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나 자신을 똑바로 보자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저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한 번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이 깨달음인가?” 하는 문제의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수행자라면
당신은 지금 깨달음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지금 노력하고 계십니까?
당신은 색즉시공이 진리라 하니까
무조건 내가 다 없어지고 사라지고
오직 순수한 의식만 청정하게 있는 상태 정도로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오매일여로
항상 자나깨나 하나의 그 어떤 의식으로 귀일해야
깨달음이라고 보십니까?
혹은 신통력을 발휘하여
타심통도 하고 전생을 알아맞히며
남의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이고
지금 마주 앉은 사람 지갑 속에 돈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깨달음이라고 보십니까?
혹은 우주가 다 자기가 되어야
그래서 범아일여나 우아일여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제가 앞에서도 첫 생각에 매이고 걸리면
그다음이 다 그 생각만 따라갈 뿐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죠.
화두 참선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색즉시공이란 말에 매여
무조건 다 끊어지고 없어지는 자리로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게 깨달음이라고 하는 거죠.
그러나 깨달음이란 게
과연 인간보다 더 낮은 동물이나 식물
더 나아가서는 광물의 의식 수준에 이르기까지 가야 하는 것 만일까요?
그러자면 우리가 진리라고 인정하는 이 세상은
그런 생각과 논리 속에서는
다 헛된 진화와 발전을 거듭하는 것뿐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행복과 선함은
또한 우리들의 다양한 지식 활동이나
그로 인한 현대 문명의 발전은
모두 다 부질없는 한때의 번뇌 망상이요, 착각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만약 그런 논리가 진리라면
그래서 이 세상에 인간이 안 나오고
생각이 안 발전하는 것이 더 바람직했던 것이라면
어떻게 깨달음이라든가, 수행이란 문화가 생겨날 수가 있겠습니까?
진리도 우리가 인식하며 가르치고 전하기 위해서는
고도로 진화된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논리는 자기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두 다 치매 환자나 정박아 수준으로 돌아가자는
퇴화론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 잠잘 때에도 항상 같은 숙면일여나 오매일여의 의식을 유지하여야
깨달음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것은 잠 못 자는 불면증 환자만을 양산하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진짜 오매일여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참다운 오매일여라는 것은
내가 무한한 전체성, 가능성의 위대한 존재임을 알아
일상 중에도 그 자리에서 결코 흔들림이 없다는 뜻이며
그런 고차적인 의식이 되면
내면적으로 아주 밝게 되는데
그 밝음이 항상 세상을 뒤덮고 삼켜버리는
즉 [전체와의 합일]이 되는 체험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는 것뿐이지
잠잘 때도 무엇을 잃어버릴까 봐, 혹은 놓칠까 봐
전전긍긍하며 붙들고 있는 게 오매일여의 참뜻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잠잘 땐 잘 자고
일어나도 본성의 오매일여에는 흔들림이 없습니다.
나는 [항상 전체이고,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 그 자체]라는 자각이
의식의 바탕에 늘 자신감으로 충만하게 존재하는 상태가
바로 깨달음으로 빛나는 내면이 드러날 때 생기는
참 오매일여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범아일여나 혹은 우아일여가 되어야 깨달음일까요?
혹은 어떤 종교나 수행단체처럼
하나님이나 교주가 만들어 놓은
천국이나 신계를 가야 깨달음일까요?
범아일여나 우아일여는
다 마음이 작용한 쓰임의 결과적 상태이지
본래자리는 늘 끊어지고 적조한 상태라
범아일어나 우아일여만 되었다고 바로 깨달음인 것은 아니며
천국이나 신계는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예쁜 완상용 금붕어들 넣어두고 보는 어항 같은 것이라
스스로 자유로운 창조적 존재에겐
감옥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깨달음의 상태일까요?
그것을 제대로 알고 이해해야
비로소 제대로 그곳으로 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란
바로 더 이상 더 하거나 덜 할 것도 없는
지금 그대의 상태입니다.
정말입니다.
모든 것을 다 느껴보고
이런저런 체험을 다 할 수 있으며
너무나 아름답고 행복하며
깊은 사랑과 고귀함까지도 마음껏 창조해 볼 수 있는 당신,
또 반면에 너무나 추하고 악하기도 하며
보잘것없고 화도 잘 내며 게으르며
성격 나쁘고, 남의 말에 빠져 이리저리 갈팡질팡하기도 하며
이건가 저건가 하는 못난 당신,
혹은 열심히 진리를 찾겠다고 출가하여 수행하는 당신,
혹은 지금 이런 제 말에 의심하며 반신반의하는 당신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깨달음의 그 자리는
전지전능하므로
그 어떤 것이든
다 만들어내고, 다 누려볼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자유의지]의 진정한 참뜻입니다.
아, 여기서 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들은 지금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자유를 다 누리며
제 마음대로 이 세상을 창조하여 누리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바로 모든 잘남과 못남, 선함과 악함까지도 창조하고 체험해 보는
무한한 창조성의 존재라는 바로 이 진실
부자유함까지도 창조하는 자유
모름과 무지까지도 창조하는 이 절대의 능력 앞에
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여러분, 깨달음이란
바로 이런 무안하고 전지전능한
나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는 성공학의 진리 명제들이
공연히 있는 줄 아십니까?
우리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는 대로 다 되는
놀라운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무한한 가능성의 나, 본성의 나를
자각하고 통찰하여, 발견하는 것이
바로 참 깨달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이며
과거의 나로부터 참으로 깨어나는 길입니다.
지금 여기 내 속에 숨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나
앞으로 너무나 고귀하며
아름답고 행복한 자신을 체험할 운명이
지금도 꽃 피어나는 바로 나
그 자체가 바로 이미 완성된 존재이며 빛나는 신성을 지닌 나이며
나아가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바로 그러한, 너무나도 고귀한
살아있는 진리의 꽃송이 그 자체들이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전지전능한 하나님, 부처님이
지금 깃들어 살고 계시다는
성경과 불경 말씀의 숨은 참뜻이랍니다.
그리고 이것을 깨우치게 하여
우리가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이 세상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그렇게 깨달은 바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내면과 외면의 진정한 천국 극락을 실현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진리가 이 세상에 물질화하여 나타난
궁극적인 목표인 것입니다.
하지만 머리로 이렇게만 이해해서는 아직 부족한 것이니
그것은 스스로 체험을 통한 증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체험을 통한 증득과 변화를 통한 자기 확신
그리고 그를 통한 진리와의 현실적인 합일의 과정인 것입니다.
그 자세한 수행 방법은
다음 장에서 다루어 보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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