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깨우는 명상
4-1) 인간이란 존재의 이해
사람들은 자기란 존재를 제대로 모릅니다.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무엇인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니 태어나기 전에 본래면목이 어떠한지도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 단락에서는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그것을 한번 깊이 탐구하여 보기로 합시다.
종교인들은 인간이 마치 태고적부터 영혼까지
무한히 존재하는 영원한 형상의 존재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이 지구상에 인류와 비슷한 형상을 가진 생명체가 나온 것은
약 200만 년 전이며
현 인류의 조상이 출연한 것은 50만 년 정도로 봅니다.
하지만 수십억 년 지구 역사에 비하면
이 50만 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앞으로도 우리가 지금과 같은 형상을
영원히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공룡이 멸종한 것처럼 환경이 바뀌면
우리도 언젠가는 멸종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만들어낸 모든 종교나 깨달음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인공 종교가 아닌 자연종교
우주에 본래부터 있던 말과 글 이전의 존재인
신을 직관하고 느끼는 종교가
사실은 더 영원한 진리에 가깝다는 말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진리란 영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미 시작부터 영혼에서 나온 것이 아닌 종교들이
인류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들이
어떻게 그 이후엔 영원을 가지겠다는 것일까요?
이미 논리적으로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의 최첨단 과학인 양자물리학은
이에 대하여 인류가 상상하는 그런 인격적 신은
우리들 생각의 세계 속에나 있지
실제로는 이 우주에는 존재할 방식이 없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극히 소미립자 세계로 들어가 보면
우리는 다 하나의 미립자들로
이리저리 구성된 배열 요소의 차이밖에 없는
소미립자들의 덩어리들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우리는 다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미립자들을
그렇게 다양하게 구성하고 움직이게 하는 어떤 힘은
이 미립자들의 자체 변화와 파동에서 직접 오는 것입니다.
즉 그 외부에서 어떤 제3의 벡터나 손길이
가해져 오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자물리학은
눈에 보이는 이 물질 차원에서는
이미 신이 계시는 곳이 없다고 확인되었고
미립자의 극미의 세계에서조차
그런 존재는 발견되지 않은 만큼
종래개념의 우주 어딘가에 따로이 계시는
그런 신은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개념의 신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미립자들을 넘어서서 존재하며
모든 미립자를 움직이게 하고 변화하게 하는
그 어떤 힘
바로 그것이 바로 신이라면 신이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힘의 움직임과 질서에 따라
우리가 체험하는 세계나
보이고 느껴지는 세계는 달라집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인간의 뇌가 생각을 할 때는
이 미립자들이 구체적인 상념을 가진 입자가 되어
비교적 더 구체화되는
나머지 일정한 모습으로 정형화되는 형태가 되고
생각을 벗어나 있을 때는
순수한 빛의 파동 형태로서
입자가 아닌 자유스러운 파동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이 지루한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가 일정한 생각 속에 갇힌 시간이 많거나
혹은 고정관념으로 자기 주변의 인물이나 환경들을
무의식적인 생각 속에서 바라다보기 때문에
그 미립자들이
정형화되고 굳어지는 현상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친숙한 환경이나 사람들에게
실증을 내게 됩니다.
