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2

[비이원시크릿] '나'는 조건에 휘둘릴 수 없습니다 | 조건은 '나'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Buddhastudy 2024. 9. 24. 19:35

 

 

지금 납득이 잘 안 가실 겁니다.

그런데 차근차근히 한번 깊이깊이 느껴보세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부정성을 나의 삶에서 드러내도록

그것을 담당하고 있는 관념이들이 처하게 되는 딜레마가 뭐냐면요.

 

고통이 유지되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의 사랑의 방식에까지 이 관념이들이 영향을 끼칩니다.

 

끊임없이 절대적인 기준,

그러니까 어떤 절대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마음이라는 건

결국에 조건을 충족 없이도

완전하고 행복한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마음이에요.

 

겉으로는 어떻게 해요?

상대방한테 사랑의 기준을 강요하는 듯이 보이죠.

하지만 그 이전에

자기 자신에게 먼저 그 기준을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인정받지 못하니까 어때요?

불안하죠.

불안하니까 숨고 싶고, 포기하고 싶죠.

 

이 마음이 현실에서의 관계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인연을 조합하며 나타나게 됩니다.

시크릿이죠.

 

이 관념들이 만들어내는 현실 출력 회로가 나타나는 형태

그게 뭔가?

내가 지금 사랑하는 방식

사랑한다면 이러이러해야만 해라는 마음이에요.

 

그런데 이 마음을 여러분들이 알아보신다면요

조금 더 깊은 곳에

오히려 인정받지 못해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슬픈 아이가

몸을 이렇게 웅크리고 떨고 있다라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어야 돼요.

 

...

 

다시 한 번 말씀드릴게요.

그것을 인정하는 그 스텝으로부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해요.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향한 연민과 사랑이 일어나게 돼요.

 

내 안에 모순된 내면아이

내면아이를 향한 시선이 이때 비로소 일어나게 되고

그 시선으로부터 변화가 일어나게 돼요.

 

즉 이게 뭐예요?

온전한 허용인 사랑이 일어나는 겁니다.

어떤 사랑?

자기 사랑이 일어나는 거예요.

 

여러분 이걸 잘 알아야 합니다.

나는 이러이러한 조건하에서만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 돼요.

 

 

그렇다면 이 내면아이를 만났을 때

허용 작업의 핵심이 되는 부분을 지금부터 말씀드릴게요.

아까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셨는데

얘를 없애야 된다.

얘를 재설정해야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다시 한 번 단적으로 말씀드리는데요.

그 어떤 형태의 폭력을 가해서는 사라지지 않아요.

부정성이라는 건

속성 자체가 외면받고, 부정당해야만

모순적이게도 그 속성이 그 존재가 유지가 되는 아이들이에요.

슬픈 아이들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얘네들을 부정하는 동안에는, 부정성은 부정되지 않아요.

부정되지 않아요

 

그렇다면은 일단 허용의 마음을 일으켜서

이 아이들이 있는 그대로 그렇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품어주는 내면아이 소통으로 들어가시는 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나의 수행이 어느 정도 깊어졌을 때

자연스럽게 이 사유를 통해서도 변화가 일어나요.

이게 뭐냐면요.

아까 말씀드렸죠.

나는 이러이러한 조건하에서만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체득하는 겁니다.”

 

그걸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볼게요. 여러분.

내가 이러이러한 조건하에서만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인 걸까요?

아니면

이런 조건들이 우리의

나라는 정체성의 통로에 의존해서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일까요?

 

말이 어렵죠? 후자예요.

볼게요.

 

나는 고통스럽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나는 고통스럽다

누가 고통스럽죠?

나는 고통스럽다라고 말을 할 때, 누가 고통스럽죠?

 

그래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생각하자는 거예요. 사유하자는 거예요.

나는 고통스럽다라고 말을 할 때

고통스러운 게 나죠?

내가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렇다면 그 고통이라는 게 나타나기 위해서는

뭐에 의존해야 돼요? 뭐에 올라타야 돼요?

나에 올라타야 돼요.

 

내가 고통스럽잖아요.

그렇다면 고통이라는 게 나타나기 위해서는

뭐에 기대야 된다는 얘기예요?

뭐를 통로로 삼아야 된다는 얘기예요?

어떤 나가 되든지 간에 나라는 걸 통로로 삼아야 되겠죠.

나에 의존해야 돼요.

 

내가 슬프다.

그 슬픔이 무엇에 의존해서 나타나죠?

.

 

나는 화가 난다.

그 화가 무엇에 의존해서 나타나죠?

무엇을 통해서만 나타납니까?

나죠.

 

내가 만약에 행복하다면

그 행복이라는 게 무엇을 통해서 나타나죠?

나죠.

 

그러니까 뭐예요?

