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인가 인간적 관계는 없고 물질만이 있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변하지 않는 게 있어요. 자식들의 문화는 바뀌었지만 부모 된 마음은 변하지가 않았어요. 과거 농경사회 속에 어렵게 사셨던 부모님들의 마음이나 산업사회를 지나 정보화 사회를 살고 있는 현재의 부모의 마음이나, 부모가 자식을 바라다보는 마음은 똑같아요. 그래서 항상 자식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이라고 하는 부분이 오히려 부모를 평가하는 대상이 되어버렸어요. 능력이 있는 부모에게는 정말 부모를 존경하는 건지, 부모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존경스러운 건지, 헷갈릴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부모한테 절을 하는 건지, 부모가 가지고 있는 등기부를 가지고 절을 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가버린 세상을 보면, 이쯤에서 우리가 한번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부분이, 효라고 하는 부분은 유교에 있던 것이 효가 아니에요.
부초님의 가르침의 효는 엄청난 가르침이 있습니다. 부모은중경이라고 하는 경전을 보면 부모의 조건이 없는 희생, 이 세상에 나를 그냥 있게 해준 것만으로도 그 은혜를 갚을 수 없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로 표현하고 있느냐하면 오른쪽 어깨에 아버지를 모시고, 왼쪽 어깨에 어머니를 모시고, 그 수미산이라고 하는 그 높은 산을 가죽이 닳아지고 뼈가 닳아져서 골수가 나오기를 억천만겁을 하더라도 그 부모의 은혜를 갚을 수 없다.
어떤 행위를 해서일까요? 바로 그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지극하고 그렇게 견고하다는 가르침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 엄청난 효,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그냥 물질적 대상정도로만 보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부분들이 형제기간에 우애가 꽤 좋다가도 몇 푼 남겨놓지 않은 재산 때문에 상갓집에 가보면 서로 인상 쓰고 앉아서 입단속 하는 모습을 볼 때가 꽤 많습니다.
저는 안 보고 싶은데 제가 눈치가 좀 빠른 편이거든요. 아주 우울한 기분을 갖게 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도 불구하고 눈물을 흘리기 보다는 그 몇 푼 남기지 않은 재산이 어느 쪽으로 갈건가하는 것에 혈안에 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바로 인간적 관계를 통해서 맺어지는 사회가 아닌, 물질과 나와의 관계만이 너무 난무하는 세상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가슴 쓸쓸하게 하는 그런 경우들이 무척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 보살님께서 질문을 주신 “없어도 있는척해야 억지로라도 효도를 받을까?” 그냥 포기하세요. 꼭 받아야 맛인가요? 차라리 지금부터라도 내가 조금 아껴서, “내가 너희들한테 손 벌리지 않고 살겠다.”는 마음이 오히려 더 정확한 답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께서 가르치셨던 부분인 효에 대해 생각해 보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첫째 부처님께서는 부모은중경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태에 들어서 부모께서 부호한 은혜] 여러분, 아이를 가진 부모가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 눈물겹습니다. 평상시에 자유로웠던 그가 그렇게 좋아했던 음식도 다 먹을 수 있어요? 없어요? 해롭다면요, 소주도 한잔 못 먹습니다. 괴롭게 내가 나만을 위해서 살 때는 정말 당당했던 모습을 아이를 위해서라면 모든 음식을 삼가야 해야 되고, 모든 발걸음을 삼가야 되고. 추울세라 더울세라 오직 보호해서 뱃속에 키웠던 부모의 은혜가 지중합니까? 안 지중합니까? 얼마나 소중한 얼마나 지중한 은혜입니까?
두 번째는 [해산할 때 고통을 받아서 그 고통을 잊으신 은혜] 정말 해산이라고 하는 부분은 생명과 맞바꾸는 거예요. 그래서 옛날에 불교를 잘 믿지 않았을 때도 그 무지했던 우리 아버지들이 오직 문고리를 잡고 빌었을 때가 있었어요. 누가? 아내가 애 낳을 때. 어디가 빌 때가 없으니까 문고리를 잡고 비는 거 아닙니까? “요번에 우리 아내가 아이를 건강하게 잘만 낳아주면 천지신명님 내가 정말 착하게 살 테니까 한번 봐 달라.”고. 문고리를 잡고 빌었던 게 아버지 마음이었어요.
왜 그렇게 빌었을까요? 내 아내가 나의 자식과 생명을 맞바꿀 수 있는 위기상황이라 이거에요. 목숨을 잃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과거에 애 낳다가 돌아가신 분들 많아요. 그 생명과 맞바꾸는 고통 속에서도 오직 “나는 죽어도 자식은 살려야 되겠다.”는 의지를 통해서 세상바깥에 내놨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뭐라고 그래요? “그럴 걸 왜 낳았냐고?” 정말 너무너무 이해 안 되는 질문을 던지는 요즘의 그런 세태는 아닌가 생각이 들어서 참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서 그 [해산의 고통을 받을 때, 그 고통을 결코 죽음과 맞설 수 있는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되겠다.
그다음에 [자식을 위해서는 본인이 모든 부분을 뒤집어쓰고 싶어 해요.] 그래서 가끔은 이런 경우가 있잖아요. 어떤 어머니가 자식에게 버림을 받았어요. 그 버림을 받은 어머니가 경찰에 발견이 되죠. 그래서 집이 어디냐고 묻고 물어도 절대 본인은 자식이 없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나중에 주민등록을 다 찾아서 연구를 해서 그 자식이 버린 것을 알고, 자식이 버렸다고 물으면 뭐라고 그래요? “절대 내 자식은 버린 일이 없다. 그냥 내가 나왔다.”
치매증세가 있는 어머니도 자식 원망을 안 합니다. 나는 내 삶이 너무너무 고통스러워서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이지, 내 자식은 절대 버리는 자식이 아니라는 것이 모든 어머니들이 공통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귀하디 귀한 부모를 도대체 돈으로 살 수 있습니까? 물건으로 살 수 있습니까? 뭐로도 바꿀 수 없는 그 마음을 효는 못할망정 아프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 필요가 있지 않겠나하는 생각을 합니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라서도 오직 걱정하는 게 뭡니까? “내죽은 이후에 내 자식은 어떻게 될까?”라고 하는 게 걱정입니다. 호의호식을 하고 있는 자식을 끝까지 끝까지 놓지 못하고 걱정하는 은혜를 베푸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고로 오직 부처님의 부모은중경에 나타난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고, 그 부분이 가슴에 조금 와 닿는다면, 내 부모의 적은 그 알량한 재산에 우리가 현혹되지 않고 당당하게 효할 수 있는 부문의 근본이 실천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합니까.
가정의 달, 한번쯤 부모은중경을 되새기고 돌이켜 볼 수 있는 그런 효도하는 불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스님법문 > 월도스님_BTN즉문즉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도스님 BTN 즉문즉설 27_4. 스님, 입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0) | 2017.11.28 |
---|---|
월도스님 BTN 즉문즉설 27_3. 시댁이든 처가댁이든 좀 더 편해지는 방법이 없을까요? (0) | 2017.11.28 |
월도스님 BTN 즉문즉설 27_1. '가정의 달'에서 '가정의 날'로... (0) | 2017.11.27 |
월도스님 BTN 즉문즉설 26_6. 불교에서의 4대 명절이 궁금합니다 (0) | 2017.11.23 |
월도스님 BTN 즉문즉설 26_5. 부처님탄신일이 나라마다 다르다고 하네요. (0) | 2017.11.23 |