굳어진 의식의 활동이란 곧 다시 말해서
권태스럽고 짜증나는 마음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하지만 영성이 극히 높은 사람은
일체의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 있고
마음조차도 벗어나 있는 대자유의 자리에 있으므로
그런 일이 아주 적거나 아예 없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스스로 굳어진
딱딱한 미립자의 운동을 창조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깨달은 사람에겐
세상이 늘 신선하고 새롭고 힘차며
놀라운 축복의 감정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격이 좋다]라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의 [영성이 높다]라는 말도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을 기본적으로 어떤 존재냐 질문한다면
그것은 이처럼 엄청난 수의 미립자 덩어리가
자체적으로 움직이고 활성화되는
일련의 운동 내지는 파동 덩어리라고 말할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을 인간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양자물리학에서도 이런 미립자들의 파동을
스스로 자각하고 체험하지만
그 운동은 아예 떠나있는 독립된 바라다보는 주지자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은 어떻게 해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립자가 운동을 열심히 하든, 안 하고 정지하든 간에
미립자와 상관없이 항상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바로 이것이 [영혼]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미립자는
그것을 형성하는 에너지가
그 미립자 안에 따로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며
그 에너지는 또 그 안에 그것을 창조하는
보다 더 근원적인 힘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재의 물리학 수준으로는
미립자를 넘어선 에너지 차원으로 들어갈 수가 없고
그 에너지 이전의 차원은
더더욱 알 수가 없다고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저는
의식에도 높고 낮음이 있어서
우리 마음에 다양한 인식의 차원이 있다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이 지구의 모든 존재들은 다 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들을 우리가 표현한 대로
그 존재의 특성에 따라 차별화해서 나누어 보면
광물, 식물, 동물, 인간 그리고 신
이렇게 다섯 분류입니다.
여기에 왜 아직 그 존재가 입증되지 않은 개념에 불과한
신을 만들어 붙였는가?
논리적으로 볼 때 신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모두 형상적으로는 개체이며
우주의 피조물로서 근원적인 창조의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고
또한 존재의 본질적인 근원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본질은 광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형상을 만드는 우주 공통의 질료입니다.
그런데 우리란 존재(동물을 포함하여)는
식물적 요소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의식 속에서 잠자고 성장,
즉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식물들은 집단 무의식 차원에
주로 많이 속해 있습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일부분은 발전하여
개체의 마음도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래서 우리에겐
식물과 똑같이 잠자는 것 같은
무의식차원이 일부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우리는 또한 동물적 존재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움직이고 먹고, 싸고, 생식하는
욕망의 의식 위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동물들은 식물에 비해
더 독립적인 개체의 마음을 또렷하게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동물은 욕망의 차원에 있으며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욕망의 창조와 체험을 동물은 누리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그의 의식은 점점 더 차원이 높아지고 확장됩니다.
동물 의식 차원에서 좀 더 발전하여
기억과 사고력을 한 차원 높이 가지고
좀 더 내면적인 세계로 들어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이켜보면
성찰할 수 있는 게 바로 인간입니다.
그래서 사고력이 뚜렷하며
자아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강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영혼이란 개념을 만들어 가질 줄 알며
그것을 추구하는 형이상학적인 사고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인간의식의 성질 중의 한 특성일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까지 거슬러 올라와서 한번 돌이켜 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안에 이렇게
광물, 식물, 동물적인 요소들이
이미 우리도 모르는새에
지구의 역사와 함께 우리 안에 다 내재해 왔고
지금도 들어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러면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왜 무의식 상태에 있을 수 있는지
몸의 특성은 무엇인지
또 왜 개체의 마음은 왜 존재하며 그것을 가져야 하는지
또 왜 우리가 때로는 자기밖에 모르는 악함 속에 있거나
끝없는 충동적 욕망 속의 존재인지를
다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또 같은 사람들이라도 다 똑같지가 않고
어떤 이는 더 동물적 욕구에 가까운 이기적인 삶 속에서만 살며
또 다른 이는 더 지성적이고 고차원적인 훌륭한 삶을 사는가에 대한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들어있는 미립자의 운동성의 성향 문제이기도 하며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유전자가
그 얼마나 고차원적인가
그리고 또한 동시에 우리의 의식이
자기 안의 고차원적인 내면세계를 향하여
지금도 자기의 미립자 운동구조를 개량하기 위해
그 얼마나 더 노력하고 있느냐에 달린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처럼
실로 이 지구에 존재한 모든 존재들의 의식이 다양하게 다 들어있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바로 살아있는 지구의식의 화석이자
의식 발전의 결과물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지구의식의 자정 활동이며
놀라운 발현인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에테르체나 아스트랄체처럼
의식 차원의 몸만 가지거나
그런 세계에만 속해 있는 것과는 달리
모든 차원의 몸을 동시에 다 가지고 있으며
또한 우리 안에 모든 차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모든 자원에 걸쳐 존재하는 지구의 산물(열매)이기에
현재로선 가장 성숙한 생명체이고
그래서 깨달음을 가장 쉽게 얻을 수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깨달음은
전체를 알고 그것과 하나 되는 것인데
이미 전체의 속성이
우리 안에 다 들어있으니까요.
