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옛날에는 어떤 방식으로 방송을 만들었나요?//
그 방송이 ‘일요일 밤의 대행진’의 매력이 뭐냐면
뉴스를 가지고 비트는 거야.
행간의 의미라고나 할까?
처음에 PD 선생님하고 작가 선생님, 나 이렇게 셋이서 회의를 하는 거야.
‘다음 주에 뭐할 것인가?’
아이디어 회의를 해가지고 그 회의에서 나온 내용을 작가가 정리를 하고
그때는 카메라가 3대 밖에 없었어.
얼마 저에 우리 후배들이
“형님, 오랜만에 얼굴이나 봅시다!” 해서 프로그램을 갔는데
카메라가 10대가 있더라고
그리고 6시간, 7시간을 녹화를 하더라고.
우리는 그게 아니야
딱! 1시간 짜리다 하면 길어야 1시간 10분 밖에 안 걸려요.
NG가 있을 수가 없어. 코메디는 NG나면 안되니까.
거의 연극한다고 생각하면 돼. 연극.
그리고 프롬프터가 없어.
프롬프터가 없어서 다 외워야 되는 거야.
나는 지금도 꿈을 꾸잖아.
나를 못살게 만드는 꿈이 2가지가 있어요.
제대가 연장되는 꿈.
그리고 대본을 안 외웠는데, 5분 후에 방송에 들어간다는 꿈
그러니까 대사를 외워야 하는 그런 고충이 있는 거지.
그런데 나는 다행히 앵커멘크는 내가 다시 정리를 했어요. 허락을 맡고.
PD가 큐를 줬는데 모르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되잖아.
그러면 PD 선생님을 무시하는 거지. 서운해하시지.
“제가 이렇게 대본을 고쳤습니다” 라고 말씀드리면
“너 같은 사람 처음 본다.”
오전에 연습하고 오후에 녹화를 하는데 점심 때 다 밥 먹으러 가요.
여의도에 좋은 식당이 많아.
높은 사람들이나 부자들이 많이 살아서 좋은 식당이 많아요.
그런데도 식당에 안 갔어. 나는 그 시간에 예를 들어
‘거리에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은 묵사발을 만들어야 됩니다.’
이렇게 할 때에도 묵사발에 대한 연구를 하는 거야.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영등포시장에 가서 묵을 내가 가서 사와. 쉬는 시간에.
왜냐하면 소품실에는 묵이 없어요. 쉽게 상하니까.
같은 말이래도 더 와닿는 거지.
묵사발이라고 하면 언어 자체가 상당히 피해를 주는
상대방에게 위축감을 주는 멘트일 수 있는 데도
그걸 순화 시킬 수 있는 거잖아.
이게 묵이고 이게 사발입니다. 이렇게 하고.
또 ‘자라 자! 넌 잠도 없냐?’
유행어 중에 이런 게 하나 있는데
내가 소품실에 부탁해서 자라를 한 마리 사다달라고 했어요.
그럼 이제 자라한테 이러는 거야.
“자라 자! 넌 잠도 없냐?”
이렇게 한 거지.
그러니까 PD 선생은 나한테 고맙지.
시청자들도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개그를 하다보니까 내가 이제 사랑을 받은 거지.
그리고 끝나면 이제 다들 한잔하러 가는 거야. 고생했으니까.
그런데 나는 술을 못 먹었으니까.
나는 그것 때문에 고충이 많았지. 술을 못 먹으니까.
나는 다음날 프로그램 준비해야 되는데
정식으로 얘기하는 거지.
“저는 먼저 들어갈게요.”그러면 되는데
그때는 “먼저 갈게요”라고 얘기할 상황이 아니었어.
군대라고 생각하면 돼, 군대.
지금 연기자들이 참 대우받는 시대야.
그때는 연기자들이 그렇게 대우받지 못했지. 사회의 통념도 그렇고.
옛날에는 어떤 풍조가 있었냐면
코메디를 보고 있는데도 시청율 조사를 전화로 했어요.
그러니까 ‘어떤 프로그램을 보고 계십니까?’
100집에 전화를 해서 70집이 일요일 밤에 대행진을 본다고 하면 시청률이 70%야.
그래서 이제 집에 전화를 해. 전화를 하면
소위 지성인이라고 하는 분들은 코메디를 보고 있는데도
“나 지금 AFKN 보고 있는데요” 그렇게 대답할 때 였어요.
나는 그 당시에 존경받는, 사회의 일원으로써 사회를 선도하는
그런 코메디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일요일 밤의 대행진을 통해 꿈을 이뤘다.
그 얘기를 인터뷰를 했어요.
그 인터뷰 내용을 선배들이 보신거야.
서운하지. 내 생각만 하면 안 되는 거 였는데.
나는 그건 부분을 전혀 생각 못했고
“그래, 너는 지성인들을 팬으로 두어서 성공했다.
그럼 그동안 코메디를 했던 우리는 뭐냐?”
선배님들 입장에선 서운한 거지.
내가 사려가 깊지 못하게 행동한 것은 죄송하게 생각하는데
그런 것 때문에 내가 재떨이로 맞을 뻔 했어요. 재떨이를 던져가지고.
그런 쓰라린 추억도 있고
내 잘못이지 뭐.
그때는 사회도 무서웠지만, 방송 분위기도 무서웠어요.
지금처럼 자유스럽지 못하고.
아무튼 그때의 방송형태를 되돌이켜 보면은
작가, PD, 연기자가 혼연일체가 되어서
하나의 전쟁이라고 그럴까, 그때는 아주 치열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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