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2

[비이원시크릿] 왜 슬픈 예감은 틀린적이 없을까?

Buddhastudy 2025. 1. 7. 19:41

 

 

여러분, 오늘 아주 재밌는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요.

살다 보면 누구나 몇 번씩 경험하는 패턴이 있습니다.

 

어쩔 때는 마치 내가 예언자라도 된 듯한 느낌마저 있어요.

어떤 경우일까요?

 

바로 나의 부정적인 예감이

어김없이 현실로 일어나는 경우입니다.

 

나의 현실 일기예보는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요?

간절히 꿈꾸는 봄날은 오지 않고

왜 흐린 날만 잔뜩 몰려오는 걸까요?

 

이런 일이 계속되다 보면 의문이 올라옵니다.

왜 슬픈 예감이 들 때는 틀린 적이 없을까?

왜 부정적인 예상이 들 때는 꼭 현실로 나타나는 걸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말을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체험하기 때문에.

그래서 저 말들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항상 내 현실에 먹구름이 가득 끼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또 많은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우리의 슬픈 예감, 이 부정적인 예측은

대부분 나의 현실이 되어 우리 눈앞에 마주하게 돼요.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 걸까요?

왜 기쁜예감보다는 슬픈예감이

왜 긍정적인 예상보다는 부정적인 예상이

왜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보다는 두려워하는 것이

왜 좋은 기분보다 나쁜 기분을 들게 하는 이 미래가

항상 더 풍요롭게 내 현실의 문을 두드리며 찾아오는 걸까요?

마치 내가 부정적인 시크릿의 마스터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 의식의 기원에 관한 몇 가지 비밀을 알아야 돼요.

 

인간을 논할 때

단순히 육체만을 인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육체에 의식이 작동해야 비로소 인간이 인간답게 되죠.

 

자 그렇다면

인간의 의미와 같이

그리고 숨겨져 있는 비밀은

결국 [인간 의식]의 차원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인간의 의식을 살펴볼게요.

먼저 인간은

언제 자기 자신을 한 인간으로 자각하게 될까요?

 

이 말이 어려운 것 같으니까요.

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짤막한 비유를 하나 들어볼게요.

 

여러분들이 매일 아침 경험하게 되는

, 깊은 잠으로부터 깨어나는 순간을 한번 생각 해보세요.

 

잠에서 생시로 깨어나는 그 순간

일시적이나마 아주 순수한 의식의 상태로 존재하는

짧은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는 내가 이 몸이라는 동일시가 아직 없어요.

그래서 순수한 의식입니다.

 

하지만 아직 몸과의 동일시가 일어나기 전이기 때문에

깨어났으면서도 깨어났다라는 느낌이 아니에요.

굳이 표현하자면

누구누구로서의 내가 깨어났다라는 느낌이라기보다

그저 순수한 있음의 상태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 짧은 순간이 지나가면

순식간에 나와 몸의 동일시가 일어나요.

그리고 그때부터 뭡니까?

내가 잠에서 깨어났구나라는 느낌이 나타나면서

방 안에 사물이나

아니면 시간 등에 대한 지각이 구체적으로 일어나게 돼요.

 

즉 인간의 의식은

나는 이 몸이다라는 관념이 구체화되는 순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나는 이 몸이다라는 관념이 구체화되는 그 순간

육체를 기준으로

나와 나 아닌 것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일어나게 돼요.

 

자 그것이 바로 인간의식이 원초적으로 느끼게 되는

분리감의 실체입니다.

 

인간의 의식은 이처럼

태생부터 나는 이 몸이다라는 관념에 의해

실체화된 이원성과 분리감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자 그래서 본능적으로 자신을

세상에 다른 것들로부터 동떨어진 존재로 여기게 돼요.

 

분리된 것은 불완전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불완전한 존재로 또 받아들이게 돼요.

 

내가 분리되어 있고 불완전하다고 한다면

나는 항상

스스로 존재의 존속에 대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성향이 나타나게 되죠.

