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_4)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이제 우리는 진리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늘 항상 나와 함께
내 안에서 초월적인 모습으로
그리고 또한 내 밖에서 온누리에 넘치는 세상
그 자체라는 형상적인 모습으로 동시에 계시면서
이 모든 우주를 친히 움직이는 분이셨던 것입니다.
진리가 그러하기에
예수는, 너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고
석가는, 일체중생이 본래 부처 아님이 없다 하셨던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얻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사실은 그 말이 곧 깨달음이란 말과 다를 바가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말은 단지 방향성을 가진 차이만이 있는 말로서
[구원]이란
우리가 신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측면으로 볼 때
그 관계를 수동적으로 표현하는 말이고
반대로 [깨달음]은
우리가 신, 혹은 부처님에게 나아가는 측면으로 볼 때
우리와 신의 관계를 우리 입장에서 능동적으로 표현한 표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이 바로 이 [진리를 깨우쳐 아는 것]일진데
우리가 온전하게 [깨닫는다]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을 깨닫는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진리의 존재 방식과 그의 형상 초월적인 모습을 직관하며
그의 활동 및 그 결과의 창조물들을 다 깨닫고
그것들을 다 그렇게 살아있는 신으로 대하며
더 나아가 나의 생명 활동을 온전한
신(부처)의 그것으로 만드는 행위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치가 바로 이러하기에
예수는 길가에 버려진 병자와 어려운 이들을 돌보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을 돌보는 것이다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진리가 이러하기에
우주 전체를 하나의 생명으로 하는 위대한 영혼으로 거듭난 석가도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만약 모든 형상을
그 형상이 아닌 그 형상을 넘어선
더 크고 위대한 하나의 존재로 본다면
즉시 부처를 보리라” 하고 말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여태까지 [이것이 최고의 방법이다] 하며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에 대해
독점적으로 말하고 가르쳐온
화두 참선법이나 위빠사나 관법, 연불법 수행 등이
과연 이렇게 온전한 체계로 말하고
이렇게 우리를 깨우쳐 주었습니까?
또한 요즘 국내외적으로 널리 유행하는 다양한 명상의 스승들이
그렇게 가르쳐 주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화두참선 수행법은
[색즉시공]과 동시에 [공즉시색]의 진리로서
이 세상을 움직이는 진리의 본체를
[색즉시공]만에 입각하여
진리의 體를
마치 모든 것이 다 끊어지고 사라진 적멸의 자리만으로
제한하고, 집착해 온 부족함이 있고
-위빠사나 관법은 진리의 활동,
즉 用이 어떻게 일어나고 사라지느냐만 가지고 진리를 탐구하며
전체를 통찰하지 못한 부족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들은
온전한 진리 전체를 깨닫는 방편이 아니라
진리의 體相用 중
어느 하나만을 하나의 관념(첫 생각) 속에서 진리라고 붙들고
그것만에 집착한 내재적 한계를 가진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가만히 보면 자칭 깨달았고 구원받았다는 사람들이
재색이나 명예에 관하여
남들로부터 비난받는 행위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남들을 업신여기거나 자기 종 부리듯이 하는 것 역시
제가 보기엔 덜 깨치고 덜 성숙하여서 그렇다고 판단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완전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를 알았습니다.
-즉 그것은 바로 나를 중심으로 하여
내 안에서 나를 있게 하시며
나를 사시는 그 초월적 자리(진리의 체)의 본래면목을 아는 것
-그리고 두 번째로는
온누리에 다양하게 나타나신
그분의 참모습이 어떠한가를 보는 것(진리의 상)
-마지막으로 내가 그분 안에 있고 그분이 내 안에 있으니
그 진리가 내 안팎에서 되찾은 진리답게 활동하고 나타나시도록
나의 언행(진리의 용)을 통해
적극 실천하는 것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진리의 깨달음이며 구원이며
동시에 내 안에서 과거의 내가 죽고
더 크고 위대한 나로서 거듭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한
이 세상적인 관점으로 볼 때에도
지금 개체적인 이 나의 완전한 삶이며
나의 자아실현이자 나의 변함이고
인격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길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기독교적으로 표현한다면
-하나님을 깨달아 아는 것(진리의 체)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적 피조물이자
그분의 세상적인 나타나심을 보는 것 (진리의 상)
-더 나아가 그러한 존재로서의 나와 모든 존재들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도록 하는 것 (진리의 용)에 해당하니
바로 성부, 성령 성자에 대한 깨우침이요
그에 대한 실천적인 공부라 하겠습니다.
'알라야정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라야 정견) 나를 깨우는 명상 #3-6.깨달음 체험에 목마른 그대에게!(모든 체험을 넘어서 있는 나) (0) | 2024.11.07 |
---|---|
(알라야 정견) 나를 깨우는 명상 #3-5. 무아의 내가 있다. (0) | 2024.11.06 |
(알라야 정견) 나를 깨우는 명상 #3-3.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0) | 2024.10.30 |
(알라야 정견) 나를 깨우는 명상 #3-2. 진리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0) | 2024.10.24 |
(알라야 정견) 나를 깨우는 명상 #3-1.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 (0) | 2024.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