.”
‘살았다’.
이걸 먼저 긍정해라 이 말이야.
‘내가 안 죽고 살았다’ 이거를.
그다음에 이제 아이까지 살았으면 좋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거는, 우리가 원하는 게 다 될 수는 없잖아요.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게 다 이루어진다면
산사태 나서 왜 죽고
왜 군인이 수색하다가 죽고
이런 일이 생기겠느냐, 이 말이야.
다 날벼락같이 느껴질 거 아니에요, 그죠?
그러니까 군인이 수색하다가 죽은 것도 하나의 사고라고 하지만은
들어보면 안전 조치를 안 했잖아.
물에 가서 수색하려면
안전 조치를 취하고 가야 되는데
그냥 가서, 이런 급기야 사고가 일어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미 이것도 지나가 버린 일이에요.
그러니까 다음에 오히려 이걸 계기로 해서
우리가 좀 더 안전 조치를 취하면
한 명이 죽음으로 해서 10명 죽을 것을 예방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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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자기가 일단은 살아있다는 거에 감사하고
두 번째, 세상이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될 수는 없다.
그러니까 하나의 아이를 내가
자기가 뭐 잘못해가 애가 죽은 건 아니에요.
의사의 과실이라면 이해가 되지만은
자기는 과실이 없어요.
내 아이를 죽인 거에 대해서
어떤 그냥 혼자서 죄책감을 갖는 건 맞지만
실제로 자기의 과실은 아무것도 없잖아요.
자기가 뭘 잘못했어요?
자기가 애를 지키려고 해도 자기가 의술이 있어요? 뭐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거는 지나치다 이런 얘기예요.
그러니까 태풍이 분 걸 스님이
산사태를 못 막은 걸 내가 자책하면서 운다면
세상 사람이 웃을 거 아니에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그거는.
그러니까 그 자책을 한다는 건
자기가 너무 과도하다는 거야.
의사는 “내가 수술을 잘못해서 그러나”
이렇게 볼 수가 있다 이 말이에요.
자궁 적출까지 했다 그러면
아마 태아의 상태가 비정상적이거나 그렇기 때문에
산모를 살리려고 복개 수술을 하고
복개 수술해도 안 돼서
자궁을 척추를 하거나 이랬을 수도 있고, 실수했을 수도 있는데
자기 얘기만 듣고는 제가 잘 모를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어쨌든 그것은 의사가 실수했을 수는 있다고 치지만
자기의 잘못은 적어도 아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책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리고 자기가 이 애를 살리고 싶은 원이 있지만
우리 원하는 거 다 이루어질 수 없잖아요.
‘애를 하나 더 낳고 싶다’
지금 낳을 형편이 못 됐잖아요.
그것도 내가 원하는 거 다 이룰 수 없는 것 중에 하나일 뿐이에요.
그래도 이루고 싶으면
입양하는 방법이 있을 수는 있다.
근데 입양은 서두를 일은 아니잖아요.
지금은 자기가 몸을 추스르고
심리적인 안정, 아이를 잃은 엄마이기 때문에
한 1년은 심리적 안정을 취하는 게 필요하다.
그리고 충분히 심리가 안정된 뒤에
충분히 심사숙고를 해서
자기가 애를 입양하면
애가 앞으로 자라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얘를 괜히 입양했다.”
이런 생각이 안 들도록
자기가 전적으로 받아들일 자세가 돼야 된다.
/낳은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기른 자가 엄마이기 때문에
기른 자가 부모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입양하려면
탈것만큼도 내가 입양을 후회하지 않는
아이가 앞으로 어떤 말썽을 피워도.
그런 정도의 자세가 있을 때 입양을 해야지.
입양할 때는
내가 한 아이가 있어서
이 아이가 혼자 사는 게 외로워서 한 아이를 입양하겠다.
그럼 입양한 아이는 뭐예요?
무슨 형의 들러리예요?
그런 사고 자체가 잘못됐다 이거야.
그렇기 때문에 입양은 지금 서두르면 안 된다.
입양을 할 때는
그 입양하는 아이, 이 아이의 삶을 존중하고 책임지겠다.
이런 관점에서 입양을 해야지
형하고 놀아주기 위해서 애를 하나 데려온다.
이건 장난감이에요, 얘가? 애완동물이에요?
그게 무슨 사랑하는 마음이에요.
이건 그냥 내 부족한 것, 내 허전한 걸 채우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동물이나 장난감은 그렇게 해도 돼요.
근데 사람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생명이 태어났는데
누가 기를 사람이 없다.
내가 엄마가 돼서 대신 키우겠다.
이런 마음으로 입양을 해야지
“큰애가 외로우니까 하나 데려다 놔 놓겠다.”
이럴 때 이 의도가 얼마나
비인격적이고 인간 존엄을 상실한 자세다.
지금 본인이 제정신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애를 잃은 슬픔에 젖어서
그걸 어쨌든 대처할 물건을 빨리 지금 확보하려는
그 생각만 지금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절대로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질문자의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 의도는 사람을 존중하는 자세가 아니다.
이걸 꼭 자각해야 된다.
그래서 입양은 지금 논할 일이 아니다.
입양을 어떤 수단으로 하면 안 된다.
큰아이의 동생이나 하나 만들어 주겠다.
이런 쪽으로 하는 거는
강아지 한 마리 데려오는 거랑 똑같다.
그렇기 때문에 입양하는 아이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입양해야지
그 이외에 다른 수단으로 써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자기가 지금 조금 정신을 차린 뒤에
육체적 건강도 회복하고, 심리적 안정을 기한 뒤에
원래 내가 아이를 하나 가져서 둘을 키우려고 했는데
이제 더 이상 못 가지니까
내가 여유가 좀 생겼으니까
애를 낳아서 못 키우는 사람이 있다면
한 명을 내 아이처럼 잘 돌보겠다.
이런 어떤 자비심으로 애를 입양해야 된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
...
네, 자식을 잃은 엄마니까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요.
그러나 우리가 가슴 아픈 건 이해하지마는
그 아픔에 사로잡혀서 이렇게 바르지 못한 어떤 생각을 하거나 일어난다면
우린 그것을 잠시 중단시켜야 한다.
그래서 일단 본인의 건강,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회복하고
이 문제는 남편이 말한 대로
천천히 해도 늦지 않다.
주위 사람들, 자기 죽다가 살아나서 그 사람들 얼마나 걱정했겠어요.
자기가 빨리 건강을 회복해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부터
입양은 놔 놓고,
우선 내 주위에 있는 남편, 그다음에 첫째 아이, 또 부모
이런 사람들 먼저 안심을 시켜놓고
그다음에 차근차근 의논해야 된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
“아이고 안 죽고 살았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쌉빡하게 일어나서
얼굴을 밝게 하고
몸은 좀 보약을 먹고 좀 회복하고
이렇게 해서
후유증을 최단기간에 극복을 하고
조금 우울증 같은 게 이런 충격 때문에 있다면
정신과에 치료를 조금 받고
이렇게 해서 빨리 회복을 하고
그래서 있는 사람, 부모, 남편, 아이
죽은 사람 연연해서 있는 사람 괴롭히지 말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좀 더 사랑을 나누는 게 좋다.
그리고 여유가 있으면
입양해서 애를 키운다면
뭐 이런 아이 때문에가 아니라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돌보지 못하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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