다만 신적인 요소는
아직 우리 안에서 구체적인 형상으로 나타나 있지 못하지만
그것은 어차피 낮은 차원의 의식에게는
나타날 수가 없는 성질이므로
예컨대 식물 의식에게는 동물 의식이 나타날 수가 없다.
물질화될 수 있는 존재로서는
인간이 비교적 궁극의 차원에 있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 안에 지구의 모든 개체 존재의 성질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또 가장 궁극의 모양으로 존재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인간이 동물과 차별화되는 것은
인간에게는 동물의 의식과는 다른
보다 더 확장되고 깊어진 의식
(순도가 높은 고차원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우주에 나타나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완전한 지구 차원의 진리적 존재이자
모든 것이 통합적이고 종합적인 상징의 응결인 존재로
압축 표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실로 인간은 지구의 꽃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인간은
지구가 만든 지구의식 정신의 정수이며
그보다 더 높은 신차원의 의식(깨달음)이
그로부터 다시 또 꽃 피어나기 위한 씨앗이며
알에 해당하는 그런 신묘한 존재인 것입니다.
이런 깊은 섭리와 이치를 이해한다면
우리가 진리를 위해 추구하여야 하며
왜 우리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와
올바른 진리 탐구의 궁극적 종착점은 무엇인가?
또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하여야 하는지 등등이
저절로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아직도
자기 존재의 이유를 모르고, 진리를 추구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아직 성숙된 정신이
그 안에서는 아직 꽃피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는 지구 입장에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쭉정이 식물 같은 존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진리를 추구하여야 함은
우리의 존재적 사명이 그러하기 때문이며
우리의 진리 탐구방식은
일시적인 우리의 모습인
인간의 형상이나 그 안에 내재한 여러가지
식물적 혹은 동물적, 혹은 정신적 영적 의식이나 요소들에
일부분 쪽으로 빠지거나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바로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지구와 우주의 전체적인 힘이 나타난 존재예요.
전체의 섭리가 표출한 존재니까요.
그래서 제가 올바른 깨달음을 위해서
우리는 광물의 영역(무의식)에서부터
우아일여의 체험(이것도 인간이 가진 의식의 영적 체험에 불과한 것이지만)까지가
다 골고루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은 우주 전체이며
또 그 이전에 그것을 있게 한 힘이자 섭리이지만
그것은 우주 밖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가 만든 인간이란 씨앗 속에
이렇게 자신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숨어 있는 것이며
또한 동시에 이 우주의 안팎에
이처럼 자기의 창조물과 더불어
그 속에 같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 안에도 신은 항상 들어 계시는 것이오
우리가 일부분적인 물질 몸만을 자기로 여기지 않고
자기 안에 있는 모든 능력과 체험까지도
자기의 세계로 여길 때
우리는 그 어떤 일부만을 버리거나 취함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전체가
온전하게 신의 드러남이며 그의 존재하시는 방식임을
우리 자신을 통해 명백히 하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는 여태까지
신이 만들어낸 가장 최고 수준의 자기 인식 도구요.
그의 눈이며, 그의 손이며, 그의 화신이기도 한 것이나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개체 몸을 벗어남
(그것만이 자기라고 착각하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우주의 깊은 비의에
드디어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저는 비로소 그 존재가
진리로 가는 신비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이제 신을 닮아
일체의 현상이나 체험에 매이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다 가지면서도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적으로 변화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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