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 자신을 똑바로 보자
6) 모든 체험을 넘어서 있는 나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내가 죄 많은 번뇌 중생이구나, 그러니 진리를 닦아야겠다” 하고
스스로 알고 나온 사람은 없습니다.
우린 다 어느 날
우리가 죄인이거나 중생에 불과하니
진리를 찾아야 하고,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나 글들을 보고
그것(생각)을 옳다고 받아들인 나머지
그 말들에 따라 스스로
이 수행이라는 것을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 접수된 사람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는 아주 많은 종류의 종교나 여러 수행법들이
이미 백화점식으로 잘 전시되어 있습니다.
또 그들은 서로 자기 방법이 최고라 하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나 불교 같은
큰 종교에 몸담은 사람들도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오늘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런 모든 이 세상의 종교나 수행법들은
다 생각들이고, 그 생각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면
여러분이 얻는 것은
다 결국은 이런저런 체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체험들은 소중하죠.
마음이 깨끗해지거나 고매해지거나 행복해지거나 평화를 얻거나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를 얻거나
심지어는 꿈속에서 예수 석가를 만나거나
제가 제 마음속에서 부처가 되어 보거나
우주를 자기 안에 품어보는 등등
그것들은 다 매우 훌륭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여러분이란 그릇 안에
무엇이 담기느냐 하는 체험의 문제이지
여러분들 존재 자신의 문제는 아니다 이 말입니다.
반면에 여러분이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보는 성품, 듣는 성품, 느끼는 성품, 생각하는 성품 등입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무엇을 보거나 듣거나 느끼든지 간에
그 대상들은 끊임없이 변해왔지만
그 보고 듣는 성품들은
전혀 변함없이 그대로 똑같이 그 역할을 잘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여러분의 진짜 [나]입니다.
이것이 그릇이며
불교식 용어로는 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하여 여러분이 이런저런 수행법을 대하고
“이게 옳은가 아닌가” 판단하시는 것들은
다 본질상 하나의 생각들이며
그 생각에 의해 수행해 오시면서 느끼고 체험한 것들은
그 생각이 가져온 결과물들로서
일종의 체험들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것들은 전부 마음의 쓰임새에 불과하니
用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아무리 대단한 마음의 경지나 평화를 얻었다 하여도
그것은 다 여러분의 본질은 하나도 안 변했고
다만 그 본질이 가진 것만이 변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닫는다]는 것은
또 진정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치]를 알고
자기의 [참모습]을 제대로 [자각]하는 데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자극하지 못한 이는
술취한 이와 같습니다.
술취한 사람은 똑바로 못 서고, 못 걷는 거와 같이
자기의 참모습을 모르면
제아무리 대단한 수행을 하고 경지를 가졌어도
그 경지는 다 오고 가는 것들 뿐이라
늘 그것을 유지해야 한다는 착각이나 스트레스를 갖게 됩니다.
불교에 사자와 개의 차이에 대한 얘기가 있습니다.
돌을 던지면
개는 그 돌을 쫓아가 삼키지만
사자는 그 돌을 던진 사람을 쫓아와 문 닫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나 도에 대하여
그 누가 무어라 대단하고 기막힌 얘기를 해도
그것은 다 그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그들의 그 생각을 따라서 열심히 수행해 보면
얻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기막히게 좋고 대단한 체험이고요.
사람들은 여기에 속아
개처럼 그들이 던지는 돌(생각)만 따라다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생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자는 그 돌 생각을 던진 자를 즉시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일 뿐이야” 하고 판단하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 즉 의식하는 [나]를 봅니다.
늘 이렇게 자기 자신
즉 보고, 듣고, 느끼고, 의식하고, 생각하는 나를
계속하여 자각하고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나의 體(참나)를 찾는 올바른 길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남들이 “이게 진리다” 하는 것을 따라다니기만 한다면
여러분들은 평생 그곳에 구속되어서
그 생각과 체험들을 굴리지 못하고
오히려 그것들에 끌려다니고 매여 사는
개(犬)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즉 제 말의 요지는
체험을 본질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생각의 주인이 되어야지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그런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런 생각(이것도 또 하나의 생각입니다.)
