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조_시래기톡

[시래기톡] 김병조의 그때 그 시절 유년시절편 -상-

Buddhastudy 2019. 2. 20. 20:10


Q. 선생님의 어린 시절은 어떠셨나요?

 

나는 1956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갔어요.

1953년에 한국전쟁이 끝났다고.

전쟁이 끝나고 3년 만에 내가 학교에 들어간 거야.

그때는 학교 건물이 없었어.

그래서 가마니 깔고 공부했다고.

 

그리고 가르쳐야 한다는 그러한 교육열 때문에

이게 학생들이 넘쳐났어.

그 조그만 면에 120, 한 학년에 120명이 엇으니까.

또 그때는 미국의 구호물자라 그래가지고 우유가루나 옥수수가루 이거를 배급을 받아가지고 먹던 시절이야.

 

그때는 집안 식구 중에 한 사람을 미는 거야.

다른 식구들은 희생하는 거야.

형제 중에도 좀 될 만한 친구를 밀어주는 거야.

그러면 다른 형제들은 희생을 하는 거야.

누나들이나 남동생들은 희생을 하는 거야.

그래서 우리 누님도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나오셨어.

 

근데 이제 가끔 나이가 들어서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나에게 최대의 재산이 뭐냐?

나는 어렵게 자랐다는 거야.

 

어렵게 자란 건 아니야.

다시 말씀드리지만 부모님이 어려웠던 거지.

우리는 어렵지 않았는데 사실.

우리는 어렵지 않았어요.

어른들이 어려웠는데 그래도 어떻든 그런 남들보다는 풍족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어렸을 때 꿈이 그거 였었어.

선산 사는 게 꿈이 었어. 선산.

우리 고조할아버님이 남의 집 땅에 계셨거든. 내가 장손인데.

논 사는 게 꿈이었고. .

밭이 우리 밭인 줄 알았어. 한 열마지기 였길래.

산지기 였더라고 산지기.

 

산지기가 뭐냐하면 종중에 있는 산, 선산을 지켜주는 거야.

종중에 있는 산의 후손들이 그 동네에 살다가 다른 동네로 가게 되면

그 산을 지켜주고 해야 될 거 아니야.

그 산을 지켜주고 거기 시제를 모셔주고, 그리고 그 보답으로 거기 딸린 밭을 버는 거야.

밭을 자기 소유로 하는 거야. 나는 우리 밭인 줄 알았어.

그게 그런 밭이 었드라고.

논이 한 여섯 마지기가 있었는데 소작 이었드라고.

 

우리 아버님이 원래 공직에 계셨다가 관두시는 바람에 그런 어려움을 겪게 됐는데, 이념 때문에.

그때는 이념이 상당히 가슴 아픈 추억을 많이 만들었어.

 

우리 동네 절반이 6.25 전쟁 때 돌아가셨어. 특히.

그런데 다행히 우리 집은 작은 아버지는 군인이시고, 우리 아버지는 앞선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이고, 이념적으로 이렇게 좀 형제간에도 이념이 달라서 살아남았던 거야.

금방 이해 못할 얘길 거야.

 

그때는 낮에는 군인이나 경찰이 지배하고, 밤에는 이념이 다른 분들이 지배하던 시기가 있었어.

그런 어려웠던 시기를 살아오신 분들이 부모님들이야.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있어서는 안 돼.

가족들끼리 서로 등을 돌리는 일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돼.

 

그런 어려움을 나는 갓난 애기 때 겪은 거지. 나는 경험하지 않았고.

언젠가 얘기 하겠지만, 나는 하마터면 이 세상에 없을 뻔 했는데, 우리 작은 아버지 때문에 살아나게 됐지.

 

나를 잡으러 온 거야. 피난을 갔어요. 날 데리러 왔어.

우리 아버지 때문에 나를 잡으러 온 거야.

그런데 우리 삼촌은 군인이야.

그러니까 군인 가족이면서 이념이 다른 쪽에 가족인 거야.

 

나는 아버지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잡혀가야 되는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그래. 우리 할아버지가.

병조를 데려가려면 나를 데려가라.

우리 할아버지는 군인의 아버지잖아. .

 

그것 때문에 보류. 김병조 가족만 보류.

그때 잡혀간 가족들은 다 죽었어.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너희 작은 아버지 은공을 잊지마라.

그런데 그분도 돌아가셨어.

 

그러니깐 그러한 일이 있고 얼마 안 있어서 내가 초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그때는 초등학교 다니기도 어려웠어요. 먹을 게 없으니깐.

일을 해야 되는 거야 일을.

 

뻔하잖아. 시골 생활이라는 게.

돈을 벌 일이 없잖아.

 

우리 어머니는 정말 그 어려운 가정에서 자식을 가르치려고 안 해본 일이 없었으니깐.

감 있잖아. .

100개를 한 접이라고 그래.

네접 다섯 접씩 이렇게 머리에 이고, 그 높은재, 양고살재라고 있어요.

그 재를 넘어서 고창에 가서 감을 팔아다가 가용도 쓰고

우리 큰아들 옷도 사주시고

그런 삶을 사신 분이 우리 세대의 부모님들이고, 우리 세대의 선배님들이에요.

 

그러니깐 우리는 항상 쌀독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어.

쌀독이 과연 채워져 있느냐.

 

그러니깐 우리는 항상 책임감이 있는 거야. 책임감.

옛날로 돌아가면 안 된다고 하는 강박관념이 있는 거야.

 

우리가 어렸을 때 쓰라렸던 추억을 아이들한테 물려주고 싶지 않은 거야.

젊은이들이 이해해야 돼.

 

너무 짠돌이라고 그러면 안 돼.

배수진이라고 그러지. 배수진.

뒤로 물러서면 바다에 빠져 죽는 거야.

뒤가 없는 거야.

 

그런 세대들이 최대한 50대 이상 분들이 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랐어요.

다시 얘기 하지만

우리가 고생한 게 아니고

부모님들이 고생하신 거지. 부모님들이.

 

그런 마음으로 젊은이들이 아버지나 어머니를 바라 봤으면 좋겠어.

우리가 고생한 게 아니고 부모님이 고생하신 겁니다.

우리는 아주 풍족한 삶을 살아왔을 뿐입니다.

 

나는 늘 그렇게 생각해.

우리 부모님 고생하신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