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 자신을 똑바로 보자.
5) 무아의 내가 있다.
지금 한번 눈을 감아보십시오.
이제 제가 묻겠습니다.
“거기에 뭐가 있습니까?”
그러면 100이면 거의 99명의 사람은 다 똑같이
“아무것도 없는데요”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럴까요?
여러분, 우리는 개념의 착각에 속아 살고 있습니다.
한번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無라는 게
개념이나 생각으로 말고
실제로 이 세상에 실존적으로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無라는 것은 없다는 것인데
어떻게 없는 것이 다른 것과 비교해서가 아니라
홀로 실존적으로 존재하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생각 속에서는
무無라는 개념이나 말을 잘 쓰지만
그것은 어떤 상대적인 비교 상태를 말하는 단어일 뿐
예컨대 내 의식이 없다든지, 돈이 없다는 등
그것이 홀로 실존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늘 항상 그 어떤 주체가 다른 때에 비해
상대적으로 있느냐 없느냐의
분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는 이처럼 스스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얘기를 왜 하는가 하면
우리가 불교에서 말하는 無我란 말을
오해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습니다.
무아無我란 말은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나란 개성의
자기 정체성이랄 게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체험하다시피
수십 년 이상 살아온 과거가
우리 속에서조차 제대로 기억되거나 보존되지 않은 채
지워지고 잊어버려지는 데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치매에 걸리면 우리는 완전하게 자기를 잊어버립니다.
무아無我
바로 이런 뜻에서의 무아無我
(영원히 나라고 홀로 보존되는 게 없음)입니다.
하지만 거기엔 갓난 어린애와 똑같은 상태로 되돌아간
우주 생명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살아오면서 그렇게 다양한 윤회를 통해
나타나고 사라지는 수많은 과거의 나들은
다 무엇을 근거로 해서 그렇게 윤회를 거듭하는 것일까요?
무엇이 그렇게 끈질기게 삶을 되풀이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가 나라고 여기는 상념想念에너지입니다.
그 에너지가 나를 그렇게 끌고 다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소멸시키면
나는 적멸에 들고 더 이상 아무것도 없을까요?
그래서 무아가 드디어 실현되었으니 좋아지는 것일까요?
(사실은 그 논리라면 좋아질 나도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그렇게 가르치는 데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자기 모순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래의 상태가 절대무絶對無라면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적멸이었다면
어떻게 우주의 수많은 생명이 이렇게 쏟아져 나올 수 있었으며
최초의 무명 번뇌가 생겨날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홀연히 생겨났단 말은
달리 말하면
A는 아니었지만
A가 생겨날 가능성이 있다가
마침내 생겨났다는 말이 되어야, 맞지 않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죽어서 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면
영계도 없고, 천당, 지옥도 없고, 윤회도 없는 것이라야 맞는 말이고
설사 양보하여 윤회의 상념에너지만 있고
깨달아서 그것을 완전히 소멸시키면
부처가 된다는 논리라면
그렇게 완전히 자기가 소멸되어
아무것도 안 남고 없어지는 부처는
싫다고 할 사람이 대단히 많을 것입니다.
또 그렇다면 굳이 수행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살 때 자기가 하고 싶은 짓 다 하고 살면 그만이다라는 사람들만
세상에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무지해서 그렇다고 싸잡아 비판하기엔
그것은 인생을 고해로 보느냐
아니면 역경에도 불구하고 살아볼 만한 의미가 있는 곳이라고 보느냐의
가치관 문제이지
무엇이 더 옳고 틀리고의
정답 여부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또한 게다가 대승경전에 의하면
석가는 원래 오랜 옛날에 이미 부처를 이루었으나
열반에 들어 계시다가 마음을 일으키시어
다시 사바세계의 중생 제도를 위해 나타나셨다는 얘기와도
모순될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히 없어졌는데
어떻게 다시 마음을 일으켜 나타난다는 얘기입니까?
그러므로 무아의 가르침은
본래 개체의 나라는 것이 없다는 얘기이지
전체의 영원한 우주 생명의 나, 전체성의 나는
있다고 보아야 논리가 맞고
진리에도 부합됩니다.
그래서 진리를 공부한다는 것은
개체의 내가 의식이 있을 때
그 개체의 잠재의식을 자기 안에서 지워버리고
(그렇다고 치매 환자 상태가 목표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치매 환자는
자기라는 개체의 초점 의식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며
자기 안에 여전히 내재한
잠재의식에 끌려가기 때문입니다.)
전체성의 나의 자리를 내 안에서 찾아서
그것과 하나됨으로써
개체의 나를 초월하고
전체성의 영원한 생명 자리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자, 이제 그렇다면
우리가 눈을 감았을 때
거기에 과연 무엇이 있다고 말해야 옳겠습니까?
거기엔 무한한 가능성의 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하나에 얽매이지 않으며
이런저런 존재도 다 될 수 있는
영원한 우주의 생명이 충만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물질적 감각만으로 보고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거기엔 개체의 나로서는 무아이지만
전체 생명으로서의 더 큰 나(The Great I)가 살아서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없다고만 개념과 생각 속에 가둘 것이냐
아니면 있음을 실제로 직접 느껴보고
그 실재를 아름답게 꽃피울 것이냐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선택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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