여기에만 그쳐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본질적으로
창조와 체험이 되풀이되는 연속성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 속에서만 진리를 탐구해서는 안 되며
우리는 실제적으로 그런 생각에서 더 나아가
창조와 체험을 통해
그리고 최고 최대 최상의 체험을 통해
자기를 확장시켜 보고
그 결과 자기를 무한하게 성숙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 이 우주에 몸과 마음을 가지고 나타나서
이처럼 지지고 볶고 사는 것은
자신을 자각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자각]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자각하든 못하든
자기는 실제상 변함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자기의 마음을 제대로 깨달아 알고 쓰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부처)의 자녀들이 아니지요.
그것은 마음의 불구자들이며
그래서 이 세상엔 마음이 병에 걸린 사람들
(마음이 불구인 신, 부처의 자녀)가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실상을 먼저 깨달아 알아야 하지마는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다음 단계
즉 자기 마음을 한번 질적 양적으로 최대화 극대화시켜
체험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윤회하는 것도
바로 이 까닭 때문입니다.
제가 본래 신이나 부처라면
그것만 알고 그칠 것이 아니라
그답게 자기의 마음을 이 존재의 마당에서
무한하게 한번 발휘해 보고 느껴보아야 합니다.
신묘하게도 불교나 기독교에
전부 다 [삼위일체]란 말이 있죠.
불교에서는 법, 보, 화신불의 [삼불]이라는 말이 있고
기독교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가 있습니다.
이것이 공연한 말이 아닙니다.
즉 자기를 자각하여 자기를 깨치고 아는 것이
법신불(하나님, 성부)을 아는 것이라 한다면
마음은 그것의 굴림새
즉 보신불(성령)을 아는 것이요
그 결과로 나온 이 몸에 집착하는 작은 마음을 버리고
이 세상 삼라만상 전체를 자기 몸으로 삼아
크게 되는 것은 화신불(성자)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삼위일체로
부처(신)을 완전히 깨달아 알고 실현하여야
참으로 대각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종교나 명상 수행법은
법신불만 아는 데 그치거나
혹은 또 다른 보신불이나 화신불들만 깨달아 아는 데 그치니
골고루 완전하지 못하다 이 말씀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우선 첫째로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합니다.
그 자신이 뭐 아주 어렵고 별스러운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종교 속에서 책에다 아주 어렵게 써놨기 때문에
거기에 속아 빠져서 어려운 것입니다.
생각하고 의식하는 여러분 자신
그게 바로 [법신불]입니다.
의식하고 듣고, 보고 아는 나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게 죽은 후에도 변함없이 계속된다, 이 말입니다.
그다음엔 거기서 그치면
전체와 개체와의 관계를 모르게 됩니다.
너와 나의 관계도 깨치지 못하고
또 성인들이 그렇게 강조하는 사랑이
왜 중요하고 자비가 중요한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을 알려면은 [보신불]
즉 마음자리는
크고 작기만 해서
커지면 온 생명을 다 사랑하고
우주를 다 덮을 정도로 자유자재하게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 그다음 단계에 가서는 [화신불]
즉 이 몸 개체 하나만이 자기가 아니라
알고 보니 우주 삼리민상 전체가
다 또 하나의 나라는 것을 증득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완전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즉 그 순서가
처음엔 법신불을 알고
그다음엔 법신불을 알고
마지막으로 화신불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산불은 다 증득해 보면
그 모두가 다 현재 그대로의 우리의 지금 모습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으면서도
다만 우리가 겉모습의 속아
우리 속에 이미 들어있는 그 놀라운 힘과 능력들을
못 써왔었던 것일 뿐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모든 진리에 관한 책이나 글이나 말들
즉 바꾸어 말해
생각과 그에 따른 행동들
바꾸어 말해 체험들에 빠져
더 이상 무작정 따라가지 말고
잠깐 멈추고
진짜 자기부터 우선 찾아라
이 말을 드리는 겁니다.
참된 나는 모든 체험들을 넘어서
여기 지금 이대로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이 몸과 마음을 거느리고, 쓰고 있는 당신
바로 그대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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