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올라정견

(알라야 정견) 나를 깨우는 명상 #2-2 인공종교와 자연종교

Buddhastudy 2024. 10. 9. 18:51

 

 

2. 수행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2) 자연종교와 인공종교

 

 

저는 앞장에서

자연종교와 인공종교에 대해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보다 더 구체적으로

그 개념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합시다.

 

왜냐하면 그 개념을 잘 이해하셔야

앞으로 제가 하려는 말들이

보다 더 잘 이해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교 문제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좀 생소하지만, 자연종교라는 참신한 개념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들이 생각 속에서 만든 [인공종교]

그렇게 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진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담고 있는

원래의 [자연종교]를 구별하자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 있는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 그리고 그 외에 크고 작은 종교들은

다 누군가 창시자가 있고, 그는 신격화되며

나머지 중생은 그를 믿거나

혹은 그에 의지하여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성종교들은 앞장에서 말씀드린 바처럼

여러 가지로 합리성이 부족한 지적인 문제가 있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문제가 별것 아니라고 말할 분도 계시겠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문제들에 걸려서

그 종교를 통째로 백안시하거나 등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저도 한때는 그런 문제에 걸려서

해당 특정 종교를 통째로 부정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내적인 눈을 뜨는 과정에서

처음부터 그런 흠결이 없이

완전 무고하며 인간의 영혼에 직접 교신을 해왔던

또 다른 내적인 변화의 길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태양을 비롯하여 삼라만상 속에 깃든

신성한 힘을 경유하는 직관과

종교적 감성에 근거한 믿음과 깨우침입니다.

 

또는 지금 여기

나와 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실재하는

살아있는 생명과 사랑의 힘을 느끼는 신앙입니다.

 

여기엔 아무런 학문적인 성서나 말과 글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세계에 눈을 뜬 이에겐

이 세상이 그대로 살아있는 경전이요, 바이블입니다.

 

예를 든다면

먼 옛날 북미 대륙에 살았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그런 신앙을 가졌죠.

그런 것을 저는 바로 [자연종교]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책과 생각 속에서 진리를 찾아내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내 삶 속에서 찾아내고

그것을 내 삶 속에서 재확인하는 방식입니다.

 

저는 자기 자신에게 깨어 있는 명상이야말로

우리 안에 본래 깃들어 있었던

[자연종교]를 다시 깨워내는 길이라고 봅니다.

또 그래야 제대로 된 명상이라고 봅니다.

 

자연종교는 사실 인공종교의 모태요.

인공종교가 태동하기 전 먼먼 옛날에

이미 인간과 함께 인간의 영혼 속에 서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큼 더 원류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더 직관적이며 더 깊고 심원합니다.

그것은 말과 글의 차원을 넘어서 있으며

더 근원적인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류는

그 시대엔 말과 글이 아닌

직관과 영감을 통하여 서로 직접적인 교류를 하며 살았습니다.

오늘날 현대를 사는 인간들은

뭐든지 더 요약되고, 읽기 쉽고, 정리된

소위 갖기 쉽고, 믿기 쉬운, 비타민 알약 같은 종교를 원합니다.

 

그러나 간편주의와 요약주의, 바로 거기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것은 실로 매일 조금씩 각성이란 도움은 주지만

그 대가로 결국은 전체적으로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빼앗아 가는 커피 중독과도 같습니다.

 

바쁘다고 진리조차도 다이제스트로 소화하거나 가지려 들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기존 종교를 믿으면

무조건 다 그렇다는 얘기는 결코 아닙니다.

기존 종교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자연종교의 차원으로 승화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기의 영혼 문제만큼은

남의 해석이나 이론에 맡기지 말고

자기가 직접 재배하고 가꾸어서 섭취하라 이 말입니다.

 

인스턴트 식품처럼 가공된 오늘날의 신앙이나 교리들은

그것들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을

자연종교에서처럼 진정한 영성으로 깨어나게 하기보다는

집단의 고정관념 속에서 고정된 생각에 갇히게 만들어

그들을 집단 동물농장처럼 사육하고 있을 뿐입니다.

 

현실에 살아있는 [자연종교]에서는

우리 안에 그리고 온 누리에

이미 하나님 부처님이 충만하게 계십니다.

 

대도무문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숨 쉬고,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움직이는

지금 바로 이 순간이

다 이미 진리의 그 힘이 움직이시는 도리입니다.

 

세상이 이미 신의 몸통이며

우리는 이미 그의 품 안에 사는 분신이자 그의 일부분들입니다.

우리가 내면으로 눈을 떠서 살아있는 현실인 이 세상 안에서

영적으로 성장하면 할수록

우린 더 깊어지고, 지혜로워져

그분의 심장과 머리의 세포가 되고

더 나아가 그분과 온전한 하나를 이룰 것입니다.

 

그 길은 우리가 선택하고 가는 대로 끝없이 생겨납니다.

길에서 길을 물으면

길은 어떤 길로 가라고 말해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찾아내고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남이 만든 길들은

비록 큰 문과 큰 길로 안내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뻔한 결과를 낳고 맙니다.

 

그들이 이미 무한성의 우리를

그렇게 사상적으로 한계 설정을 하고 가두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쩌면 여러분에게

너무 좁은 문으로 가라고 요구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깨어 있을 줄 아는 영혼을

더욱더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바로 기존의 고정관념과 한계를 무너뜨리고 도전하는

그런 위대한 영혼들에 의해 창조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수도승들은 진리로 가는 길을

오늘날처럼 간단한 믿음만의 문제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왜 간단히 믿으면 한 번에 될 일을

평생을 다 바쳐가면서 자기를 신에게 헌신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기성 종교의 말과 글 이전에 있는

자연종교의 진리를 스스로 느껴보고 체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한 신중하고도 진실한 정신 자세가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기존의 신앙을 따라가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지금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깊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모든 전 세대의 수행과 신앙은

반드시 후세대의 비판과 교정을 받아왔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