 

이렇게 인간은

항상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전체로부터 분리된 존재라고 여기는 이 마음

이 마음은 항상 불안합니다.

이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요?

 

안도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안도감일까요?

과거의 것을 보장받을 필요는 없겠죠.

그렇다면 뭐예요?

 

지금의 내가 미래에도 여전히 지속된다는 사실이

보장될 때의 안도감이에요.

하지만 한순간도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1초 후의 미래를 볼 수 없기 때문이에요.

 

불안한 마음에 안심하기 위해서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필요해요.

하지만 인간의 인식은

인식의 맹점으로 인해 미래를 볼 수 없죠.

오직 이미 인식이 완료된 것만을 볼 뿐입니다.

 

자신의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다라는 사실은

인간 존재를 원초적인 불안으로 밀어넣습니다.

 

자 그래서 인간은 조마조마하고 불안하여

떨리는 심정으로 미래를 보고자 애를 쓰게 됩니다.

 

미래를 장담할 수도 없고, 또 볼 수 없다고 여기는 인간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는 떨리는 마음.

이 마음은 이미 의식이 깊은 곳으로부터 상처를 받은 마음인 거예요.

 

이미 찢어진 마음이 보고자 하는 미래는 어떻겠습니까?

인간이 미래를 예상할 때

자연스럽게 두려움이 투영되게 되는 원인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관념이 메인 카르마로 작용하게 되면

미래를 예상할 때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투영시키게 돼요.

 

인간의 미래 예상이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형태로 더 많이 나타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근원적인 두려움이 투영된

우리의 예감, 예측, 상상, 기대, 소망 이것 등은

과연 어떻게 했습니까?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는 그 마음 자체 있잖아요.

그 자체가 깊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의 마음속에 그려진 미래는 과연 어떻겠습니까?

 

이 존재적인 불안감이 크면 클수록

인간의 미래는 슬픈 예감과 부정적인 예측으로

가득 차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안한 상상은 스스로에 대한 규정이 되어

현실을 만들어 가게 됩니다.

 

무언가를 할 때

그 일의 성패에 대한 당신의 평소 예감은 어떻습니까?

당신의 미래에 대한 예상은 어떻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풍요로 그려지고 있나요?

아니면 절망적인 빈곤으로 그려지고 있나요?

 

설사 꿈과 희망으로 그려지고 있더라도

그렇게 미래를 그려내는 마음에

긴장과 강박이 들어가 있지는 않습니까?

 

마치 살얼음판 걷는 듯한 마음으로

온 마음을 애써 집중을 해야만

그것을 유지할 수 있지는 않나요?

 

만약 그렇다면 그 꿈과 희망은 사실

이 뿌리 깊은 불안과 절망을

애써 감추고자 쓴 가면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슬픈 예감과 부정적인 예측이

틀리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자신의 이원적인 속성상

미지의 현실을 불안감을 통해 바라보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불안하게 예측하려 하고요.

불안하기에 대비하려 하고

불안하게 피하고자 버둥거리고

불안하게 공격하기도 하며

또 불안하기에 원천 차단하려 합니다.

 

당신의 존재감이 근본적으로 불안하기에

미래에 대한 예측 자체가

부정적인 측면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의 슬픈 예감은

언제고 적당한 조건과 환경을 만나면

어김없이 아픈 현실이 돼, 찾아오게 돼요.

 

당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세요.

지금 당신의 그 불안한 마음

그 마음이 만들어내는 슬픈 예감, 두려운 상상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나는 불완전한 존재이고, 동떨어진 존재이니

행복하면 안 돼라는 목소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만나게 돼요.

 

그러니 이제 슬픈 예감에 빠져 있는 자신을 알아차릴 때면

그렇게 슬퍼하고 아파할 수밖에 없는

우리 안의 불안이의 처지를 깊이 헤아려

어머니의 마음이 되

꼭 한번 안아주세요.

 

무언가를 더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불안해 할 수밖에 없어 불안해하고 있는

우리네 슬픈 처지를

있는 그대로 한 번만 알아줘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