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 자신을 똑바로 보자
7) 내면의 행복과 평화를 찾아서
저는 삶과 욕망 쪽에 지친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인생 안의 참된 행복과 평화는
바로 내 안에 있다고.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공허한 말이며
실제로 그것을 발견하는 길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그것에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아직 걷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가 홀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누군가가 손을 붙잡아주거나 몸을 지탱해 주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앞서간 수행자나 정신적인 스승들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들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열심히 노력하여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깨닫는 말인가요?
우리 자신은 이미 완벽하며
이미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전지전능한 창조주가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그의 화신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작은 나(小我)를 초월하고
우리 안에 살아계신 위대한 하나님과 합일해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는 자기가 스스로 만든 회로 안에서 생각하고
그 안에서 자기가 만든 욕망에
스스로 한숨 쉬며
스스로 스트레스로 괴로워합니다.
자기를 괴롭히는 것도 자기요
불안하게 만드는 것도 자기이며
화나게 하는 것도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입니다.
다만 우리가 남이나 환경이
자길 그렇게 만들었다고
변명을 하고 핑계를 대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것도 자기여야 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도 자기 스스로가 할 수 있다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건만,
육신을 가지고 사는 물질생활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돈이나 물질이나 멋진 이성이나 명예, 인기 등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논리 회로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 꼭 들어앉아서 전혀 벗어나올 줄을 모릅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천신만고 끝에 그것을 얻었다 하더라도
얼마 안 가서는
자기가 그렇게 갈망하던 대상에 대해
이제는 실증을 내기 시작합니다.
사실 우리네 인생이란
거의 대다수를 돈 벌기에다 바쳐지는 것인데,
그것은 또한 자기가 만든 생각 회로 안에서는
돈이야말로 <행복해지는 최고의 지름길>이라는
착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실현하려는 과감한 의지를 가지고
첫 발자국을 떼어야 합니다.
실제로 자기가 변하지 않으면서
명상에 대한 지식만을 가지고 익히는 것은
번뇌만 더할 뿐입니다.
<생각처럼 실제로 그런 사람>
이게 수행자에겐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리를 향한 끝없는 정열을 가지지 않는 한
이루어지기 힘듭니다.
현대문명은 누리기에 좋은
많은 물질적인 것들을 창조해 냈습니다.
또 오늘날의 매스컴은 쉬지 않고
우리를 성적 충동과 오감의 즐거움
그리고 세상의 지식적 권위 등에 자신을 맡기고
그저 세상이 시키는 대로 일하고, 먹고, 즐기며, 소비하며
그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만 오라고 유혹합니다.
-그들은 아무아무개 배우가 섹시하다느니 멋있다느니 하며
그대의 마음을 그쪽으로 쏠리게 합니다.
-또 누가 땅투기를 하여서 돈을 벌었다거나
사업을 해서 얼마나 벌었다느니 하며
그들의 마음을 돈에 얽매이게 합니다.
-또 누가 어느 좋은 학교에서 무슨 학위를 받았느냐 하며
그대를 지적인 열등감으로도 몰아넣었습니다.
뉴스는 매일같이 그런 사회적인 가치관을 따라가다 보니
자기 충동을 억제하지 못해
사고 치고 거짓말을 해서
문제에 빠진 사람들 얘기로 가득합니다.
실로 병 주고 약 주는 격입니다.
이게 현대문명의 본질입니다.
그래야 현대문명은 유지가 되니까요.
<욕망의 극대화 및 복잡한 전문화>
바로 이것이 인구가 늘어나는데
그들을 먹여 살리는 유일한 길같이 제시됩니다.
너무나도 아이러니한 얘기지만
욕망이 많아져야 소비도 많아지고
욕망이 충동적이 되어야
각종 사고도 많아져서 현대사회는 유지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수많은 직업들은
다 그래서 생겨난 것들입니다.
그러나 다 같이 인정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현대문명 안에서 영원한 행복과 진실을 찾아냈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게 현대문명의 아이러니요 패러독스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평범한 일상에서는
더 이상 기뻐하지도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로또 당첨 같은 사건이 자기에게 일어나길 바라며
욕구, 불만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결과 자기가 만든 세계 안에
자기가 갇혀버리게 됩니다.
<나에겐 그것만이 행복이야!>라는.
하지만 선진국일수록 자기가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적고
오히려 나이지리아 같은 나라나 방글라데시 같은
못 사는 나라 국민들의 행복도가 훨씬 높다는 것은
너무나 우습지 않습니까?
그것은 가난한 나라일수록
현대문명에서 거리가 멀고
상대적인 박탈감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문명 안에 갇혀
사육되고, 육감적 감각을 개발당하며 자극받는 그들은
욕망만 내면에 자꾸 더 쌓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풀지 못한 욕망은
그들이 자꾸만 이 세상에 돌아와서 삶을 다시 살아야 하는
윤회의 근본 원인이 됩니다.
즉 현대 산업자본은
인간을 욕망의 늪으로 몰아넣고
그 대신 거대한 이윤을 착취하여
황금이란 허상의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종교도 여기선 예외가 아닙니다.
말로는 구원과 해탈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상당수의 사람들도
그런 사회 구조에 편붙어서
그들의 조직과 신도 수
그리고 그에 따른 수입을 늘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현대문명의 병폐를
감히 나서서 지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병들어갈수록 영적인 환자는 늘어나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입니다.
거대한 교회 건물과 사찰들
대를 이어가며 목사가 되고
진리를 탐구해야 할 승려가
사찰을 팔고 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노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진리 아닌 게 있습니까?
그러니 자기를 찾고 놀면
참으로 노는 것이거니와
자기를 못 찾고 놀기에만 빠진다면
그것은 놀이에 오히려 먹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수행자는
무작정 현대문명에 빠져들고 따라가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것으로부터 오는 수많은 자극과 도전을
무력화시키는 내면의 강인함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힘이 우리의 영성을 되찾아주고
나아가서는 마침내 우리가 참으로 누구인지를 찾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내면의 행복과 평화는
이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흔들림 없이 지켜내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처음은 외부의 공격에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서
마치 여린 아기 떡잎과도 같지만
그러나 우리가 끊임없이 관심과 정성을 기울인다면
우리의 내면은 언젠가는 마침내
거센 폭풍 후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거목처럼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내면의 자기 성장은
누가 거저 갖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내가 하면 언젠가는 마침내 이루어지는 일이고
안 하면 그냥 그럴 뿐
내 마음속에서도 영원히 안 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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