나에 의존하는 것이지

조건이라는 것은 나에 의존하는 것이지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게 아니라는 얘기예요.

 

깊이 느껴보세요.

제가 카페에도 그렇고 그런 걸 많이 해서

온통 나의 세상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가 그거예요.

우리가 살면서 체험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요.

나라는 통로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나타날 수가 없어요.

나라는 통로를 통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전적으로 나라는 통로에 의존해서만

비로소 나타날 수 있는 것들을 뭐 하고 살아요?

두려워하고 얽매여 살아요.

 

...

 

내가 사랑을 느껴요.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그 어떤 감정적인 형태의 사랑

감정적인 형태의 사랑이 나타나기 위해선

반드시 뭐가 필요해요?

어떤, 채널이 필요해요?

누구한테 자릿세를 내야 돼요?

.

 

여기서 말씀드리는 나는 개아를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보편적인 어떤 나라는 그 정체성 자체를 말씀드리는 거예요.

나라는 정체성 자체를.

 

...

 

수용은 당연히 일어나는 것이고 본질을 파악하시라는 얘기입니다.

이 조건이라는 놈은 그 조건이 조건으로서 드러나게 하는

통로인 내가 없으면 나타날 수가 없는 아이예요.

관념을 의인화시키니까 이해가 쉽죠.

 

다시 말씀드릴게요.

나는 이러이러한 조건하에서만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조건들은

우리의 나라는 정체성의 통로를 통해서만

그것에 의존해서만

그러니까 월세방 하나 얻어서 그때그때

인연 조합에 따라 그때그때

월세방 채널 하나, 스트리밍 키 하나 딱 받아서

저도 지금 스트리밍 키 받아서 지금 방송하고 있거든요.

그때그때 월세 빵 하나 얻어서 나타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에 의존하는 것이지

이런 조건들이라는 거는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것이 아니란 얘기예요.

 

...

 

나는 뭐냐면은 채널 장사하는 거예요. 채널 장사

 

쉽게 말씀드리면 그거예요.

자꾸 이렇게 사유를 해보시는 거예요.

, 화나 죽겠다.

그 사람은 왜 그 모양인지 몰라

 

나를 괴롭게 만들고, 나를 화나게 만드는 어떤 상황이 나타났습니다.

지금 나타나고 있는 이 분노의 감정,

이게 무엇에 의존해서 나타나고 있어요?

화를 내고 있는 어떤 나에 의존해서 나타난다는 얘기예요.

내가 이 화라는 조건에 끌려다니는 게 아니라.

 

어려울 수 있어요.

비이원적인 사유이기 때문에 조금 이제 어려울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필요한 사유이기 때문에 자꾸 말씀드리는 거예요.

 

나라는 정체성이 이 몸이다라는 느낌으로부터 벗어나서

어떤 하나의 보편적인 존재의 느낌으로 자리잡기 시작을 하면

이 부분에 있어서 체감하게 됩니다.

체감하게 되는 건데

내가 화를 낼 때, 내가 슬플 때, 내가 기쁠 때, 내가 고통스러울 때, 내가 뭐 우울할 때

아니면 나는 이러이러한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만족해라는

마음이 나타날 때마저도

이러한 조건들도, 감정 상태들도, 그 무엇이 되든지 간에

결국 얘네들이 드러나려면

무엇에 의존해야 가능하다라는 얘기예요?

통로가 있어야 된다라는 얘기예요.

통로가.

나라는 통로가 있어야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얘네들이 나에 의존한다라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나에 의존해서만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을

왜 두려워하고 있지?” 라고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것입니다.

 

이 사유는요.

내가 입맛에 맞는 형태로 나의 삶을 꾸며가기 위해

지금 현재 나타난 마음에 안 드는 부정적이고 찌질한 나의 모습

그 모습을 만들어내는 내면아이의 관념이를

폭력으로 뽑아내는 어떤 그런 행위가 아니에요.

 

/“나에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을

왜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겁니다./

 

 

(나에게 의존하게 놔둬야 하나요?)

 

여기 이 부분에도 마찬가지예요.

일단 해보는 겁니다.

이 질문 자체가

어떤 부분에 대한 실질적인 체득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오는 질문인데요.

이 질문은 지금 필요한 어떤 질문이 아니에요?

 

뭐냐 하면은

실질적으로 지금 나한테 필요한 부분을 건너 뛰어서

이렇게 되면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하나요?”

이런 의문이 계속 나타나게 돼요.

그러니까 이 의문은 지금은 살짝 조금 넣어두시기 바래요.

 

왜냐면은 내 의식이 깊어질수록

이 나라는 것에 대한 어떤 규정이나 정체성, 이미지 같은 게

점점 변해가게 될 겁니다.

그러면 이 질문이 나오지 않아요,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