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이른 봄날, 햇빛이 이제 갓 돋아난 나뭇잎 위로 부서지던 날
소년은 면회를 위해서 구치소를 찾았습니다.
난생 처음 가본 감옥의 면회소
거기서 그가 본 것은 면회에도 이른바 급행료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밝은 햇빛 아래에서 벌어지던 어두운 형태들
무엇보다도 범법을 벌하는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범법
50년 전의 일화입니다.
사법의 말단에서 일어나고 있던 자그마한 일탈이랄까
아이에겐 충격이었겠으나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탈이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리고 대략 35년쯤 전에 네 글자 제목의 글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인사유감
헌법상 보장된 바 없는 법관에 대한 처벌의 도구로 쓰는 셈“
-서태영 판사. 1985년 9월 2일
‘인사유감’
짧은 제목은 얼핏 보면 평범했지만 그 내용은 너무나 묵직한 것이었습니다.
사법부가 권력에 굴종했던 암흑의 시대
청와대 정무비서관에게 일종의 충성 서약까지 올렸던 당시의 대법원장은
‘투철한 국가관에 의한 판결’을 강조하면서 고분고분하지 않은 판사들을 대거 좌천시켰습니다.
“사법부의 수장은 정치적, 공안적 사건에서는 정부에 협력해야”
-유태홍 전 대법원장 (박철언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말하자면 ‘인사유감’ 이라는 이 글은
사법부의 암울한 현실을 외부에 알리고자 했던 시도였는데
물론 당연히 그 시도는 좌절됐습니다.
“나라에서 나보다 높은 사람은 대통령밖에 없다.
새카맣게 젊은 판사가 비판하는 것을 가만둘 수 없었다.”
-유태홍 전 대법원장 (서태영 <피고인에게 술을 먹여라>)
아마도 그것은 지우고 싶었을 대한민국 사법부 굴종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참으로 끈질기게 계속되서
2019년 5월 29일, 오늘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전직 대법원장이 재판을 받은 날입니다.
바로 같은 층에서는 전직 법원 행정처 차장의 재판도 있었으니
말하자면 오늘은 ‘재판거래’를 ‘재판’ 받은 날 쯤이 됐습니다.
물론 그들은 승복하지 않았습니다.
“검찰이 재판 프로세스에 전혀 이해가 없는 듯”
“조물주가 창조하듯 공소장을 만들어냈다”
“정말 소설의 픽션 같은 이야기”
-양승태 전 대법원장
숨길 수 없는 ‘역정’이 묻어나는 발언들이었지요.
‘재판을 너무 모르는’ ‘조물주가 창조한 공소장’에는 ‘소설 같은 이야기’가 넘쳐난다지만
적어도 대법원장이 충성서약을 했던 시대에서 이만큼이나 멀리 와 있는 지금
이제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21세기의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장면들
그래서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구치소 앞마당 나뭇잎 위로 부서지던 햇살과 그 밑에서 벌어지던 일탈들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지요.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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